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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Oct 13. 2018

구루, 아쉬탕가를 지우다

잘못을 저지른 이, 그 잘못을 감춘 이가 누군가의 스승이 될 수 있을까.

요가는 참 사기 치기 좋은 분야이다.


그럼에도 길에서 만나는 '도를 아십니까?'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요가가 추구하는 삶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요가원이 보기에만 좋은 상업적인 사진으로 도배가 되어 있고 일반인들은 쉽게 따라 하지도 못하는 아사나로 나 잘났다는 이들과 그들을 쫓아가고 싶어 가랑이가 찢어지는 나 같은 일반인들이 넘쳐나도 '요가' 그 자체가 참 매력적이다. 


가장 혹했던 것 중 하나는 뭔가 있어 보이는 구루의 한마디였다. 사실 나도 몇 번 우려먹기도 했다. 그만큼 마음에 와 닿았다. 평범한 이야기가 큰 힘을 갖는 것도, 요가 좀 할 줄 안다면 누구나 만들 수 있는 시퀀스가 전 세계적으로 최고로 인정받는 건 중심에 '구루'가 있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영향력은 그렇게 크다. 지금에야 그 영향력이 각종 SNS로 흩어져서 재야의 고수들이 조금이나마 뜰 수 있는 기회가 있다지만 예전엔 어땠겠는가. 막강한 한 인물의 영향력 앞에 이제 막 그 미지의 영역을 들어서는 제자는 얼마나 약하고 여렸을까.


https://medium.com/s/powertrip/yoga-guru-pattabhi-jois-sexually-assaulted-me-for-years-48b3d04c9456


여러 가지 소식들을 전해주는 웹사이트에서 그 막강한 한 인물의 너무나도 다른 모습을 보았다. 두 번, 세 번을 더 읽어보고 나서 함께 요가를 했던 친구들에게 넌지시 톡을 날렸다. 혹시 이 이야기를 아느냐고. 누군가는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해외의 유명한 요가 스타가 공공연히 이야기했다고. 그리고 누군가는 비슷한 문제로 시끄러웠던 한국의 어느 요가원 이야기를 했다. 


요가라는 매력 앞에 인간의 치졸한 면을 감춘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대부분 똥인지 된장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사기를 친다. 그리고 그건 남녀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상식의 문제이다. 


매번 요가에 대한 글을 쓰며, 긴 세월 요가원의 호갱이었음을 말했다. 여기저기 등록하며 내 돈 내고 요가하는데 지쳐 혼자서 스스로 요가하기 위해 전문가 과정을 들었다. 그 과정은 아쉬탕가로 유명한 곳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나의 스승(물론 그분은 나를 제자라 말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내겐 선생님이었으니까.)은 구루에 대한 가르침을 참 자주 이야기했다. 인간의 내면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다지만 나의 스승이 과연 공공연히 알려진 저 이야기를 몰랐을까. 안다고 해서 뭐가 달라질까.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 80년대의 제자들이 전 세계 요가를 장악하고 있고, 그들은 스승의 이름을 빌어 요가를 가르치고 있다. 요가가 무슨 잘못이겠어, 사람이 잘못이지 라고 지나가면 되는 일일까.


그냥 단순하게 생각하면 그저 나의 수련을 이어가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가 지나도 복잡하게 맘이 엉킨다.


아쉬탕가를, 구루가 창시한 이 수련을 꼭 해야 하는 걸까?


요가의 정의를 꼭 거기서 찾아야 할까.


나는 요가를 사랑한다. 무엇보다도 나의 요가를 가장 사랑한다. 그러니까 매번 외우려고 애쓰던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지우련다. 누군가는 또 그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그 사람뿐이겠냐고. 한동안 우리나라를 휩쓸었던 핫요가, 비크람 요가의 지도자도 비슷한 일로 매장되었다. 어느 책에 나오는 이름조차 기억하기 힘든 누구누구의 스승이나 누구누구 역시 그렇지 않았겠냐고. 다 지우고 나면 요가를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그럴지도 모른다. 그럼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하겠다.


내가 요가를 하는 건 가끔 또렷하게 내 몸의 구석구석을 느끼고 싶어서이다. 시끄럽게 울리는 티브이 소리에 갇혀 살다가 아주 잠깐이라도 투명한 생각을 하고 싶어서이다. 그러니 내 마음이 싫다는 것에 내 몸을 수련할 필요는 없다. 


앞으로도 요가는 꾸준히 발전할 것이다. 새로운 요가스타가 나올 것이고 유행하는 요가의 종류도 계속 바뀔 것이다. 옥주현에서 이효리로 요가의 대명사가 바뀌듯 또 다른 연예인이 등장할 것이다. 물론 나는 주변의 분위기에 여전히 흔들리고 혹하는 호갱이다. 그러나 적어도 누군가에게 트라우마가 되었던 이의 이름을 다시 부르진 않을 것이다. 

그 분의 고귀한 삶의 이야기를  전해지는 대로 믿은 내가 바보일지도, 화가 마악 나다가 피식 웃어버렸다. 이것도 마음 수련의 일부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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