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진우 Jun 05. 2024

히든 아이덴티티(2)

두 번째 세미나 시간

여러가지 일이 있다보니 오늘 업로드가 늦었네요. 밤에 급하게 올리다보니 두서가 없이 보이는 것 같기도 합니다. 독자분들의 양해바랍니다.




 스톤 허스트 수용소의 램 박사는 피아노를 연주하는 아름다운 일라이저 그레이브스 부인을 소개합니다. 그녀의 증상은 신체와 감정적인 접촉을 너무나도 음란하게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그로 인해 남편에게 지나치게 폭력적인 행동을 하게 되어 입원하게 된 사람입니다. 램 박사는 에드워드에게 질문합니다. 그녀에게 진정제가 아닌 어떤 처방을 할 것인지요. 에드워드는 약에 대한 반응이 아니라 피아노 연주를 하루 세 번 처방하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런 장면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일라이저라는 이 여성은 앞서 솔트 박사의 강의에서 헤로인을 투여한 몽롱한 상태에서 솔트 박사가 히스테리 발작을 일으키게 한 사람이었습니다. 


 정신의학에서 초기 히스테리에 처방하던 아편류 약제는 히스테리에 도저히 듣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의사들이 다양한 임상을 연구하기도 했죠. 이게 어느 정도로 안 낫느냐고 한다면 가끔 방송에서 crps로 인해서 고통스러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살아도 고통에 시달리는, 그 정도였습니다. 대표적으로 프로이트의 히스테리 연구에 실려있는 엘리자베스 사례가 그렇습니다. 가만히 있어도 피로도가 가시지 않고 통증도 계속 느껴졌기 때문에 휠체어를 타고 다리를 고정할 정도였었습니다.

 

 일라이저 부인이 남편에게 폭력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은 그러한 약이 투여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증상의 기전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예전부터 ‘히스테리 부린다’는 농담을 하곤 했습니다. 이것이 신경질을 부린다는 의미로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신경질을 부리는 것이 히스테리가 아닌 겁니다. 히스테리는 정신적인 내용이 신체로 등장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리고 히스테리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성적 혐오감입니다. 성에 대해서는 유독 과민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불쾌했다면 혐오스러움을 느꼈기 때문에 폭력이라도 행사해서 자신을 지키려고 했을 겁니다. 


 특히 정신질환이 발병하게 되면 리비도의 흐름이 좀 막힙니다. 그 흐름이 막힌 이후에 그 자리에서 통증과 같은 반응이 일어나기도 하죠. 그리고 그것을 발기한 남근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라캉 정신분석 하시는 분들은 ‘팔루스 주이상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겁니다. 히스테리 반응에서 나타나는 과민함이 마치 팔루스처럼 발기되어 있는 것과 같다고 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에드워드는 일라이저에게 약이 아니라 피아노 연주를 처방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행동처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행동처방만 잘 들어가도 신경증 증상이 호전되는 경우는 상당히 자주 등장합니다. 물론 저 역시도 그러한 처방경험이 있고 호전되었다는 보고를 직접 들은 입장입니다. 


 이때는 증상에 들어가던 리비도가 행동을 통해서 유익하게 처리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승화로 이어진다거나 혹은 다른 여러 가지 처리방식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증상이 어디서부터 출발하게 되었는지 그 진단이 잘 들어갔다면 충분히 효과가 나타나기도 하죠. 


 에드워드의 행동처방은 그 과잉된 리비도 처리와 이어질 수 있습니다. 승화로 이어진다는 거죠. 승화라는 것도 막연히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 체계적인 방식들이 있어야 하고 그만한 시간투자도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승화를 다르게 이야기하면 작은 것을 크게 만드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신경증 문제는 대부분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런데 신경증이 일어났다는 것 자체는 자아의 균형을 유지하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 신경증은 ‘아주 뛰어난 외교관’으로도 비유가 됩니다. 


 에드워드는 피아노 연주가 훌륭하다면서 일라이저에게 접근합니다. 그런데 일라이저는 칭창을 듣고 경계합니다. 의사는 칭찬하지 않는데 칭찬을 해주었다고요. 왜 의사가 칭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걸까요? 


 그 당시 정신의학에서의 수용소 치료는 재활보다는 행동 교정에 더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범죄자들과 동급으로 바라본 것이죠. 오죽하면 미국에서 농담할 때, 정신병원을 두고 ‘가장 보안 수준이 낮은 교도소’라고 이야기를 할까요?


 그렇다고 모든 정신의학적 치료가 그런 것은 아니었습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정신질환자들의 급증을 감당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덕분에 수용소는 치료보다 관리에만 치중했습니다. 그리고 치료라고 하는 것은 대부분 약을 먹이고 재우는 것이었죠. 

 에드워드가 스톤 허스트 수용소를 처음 방문하고 활기 넘치는 병원의 분위기에 의아해했던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습니다. 자아를 마취시키는 것을 치료로 받아들이던 당시에 스톤허스트 수용소의 분위기는 분명 ‘치료적’이지 않았으니까요. 


 스톤 허스트 수용소에서는 의사와 환자들 모두가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환자와 상류층이 섞이는 치료의 방식이라고 주장합니다. 램 박사의 독특한 치료계획은 보통 사람들과 환자들이 만나는 것에 있었습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존경스러운 사람과 함께 대화를 나눌 수 있다면 긍정적인 효과들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존경스러운 의사의 치료를 받는 정신병자는 그 호전이 상상이상일 겁니다. 그리고 의사가 주는 약은 행동조절을 위한 약이라기보다 진정한 의미에서 치료제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정신과 약물에서 등장하는 플라세보 효과도 그러한 의사와의 전이를 통해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사실 의사의 말이 치료에 있어서 약보다 더 큰 효과를 보여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질환의 치료에서는 일상생활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더 좋습니다. 신경증으로 일상생활을 포기하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회사를 그만둔다거나 아님 학교를 자퇴하는 경웁니다. 휴식하면 괜찮아질 것 같은데 오히려 더 크게 고생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하죠. 


 쉬운 예로 든다면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활용되는 에너지가 있습니다. 그 에너지의 처리가 멈추게 된다면 우리 자아는 증상을 동원해서라도 그 에너지를 처리하려고 합니다. 즉, 학교 생활에 지친 학생이 자퇴를 하면 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해보죠. 그런데 자퇴처리를 하고 나자 즉시 자기가 생각하던 우울증이 전보다 더 심각해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됩니다. 그래서 약을 증량하는 경우도 곧잘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제 램 박사는 에드워드에게 임상실습을 제안합니다. 옥스브리지의 괴물이라고 불리는 정신질환자의 옷을 갈아입히는 겁니다. 그는 험상궂고 폭력적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다른 환자들에게서 격리되어 있는 이유도 그가 폭력적으로 행동해서 일 겁니다.

 

 정신질환자들 중에서 격리가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렇게 격리가 요구되는 상황은 타인에 의한 처벌을 불러일으키거나 혹은 범죄를 통해서 쾌감을 얻는 경웁니다. 타인에 의해서 처벌을 받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내적 죄책감을 다루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복잡한 메커니즘을 통해서 결정되며 이해할 수 없는 시도들을 통해서 처벌을 받게 만듭니다. 예를 들어서 라캉의 ‘에메’ 사례를 예로 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것은 타인에게 범죄를 저질러서 스스로를 처벌하고자 하는 의도가 숨겨져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를 통해 쾌감을 얻는 경웁니다. 이런 경우는 강호순이라는 연쇄살인범이 대표적인 모델이 될 겁니다. 쾌락형 범죄자로 여러 부녀자들을 강간하고 살해한 사람이죠. 


 그렇다고 해서 옥스브리지의 괴물이 그런 범죄자일까요? 겉으로 보기에는 그럴 것도 같습니다. 왜냐? 그는 정신질환자이고 압도적인 외모를 지니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램 박사는 에드워드에게 ‘눈을 쓰라’는 단서만 주고 에드워드를 병동에 들여보냅니다.


 그런데 옷을 갈아입히는데 성공을 하죠.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요? 대체 ‘눈’이 지니는 의미가 무엇이기에 이런 것이 가능했을까요? 심리 실험 사례를 한 가지 이야기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2006년에 영국 뉴캐슬대 연구팀은 ‘감시의 눈’이라는 심리실험을 진행했습니다. 구내식당에 자율 계산대를 설치했는데 거기에 사람의 눈 사진을 붙여 놓았을 때와 꽃 그림을 걸어두었을 때 걷힌 비용을 비교한 겁니다. 

 사람의 눈 사진을 붙여놓았을 때 자율 계산 액수는 꽃 그림일 때보다 2.8배나 많았다는 겁니다. 이러한 실험의 내용을 정신분석적인 내용으로 검토한다면 우리 스스로를 검열하게 만드는 정신적 기관과 감각 기관 사이에 연관작용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시선에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흔히 말하는 황시 공포증과 같은 내용이죠. 정작 무서운 것이 ‘시선’인 것 같지만 생활을 조사해 보면 그런 공포반응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상상도 못 할 내용이 될 때도 있습니다. 만약 그 시선에서 과도한 정신적 흥분이 일어나게 되었다면 옥스브리지의 괴물은 진정하기 위해서 시선을 더 이상 받지 말아야 할 겁니다. 그래야 그는 불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옥스브리지의 괴물이 다른 사람들을 위협하는 행위자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행위가 됩니다. 정신질환에서 등장하는 폭력행위에서는 이러한 의미들이 숨겨져 있을 때가 종종 등장합니다. 물론 현실에서 책임을 피하려고 이런 것을 근거로 이야기한다면 그때는 조금 더 강한 처벌을 요구한다고 보는 게 맞겠죠. 


 에드워드는 옥스브리지의 괴물이라 부르지 않고 아서라는 이름을 찾아주고 불러줬습니다. 그렇게 흥분이 진정되었다면 그는 언제나 옥스브리지의 괴물로 살았기 때문에 자기 이름도 없이 살아온 겁니다.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에서의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유명한 시구입니다. 


 우리는 누군가를 부르는 방식이 곧 그의 정체성과 연결될 수 있음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괴물로 불릴 때는 괴물로 움직인다는 겁니다. 그렇게 에드워드는 램 박사에게 어느 정도 신임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병원에도 잘 어울리게 되죠.


 그리고 어느 날, 에드워드는 비밀 통로를 통해 감금된 원래의 의료진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램 박사의 정체가 군의관 출신의 사일러스라는 환자라는 것을 알게 되죠. 원래 스톤허스트 수용소를 운영하던 사람은 솔트박사였습니다. 그런데 그의 치료방식은 너무나 폭력적이었습니다. 광기를 억제하는 방법으로 공포를 발견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닌 겁니다. 그 공포를 발견하는 방식은 고문이었습니다. 공포가 정신이상에 대한 열쇠와 통제력을 갖게 해 줄 것이기 때문에 미쳐버린 사일러스가 다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파괴되어야 한다는 믿음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사일러스도 마찬가지로 의산데, 그리고 해서 정신치료를 안배 운 건 아닐 겁니다. 광기의 치료에 대해서는 고대 광인들의 치료들에 대한 내용들이 전해 내려오기도 하니까요. 잘 알려져 있는 고대의 도덕치료에서도 환자를 공포나 고통에 노출시키지 않고 적당한 구속감을 느낄 수 있게 하는 것이 효과적인 치료법이었습니다.


 현대의 정신병원에서도 환자들이 신경증 발작을 일으키거나 이유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을 때, 의사가 사지 강박을 처방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진정이 되지 않아서 여러 움직임을 보이기도 하지만 잠시 묶어두면 진정이 되곤 합니다. 때론 감사를 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는 직접 현장에서 이런 상황을 봤는데, 대화가 되지 않는 발작 상황에서는 임시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너무 과도하면 문제가 크게 발생할 수 있을 겁니다. 몸이 굳어서 고생하게 되기도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일러스는 감금된 솔트박사를 만납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비난합니다. 그래도 사일러스는 직원들을 통해서 식량을 더 보급해주고자 합니다. 그런데 솔트박사는 자위중독자와 알코올 중독자가 직원이 될 수 있는지를 코웃음 칩니다. 사실 자위중독이든 알코올 중독이든 유의미한 활동이 없다면 치료도 물 건너갑니다. 사일러스는 과도하게 처방되었던 아편을 끊자 무기력이 사라졌고 다운증후군도 부엌에서 의미 있는 일을 한다고 알려줍니다. 


 여기서 처방되는 ‘아편’은 자아를 억제하는 작용을 합니다. 따라서 힘을 뺍니다. 아편 계열의 향정신성 약품을 복용하고 무기력이 찾아오는 경우는 생각보다 많습니다. 아편. 즉 오피오이드의 작용은 중추신경계의 마비입니다. 그리고 진통을 진정시키죠. 자아의 마취효과를 일으키기 때문에 활기가 없어지거나 심각할 때는 박탈감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치료방식으로 따진다면 산업혁명 초기의 치료방식보다 사일러스의 치료방식들이 훨씬 세련되어 있고 인격적입니다. 문제행동만 제거하는 것이 치료라고 생각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정신위생은 정신건강과 다른 의미로 사용되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흥미로운 사례를 하나 이야기해 보도록 하죠. 제 과거 내담자는 강박증에 시달리면서 특정 단어를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병원에서 하는 인지행동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특정 단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치료방식은... 작은 방에 들어가서 그 말을 백번씩 하고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과정을 통해서 이전에는 말할 수 없었던 것이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말’은 할 수 있었는데 강박증 자체는 더 나아지는 게 없었습니다. 


 여기서 치료에 대해서 의미 있는 내용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요즘 정신과에서 자해를 치료하는데 약을 굉장히 많이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약을 굉장히 많이 써서 자해행동이 멈춘다면 그것이 ‘치료효과’라고 이야기해야 할까요? 정신치료에서 문제행동이 사라지는 것이 궁극적인 치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이런 사례는 일반적인 치료사례에서도 흔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자해를 하는 내담자가 자해행위를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해서 치료가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죠.

 이 영화에서는 치료로 진행된다고 할 수 있는 내용도 보여줍니다. 눈이 먼 늙은 부인은 식사를 거부합니다. 식사를 보조하고 있는 밀리는 그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에드워드는 밀리에게 휴식을 지시하고 직접 노부인의 식사를 돕습니다. 그런데 에드워드의 방식은 독특합니다. 부인의 아들을 연기한 것입니다. 이 노부인의 망상은 자신이 먹은 음식만큼 아들이 먹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을 조금이라도 아껴서 아들을 주겠다는 말이죠. 에드워드는 그것을 알고 아들을 연기한 것 같습니다. 


 이러한 망상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꽤 시간이 필요합니다. 신경증자는 정신과 의사라고 해서 바로 자기 문제를 고백하지는 않습니다.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대타자에게만 드러내는 것이 자기 증상입니다. 그런데 병원에 온 지 얼마 안 된 에드워드에게 바로 증상을 드러내보였다는 것은 조금 의외입니다. 저도 병원에서 근무할 때 그랬던 경험이 몇 번 있었습니다. 의사에게는 자기 증상을 감추면서 저에게는 자기 증상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는게 조금 의외로 느껴지던 일이었죠.


 고대에는 이런 사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도덕 치료에서 망상으로 식사를 거부하는 광인에게 밥을 먹을 수 있도록 도운 부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광인들은 다른 사람이 주는 밥은 먹지 않았지만 그 부인이 밥을 줄 때는 먹었습니다. 즉, 광인들이 신뢰를 보내고 존경심을 표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주는 음식은 믿을 수 있다는 것이죠. 그에 따라서 노부인은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지만 아들만은 믿을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밥도 먹을 수 있었다는 말이 됩니다. 눈이 보이지 않으니까 들리는 음성에 의해서 아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되겠죠.

 


 그리고 사일러스는 스톤 허스트 수용소의 진정한 주인이라는 망상에 빠진 환자를 소개합니다. 원래 병원장이었던 솔트 박삽니다. 사일러스는 솔트 박사에게 전기치료를 실시합니다. 전기치료의 결과는 어땠을까요? 

 솔트 박사는 사람이 멍해집니다.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사일러스는 그것을 보고 망상에서 평온을 찾은 것으로 설명합니다.

 

 뇌의 기관을 파괴함으로써 문제행동을 제거할 수 있다면 그것을 치료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정신의학에서도 비슷하게 부끄러운 역사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전두엽 절제술입니다. 이 수술은 노벨상까지 수상을 했습니다만 인간을 그대로 좀비로 만들어버리는 것과도 비슷합니다. 


 실제 부두교에서 뇌 기능을 파괴하여 인간의 지적 활동을 마비시키는 좀비화 처벌을 했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시체가 살아나는 것으로 좀비를 생각했지만 부두교에서 말하는 좀비가 더 설득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캐나다의 인류학자 웨이드 데이비스는 좀비의 실체를 알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아이티 공화국으로 6개월간의 탐사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1983년 그는 놀라운 결과를 발표합니다. 실제 좀비를 만드는 과정은 죽은 사람을 마술로 살려내는 것이 아니라 산 사람에게 약물을 주입해 죽은 것처럼 만든다는 것입니다.

 

 좀비 독약이라고 불리는 이 약물은 복어의 테트로도톡신과 강력한 환각 물질을 섞어서 만듭니다. 그럼 신체의 생리 기능이 급격하게 저하되면서 마치 죽은 것처럼 보이는 가사상태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때 호흡중추에도 문제가 생깁니다. 산소부족으로 인해서 뇌에 문제가 생기면서 손상이 발생하고 그 과정에서 모든 기억과 사고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는 자아가 파괴되는 것입니다.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신경증이란 바로 이러한 자아의 파괴를 막기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

 

 사고능력이 저하되면서 다른 사람의 명령을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겁니다. 주체성을 잃어버린다는 것이죠. 이러한 좀비화 과정은 영화에서 보여주는 전기치료와 그 효과가 매우 흡사합니다.

 

 전기치료하니까 과거에 전기치료에 대해서 어느 정신과 의사와 나눈 대화가 생각이 나네요. 정신의학에서 전기치료자체는 우울증에 효과가 있다고 이미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저는 전기치료 자체가 ‘자기 처벌’과 동등한 지위에 있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만약 전기치료 자체가 우울에 대한 치료적 효과를 지니고 있다면 조현병으로 진단되어(정신분석에서는 편집증) 입원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동일한 효과가 나타나야 할 겁니다. 그런데 대부분 이 전기치료를 굉장히 고통스러워합니다. 하고 나면 사람이 축 늘어지는 것도 있고요. 


 그리고 이 전기치료를 환자들이 거부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것은 약을 거부하는 사람에게도 비슷하게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 치료자체의 효과성 측면에는 의학에서는 합의가 되었겠지만 정신분석에서는 이것에 대해서 같은 동의를 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합니다. 


 사실 정신분석하다 보면 신경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의료적 처치도 하기 어려워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서 MRI촬영을 못한다든지 하는 겁니다. 강제로 하면 환자가 긴장하고 더욱 고통스러워지니까 억지로 할 수는 없는거죠. 이것을 단순히 폐쇄공포정도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흔히 생각하지도 못하는 요소들이 여기에서 등장하기도 합니다.


 정신질환에 시달리는 경우에 가장 큰 문제는 고통스러움입니다. 그런데 이 고통만 느끼지 않는다면 괜찮을 것이라고 다들 생각합니다. 자아가 파괴된다면 고통을 더는 느낄 이유가 없습니다. 고통스러움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다면 치료가 되었다고 착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착각은 우리 주변에서 의외로 많이 관찰됩니다. 고통스럽지만 않으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하죠.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히든 아이덴티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