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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햇살아래 바람한줌 Oct 17. 2020

아빠와 보름달

혼자일 때 당신은 누구입니까

행복이란 단어를 떠 올 릴 때 매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의 아버지. 1914년 12월 26일생이신 아버지는 중국분이시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 우리 집은 '중화반점'이라는 중식당을 운영했었다.


어릴 때 들은 이야기라 자세히 기억나진 않으나 중국 산둥성이라는 곳 어딘가에서 10대 중후반에 한국행 배를 타고 오셨다 했다. 4남매 중 둘째인가 하셨는데, 공부를 정말 싫어하셔서 할아버지께 담뱃대로 자주 맞으셨다고 했다. 맞는 것도 싫고 공부도 싫은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허락을 받아 한국행 배를 타고 오셨다 했다.

서울역 근처 어딘가에서 장사를 하는 친척집에 일을 배우러 오셨다는데, 아버지의 친가가 경제적으로 꽤 부유한 집이었나 보다. 한국에서 몇 년 동안 장사를 배운 아버지는 고국으로 돌아가는 배에 올랐다. 그런데 중국으로 가야 하는 배가 그만 일본군에게 점령되어(지금 내 예측으로는 당시 일제 점령기가 끝날 무렵이었던 것 같다) 중국으로 가는 것이 아닌 일본으로 가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한국말도 어느 정도 가능했을 아버지를 태우고 일본에 내린 배는 아마도 한국인이 아니다 싶었는지 감옥에서 몇 밤을 보내게 한 후, 강제징용을 시키지 않고 다른 일자리를 주었다고 했다.
당연히 중국인이라는 증명서도 있었지만 나이도 어렸을 때고, 되돌리는 방법도 복잡했을 테고, 자신들의 편리함과 실수를 인정하기보다 쉬운 선택을 했던 것 같다. 여하튼 그때 하시게 된 일이 바로 요리라고 하셨다. 아버지가 한국에 와서 장사를 배운 곳이 식당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이 또한 어린 기억이라 정확치가 않지만, 이 이유로 요리를 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중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여러 번 했지만 쉽게 해결할 수 없는 시대였고, 아버지는 꽤 오랜 기간을 일본에서 머무르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신다. 한국에 와서 다시 친척을 찾지는 못하였으나 지금 아버지의 유품을 보면 중국 가족을 찾기 위해 오랜 시간 수소문하신 흔적들이 있다. 가끔 집에 찾아오시는 손님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사진 뒷면에 쓰인 메모를 해석해 보니 아버지의 고향을 찾는 메시지들이 담겨 있었다.
어디, 안 그러셨을까... 이국땅에 혼자 남아 돌아가실 때까지 얼마나 수많은 시간들을 혼자 외롭게 버텨내셨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아련해진다. 나도 20대가 되어 국적을 한국으로 바꾸면서 알게 된 것인데 중국 산둥성이라는 곳이 아버지 고향이었지만, 여권에는 대만인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것도 아버지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 어렵게 만들었지 않았나 싶다.

아버지가 일본에서 인지 한국에서 인지 모르겠으나 한 가지 더 배우게 된 일이 목공이다.
목공일은 아버지에게 꾀나 흥미 있는 일이었는지 나중에 중식집을 그만두시고 난 뒤에도 목수로 일하시면서 마을 곳곳의 창호지 문 등등을 수리하고 만드셨다. 어릴 때 살던 집도 아버지가 이곳저곳을 수리하시거나 리모델링하신 기억이 난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문을 만드시는 것을 보거나 작은 칼로 유리를 동그랗게 잘라서 거울을 만드신 모습들을 신기하게 쳐다보던 기억이 난다. 집안에 농이나 찬장, 도마도 만드셨고 나를 위해 타고 놀 수 있는 흔들리는 목마나, 작업실 안에는  그네도 만들어 주셨다. 어느 정도 크니 엎드려 공부를 하는 게 불편해 보이셨는지 책상과 의자도 만들어 주셨었다.
아버지와 어머니 두 분 다 재혼이셨는데 그 사이에 외동으로 태어난 게 나다. 외동이자 늦둥이여서 정말 엄청난 사랑을 받았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 물 진적인 유산은 한 푼도 받은 게 없지만(이 사연은 나중에 따로 이야기하기로) 무엇보다 중요한 긍정의 마인드와 행복하게 일상을 보내는 방법들,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받은 것 같다. 특히나 아버지에게서는 정말 대단하다고 할 정도의 애정와 긍정마인드라는 유산을 받았다.
어릴 때 살던 마을은 면사무소, 경찰서, 농협, 우체국, 학교 등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조금 있는 곳이긴 했지만 시골이고 농사가 주된 일이었기 때문에 우리 집의 문화는 좀 특이했다. 아버지가 음식을 하고, 청소를 하고, 어머니가 밭일을 주로 하셨다. 두 분의 나이가 많으신 편이었으나 여행도 자주 다니셨다. 항상 집에서는 음악이 흘렀었고, 그렇지 않더라도 요리나 일을 하실 때 아버지는 항상 뭔지 모를 콧노래를 흥얼거리셨다.(지금도 누군가 흥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정말 기분이 좋아진다. '나는 지금 행복해'라고 노래하는 것 같다) 그리고 넉넉지 않은 생활에서도 항상 웃음을 잃지 않으셨다. 사진 속에서도 항상.

아버지는 조그만 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주셨다. 우리 집에서 어린 내 걸음으로 10여 분도 안 되는 곳에 남한강 줄기가 있는데(문밖에서 내다보면 보이는 강가) 날씨가 따듯해지는 봄날의 이른 저녁이나 여름밤이면 아버지는 거의 매일 집(가게) 앞 의자에 앉아서 강이나 하늘의 별을 보며 하루를 마무리하셨다. 그런 아버지를 보면 작은 손으로 아버지 무릎을 짚고 안아달라거나 품을 파고들어 배를 만지면 애교석인 목소리를 냈었다.
“아빠, 백 원만~”
아버지는 내가 그리하는 행동이 귀여우셨는지 절대 한 번에 주시는 일이 없이 장난을 치셨다.
“얼마? 10원?
“아니 이이~백 원만 쥬세여, 배건마안~~~”
몇 번을 아버지 품에서 조르고 나면 웃으시면서 100원을 주시거나(당시 새우깡 한 봉지에 50원이었다) 뽀뽀를 해달라고 하시거나 옆에 앉게 하신 다음에 옛날이야기를 해주셨다. 그중에 기억나는 것이 오늘처럼 보름달이 예쁘게 떠오르는 날의 이야기이다.
한국에서는 보름달에 하얀 토끼가 산다는 이야기가 있다. 달이 동그랗게 되면 토끼가 계수나무 아래에서 절구 방아로 맛있는 떡을 찧는다는. 초등학교 교과서나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는 이렇지만, 아빠에게 들은 이야기는 정말 신기해서 이후에도 보름달을 보면 몇 번이나 다시 이야기해달라던 기억이 난다.
“중국에는 달 속에 토끼가 두 마리 있는데, 물레를 돌려서 실을 뽑지, 그걸로 예쁜 옷을 만들어”
“왜 떡 안 만들고?”
“옷을 만들어 입는데, 저기 저 옆에 토끼하고 물레 짓고 있잖아~”
“어디 어디, 저 거어~~ 까만 거어?”
주인공은 같은 토끼지만 물레로 실을 뽑아 옷을 만든다시며 달그림자를 보고 토끼 모양과 물레 모양을 자세히 설명해 주셨었다.(나중에 중국인 친구가 생겨 물어보니 자신도 어릴 때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고 했었다.) 보름달과 토끼. 그리고 어느 날 아빠의 꿈에 눈이 빠알간 흰 토끼가 식당을 이리저리 돌아다니길래 귀를 꽉 잡아서 안았더니 예쁜 네가 나왔더라는 태몽이야기.
그 이야기를 해주시는 게 너무 좋아서 아빠의 무릎을 잡고 또 잡고 했던 기억이 난다.
부모님은 나의 딸인 손녀를 보진 못하셨지만, 나는 오늘 같은 보름달을 보면서 가끔 딸아이에게 이야기한다.


“중국에 엄마의 아빠가 살던 마을에는 보름달에 토끼가 사는데, 물레로 실을 뽑아서 예쁜 옷을 만들어 입는대”


출처 amazo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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