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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Aug 13. 2018

요가는 아픔을 인내하라 말하지 않는다.

아픔을 이해하는 것, 아사나를 보지 않고 느껴야 하는 이유에 대하여.

Cover image * Photo by  Joanna Nix on Unsplash


뻣뻣하기 이를 데 없는 몸에 한껏 힘을 줘 늘리는 순간 찢어지는 아픔이 시작되지만 외친다. 

"아. 뭔가 늘어나는 것 같아."

자세를 풀었지만 어딘가에서 아리고 둔한 통증이 지속되지만 마음만은 충만하다.

"이게 성장통이지.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우리는 나의 몸을 들여다보는 시간보다 다른 이의 몸을 바라보는 시간이 많다. 더 잘하는 요기니와 비교해가며 어디서 정렬을 잘못 잡았는지, 근력이 부족한 건지, 유연함이 부족한 건지 공부한다. 세상엔 이미 요가 선생님이 넘쳐난다. 친절하게 동영상으로 자세 하나하나를 가르쳐 주고, 각종 책과 잡지에는 시즌 별로 요가 동작에 대한 섹션이 꼭 실려 있다. 사진 속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강하고 부드럽게 그리고 행복한 모습이다. 길고 긴 요가의 여정의 지루함은 찾아볼 수 없다. 누구나 겪었을 한계에 대한 고민도 없다.


그래서일까. 초급자, 중급자, 숙련자로 나뉘는 요가 강습에는 통증에 대한 경고가 없다. 누가 나눈 건지 어떻게 구분하는지 알 수 없다. 그저 스스로 판단하는 수밖에, 대충 선생님이 보여주는 아사나를 다 이해하고 있고 거꾸로 서야 하는 부상의 위험이 있는 동작을 어느 정도 따라오면 중급자에서 숙련자로 넘어가는 것 같다. 초보자의 범위도 요가원의 분위기에 따라 다르다. 어느 요가원도 초보자라서 수련에 배제하는 용감한 일을 하지 않는다. 제일 뒷자리에서 관람하는 느낌이 들지라도, 어설프게 따라 하다 어딘가가 불편해지더라도 그건 모두 (요가를 하겠다는 마음만 있을 뿐 아무 지식 없이 그저 열심히만 하려고 한) 본인의 책임이 된다. 


키가 크고 골격이 워낙 좋은 데다 다양한 운동을 꾸준히 했던 나는 근육량의 비율이 여자치고는 매우 높은 편이다. 4년 전쯤 했던 크로스 핏 3개월 동안 온몸의 근육이 성난 후로는 조금의 운동에도 느낌이 달랐다. 자전거로 매일 40km 출퇴근했던 것도 내 몸의 변화시켰다. 그리고 근육이 탄탄해지고 조금씩 단단해진 몸에 놀라워할 때마다 요가가 조금씩 더 쉬워졌다. 


당시엔 얕은 지식으로 몸이 단단해질 때마다 요가를 하면 말랑해질 수 있을 것 같다 생각했다. 왜 다양한 운동을 하며 몸이 단단해지는데 요가가 더 쉬워지는지 나는 잘 몰랐다. 그냥 조금씩 느는 게 좋았다.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넘어가는 길목은 내 몸에게 가장 극단적인 시간이었다. 강하게 운동을 하다가도 회사에서 4시간씩 꼬박 책상 앞을 떠나지 못했다. 그나마도 요가하는 시간이 몸에게는 가장 중간의 시간이 아니었을까. 그 적당한 시간이 점점 아픔을 수반하게 되기 시작한 건 순전히 나의 욕심이었다. 


나도 저 친구들처럼, 저 선생님처럼 하고 싶다. 


그 불을 활활 타오르게 한 건 이제는 거대 체인점이 돼버린 어느 요가원에서 바로 내 옆에서 함께 수련하던 사람이 육 개월 만에 선생님으로 등장했을 때였다. 분명 퇴근을 하고 저녁마다 만났던 이였는데, 매일같이 요가원에서 만났던 이는 지도자 과정을 듣더니 어느새 선생님이 되어 내 앞에서 시범을 보이고 있었다. 


그 당시엔 유연함, 강함, 진지함, 부드러움, 요가의 모든 강약을 몰랐음에도 그 이의 구령과 터치가 매우 어색하게 느껴졌다. '나는 요가원의 호갱인 건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된 건 그 이의 역할이 크다. 회사 이사 덕분에 일 년 치의 수강권을 몇 달 멈췄다가 다시 가장 가까운 지점으로 수련을 하러 갔을 때 다시 그 이를 만났다. 그분의 수련은 그 전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어쩌면 그 이는 그 수업에서만큼은 완벽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완전 반대의 요가를 찾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사나가 보여주는 화려함과 고난도의 수련에 반해 버렸다. 똑같은 수련을 계속하는 수업은 지루했고 그 후로 내가 못하는 아사나, 나보다 더 유연하고 더 강하며 더 부드러운 선생님만을 찾았다. 그게 여의치 않으면 마음속으로 한숨을 쉬며 요가를 하곤 했다. 시간을 아까워하며.



그러나 조금씩 새로운 아사나를 해내는 것은 내 몸에게 통증과 아픔을 선사했다.


"아플 거예요. 그래도 참아야 해요. 편안하게 숨을 내쉬려고 해봐요. 조금씩 몸이 변화하고 있는 겁니다. 견디세요. 그리고 꾸준히 하다 보면 어느새 변화를 발견하실 거예요."


이 얼마나 좋은 말인가. 인내와 성장, 뭔가 쓰디쓴 경험 후에 더 큰 사람이 된다는 불변의 진리가 요가에도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꾸준히 인내했다. 그리고 성장한다고 생각했다. 

만일 내가 그때, 몸의 오른쪽으로 느껴졌던 각종 아픔들을 무시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몇 번의 심한 찢어지는 통증을 이겨내지 않고 겁냈더라면 어땠을까.


yin yoga 의 완벽한 가이드의 저자인 Bernie Clark의 첫 번째 장을 읽으며 그동안 통증을 인내한 나의 미련함과 무지를 반성 했다. 물론 그 인내의 시간과 흘린 땀, 계속된 아픔 그리고 치유의 과정에서 좀 더 요기니로 성장할 수 있었던 건 안다. 그러나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미련하게 참지만은 않았을 텐데, 새삼 내 몸에게 미안하고 감사했다.


우리의 몸은 허용범위가 모두 다르다.

 어린 꼬마인 조카는 넘어져도 덜 다치고 나이 지긋한 우리 할머니는 아주 살짝 부딪혀도 크게 다친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지금까지도 각자의 몸은 변하고 있고 그건 딱딱해지고 줄어드는 과정이다. 누구나 말랑한 몸으로 태어났지만 어떻게 살아왔느냐에 따라 몸은 달라진다. 매일 의자에 앉는 서양인들보다 좌식생활을 하는 동양인들은 특정 아사나를 쉽게 해내는 것 또한 같은 맥락이다. 그런데 같은 나이의 비슷한 몸이라고 사진 속 요기니와 같은 기준을 내게 적용하고 노력한다는 것, 그 열정은 높지만 과연 그게 맞는 방향일까. 


유연함과 힘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유연함이 없어서 힘이 부족해서 라는 진단을 받아 들면 속상해한다. 그러나 오직 두 가지 만의 요소가 다는 아니다. 태어날 때부터 다른 관절의 구조 거기에 생활습관이 가져온 활동 범위에 따라 고착된 몸 구석구석이 이유가 된다. 그런데 배경지식 없이 그저 두 가지로 설명하는 것에 의문을 갖지 않는다. 사실 묻는다 해도 정답이 없는 것이기도 하다. 결국 모두가 트레이너만큼의 몸에 대한 지식이 있어야 하는 걸까? 그건 아니다. 분명 책에서 말해주는 많은 것들은 엄청난 검증을 거친 과학적 지식이다. 그러나 내 몸의 반응, 호흡에 따라 변화하는  흐름 같은 건 오로지 나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늘어날 수 있는 한계치에 다다르면 몸은 자동적으로 저항한다.

한계치에 다다르면 아프다. 그 아픔이 가끔은 시원하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다. 약간의 카타르시스가 있다. 너무 아파 비명을 지르면서도 조금 더 조금 더를 외치는 것도 그런 것 같다. 의지에 따라 몸의 한계치를 꺾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한계치를 변화시키는 확장이 되어야 한다. 아무도 내 한계치를 지정해주지 않는다. 오로지 나만 느낄 뿐이고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가를 하다 보면 구령 속에 의식의 흐름이 흘러가고 땀 속에 정신이 사라진다. 어느 정도 준비운동을 했는지 그 날의 습도와 온도가 어떤지에 따라서도 한계치는 달라진다. 컨디션이 좋았던 어느 날을 기억하며 무리한 아사나를 하다 보면 한계치를 꺾어버리는 실수를 하게 된다. 


가장 골 때리는 아픔, 어떻게도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압착에서 온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머릿속으로 그림이 그려지지 않았다. 아사나는 항상 뻗어나가거나 늘리는 것이 기본일 줄 알았다. 그런데 다리를 찢는 동안 내 무릎에서는 뼈와 뼈가 부딪히고 있었고 가슴을 드는 순간 손목의 관절은 내 무게만큼 서로를 누르고 있었다. 근육통과 다르다. 어느 특정 부위에서 찌릿하고 강한 자극이 오면 그 순간만큼은 화들짝 놀란다. 약간의 정렬의 변화만으로도 아픔이 사라지기도 하고 배가 되기도 한다. 


어느 영화에서 요가를 하는 조연이 나와서 우스갯소리로 " 어제 내 친구도 요가하다가 목뼈가 부러져서 죽었지 모야."라는 대사를 쳤다. 그게 어떤 영화였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데 대사만큼은 선명하다. 요가는 부상의 위험이 크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숙련자일수록 더 크다. 


 왜 아무도 위험을 피하는 법을 얘기하지 않는 걸까? 

나 역시도 아팠다고 그 아사나를 하며 몇 번의 부상과 어느 부위의 통증에 시달렸는지 공유하지 않는 걸까? 

요가는 나의 수련이다. 각자의 시간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몸과 건강한 삶, 행복한 미소로 대변되는 비즈니스이다. 그 누구도 좋은 말 대신 천천히 지루하기 짝이 없는 수련과 듣기만 해도 공포스러운 고통을 얘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무엇이 나의 요가를 멈추게 하는 것일까?

멈추게 하는 내 몸의 신호를 무시하고 그저 더 앞으로 나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요가는 멈추어 있는 시간마저도 요가이다. 앞으로 나가지 않아도 내 몸이 가진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러니 이제는 신호를 읽어내 보자. 


아픔을 쫓아 앞으로 나가지 말자.

아프지 않게 조금씩 내 한계선을 확장해보자. 조심스럽게 경계선을 느껴보자. 

이제 내 요가의 아픔을 정확히 알아야 하는 시간이다. 


어떻게 보이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느끼느냐가 중요하다.  Photo by Andrei Lazarev on Unspla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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