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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anghee An Sep 20. 2016

추억이라는 이름의 영속

상실이 초래한 또 다른 획득 

 머리 속에 맴도는 문장들 중 어떤 것은 글이 되지 못한 채 증발해 버리고, 어떤 것은 차마 물화할 수 없어 잠시 머금기만 해도 오래토록 집요하게 남는다. 어떤 기억은 잊으려 해도 마음속에 화석처럼 길이길이 남아 나를 찌르고, 어떤 것은 오래도록 담으려 애써도 이내 희미해져 버린다. 삼십 년 남짓 세상에 머물렀을 뿐인데 나는 이미 많은 기억을 안고 살아가게 되었다. 사랑의 기억, 증오의 기억, 열정의 기억, 아픔의 기억, 그리고 치유의 기억까지.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는다. 기억이란 항시 추억이란 필터에 덧입혀지기 마련이니까. 그래도 한 번 희망을 걸어본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만큼 그때 역시 아름다움을 느꼈을 거라고. 



아름답지 않았다면 애초에 기억조차 되지 않았을 것이므로.



 어떤 기억은 너무 예쁘고, 아름답고, 동시에 너무나 아득해서 이것이 정말 내가 겪은 일인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그러면 찬찬히 생각해본다. 그때 내가 입은 옷, 당시의 냄새, 공기의 온도와 분위기, 사진 혹은 글 따위의 기록들, 그리고 그 마음까지. 이런 세세한 것들까지 찬찬히 끌어올리다 보면 이내 안도감이 든다. 



'아, 진짜였다. 꾸며낸 것이 아니다. 그 예쁜 것이 정말로 그때 거기에 있었다.'  



 밀려오는 많은 기억들을 어떻게 하면 멈출 수 있을까. 희미해지는 순간들을 어떻게 하면 붙잡을 수 있을까. 고민해봐야 소용이 없다. 시간은 우리를 알아서 잘 키워낸다. 상처는 치유되기 마련이고, 사랑은 끝나면 또 새로이 시작된다. 한 시절의 사람은 그 시절이 끝나면 내 삶에서 사라지지만 이내 또 다른 사람이 내 삶을 채운다. 시간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손에 쥐어 주고, 뺏고, 또 쥐어 주기를 반복하며 우리를 어른으로 키운다. 나 역시 많은 것을 빼앗겼고, 다른 것을 받았고, 또 빼앗겼다. 상실의 순간을 겪으며 억울함을 느끼지 않기란 아직도 불가능에 가까울 만큼 어렵고, 받은 뒤에 이것 또한 영원하지 않을 것이란 걸 되새기는 것 또한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순간은, 그 찰나는 소중하다.



 태연해지기를 기대하지만, 태연해지는 일을 두려워한다. 생의 설렘을, 기대와 희망을 잃을까 두려워서일 거라 생각한다. 십 대 후반, 이십 대 초반에 쓴 글들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절을 증언하는데 지금의 나는 그때의 반의 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지금까지도 그만큼 치열하게 살았다면 지금쯤 나는 아마 제정신은 아니었으리라. 지금의 여유도 다 그때의 치열함의 산물일 테니까. 지금 내 곁에 남아있는 사람들 또한 내가 잃은 사람들이 있기에 빛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상실이 초래한 또 다른 획득이랄까.



 가을이 되면 나는 참 그리운 것들과 소식이 궁금한 사람들이 많아지고, 오래도록 기억될 순간들이 자주 떠오른다. 행복하거나 즐거운 기억은 거의 손에 꼽을 정도지만, 그래, 대부분 지지리 외롭고 찌질하고 고통스러웠던 순간들이 대부분이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그 나날들이 그립다. 오롯하게 나의 속을 들여다보았던 그 고독의 시간과 그 시간 속에서 반짝반짝 나와 교감해 주었던 빛나던 사람들, 나의 한 시절을 숨 막히는 밀도로 채워주었던 영화와 음악과 어떤 길목들까지. 이렇게 빛나는 어떤 기억들은 내 일생 동안 절대 잊히지 않고 그 지위를 유지할 것이다. 



그 과거가 지금의 나를 구성하고 있으므로, 시간의 흐름은 직선이 아니므로.



 이 순간 역시 사라질 테고, 용기 내어 놓아주어야 할 테고, 곧 기억될 것이다. 어느 가을 밤, 내 생을 한 번 되새겨 보았노라고. 춥지만 따뜻했노라고. 잃은 것 생각하니 쓸쓸했지만, 잃는 것 또한 생의 일부라 생각하면 잘 살아왔다 싶어 기뻤노라고. 잃은 건 아주 없어져 버리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에 쌓이는 것이라고.



 추억이란 이름의 영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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