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가를 파는 요가원
요가의 통증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근육, 근막, 관절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사람마다 다른 구조와 강도를 가지고 있기에 딱히 해답이 없다. 결국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몸을 공부하고 연구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 역할을 요가원에서 해줄 수 없다. 요가원은 요가를 파는 곳이니까.
그리고 나는 요가를 소비하는 요기니이니까.
요즘 들어 무릎이 아프다.
그렇다. 내 몸이 삐걱거린다. 요가 때문만은 아닐 게다. 그러나 일조를 했다는 것만은 사실이다. 오래도록 같은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무리가 되었거나 반복된 강한 자극 때문일 게다. 생각해보면 나의 무릎 통증은 역사가 꽤나 깊다. 그러니까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요가를 하며 무식하게 하다 보면 괜찮아질 거라는 이상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요가를 할 때마다 나는 항상 내가 뛰어넘지 못하는 아사나를 위한 아사나를 선택한다.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욕심, 이십 년이 걸려도 좋으니 가겠다는 열망, 그건 지금 당장 변하지 못해 안달인 것과 시간적 차이가 있을 뿐 본심은 같다.
요가가 삶이 될 순 없다.
삶 속에 요가가 있을 순 있어도.
그런데
왜 나는 요가를 할까.
지난봄, 요가원에 지도자 과정을 받을 때,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요가 수련에 매진했다. 아침 일찍 일어나 요가 수련을 하고 학원에 갔다. 그때를 기억하는 이들이 내게 묻는다.
"아직도 요가하시죠?"
아직도 요가를 한다. 다만 방법을 바꿨다. '소소한 나의 요가'는 '나만의 야매 요가'로 바뀌는 중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나를 반기는 것은 알레르기이다. 각 계절마다 다른 이유로 알레르기가 시작된다. 이를 잠재우기 위해 정좌를 하고 호흡을 한다. 잠이 깨기도 전에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시작한 호흡이 끝날 때 즈음 양 쪽 코 중에서 어느 한쪽은 맑은 콧물이 흐르기를 멈춘다. 그다음은 라울리이다. 화장실에 들르기 전 한껏 숨을 멈추고 내장들을 움직여본다. 아직 반다인지 근육인지 그냥 몸부림인지 알 수가 없다. 그저 최대한 노력할 뿐이다. 양 쪽으로 백번 정도 회전했을까. 항상 아침이면 쾌변을 부르는 라울리를 가끔 잊는다. 그렇지만 크게 괘념치 않는다. 나에게 요가는 강요가 아니니까.
그리고는 백수의 삶이 이어진다. 주로 컴퓨터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그림도 그리고 글도 쓰고, 책을 읽고 여러 돈 되지 않는 디자인을 만지작거리다 보면 밥때가 된다. 외식을 잘 하지 않게 된 백수 부부는 둘 중에 한 명이 밥을 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오전과 오후에 수련 시간이 애매해질 때가 있다. 결국 나는 티브이를 보다 책을 보다 인 요가를 동시에 하게 된다. 별로 어려워 보이지 않는 자세를 십오 분씩 한 시간 정도 하다 보면 시간이 가는 만큼 책장이 넘어가 있고 나는 요가보다는 책에 더 빠져 있게 된다. 그러면 어떠랴. 나의 몸과 마음, 머리 속까지도 충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뉴스를 보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영화 한 편을 보거나 미드 몇 편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새 긴 밤이 내려앉는다. 이윽고 이불속으로 들어갈 시간이다. 잠시 고민을 한다. 몇 번의 수리야 나마 스카라(태양 경배 자세)를 반복한다. 그리곤 전굴, 후굴을 맘 내키는 대로 이리저리 하다가 시르사아나사와 핀차를 반복하고 오늘도 안되는구나 체념하며 사바사나에 빠진다. 사바사나를 하다가 번쩍 일어나 다시 핀차를 연습하곤 한다. 미련이 남아 오늘은 그래도 몇 번 호흡을 더 해보고 싶은 욕심이 나를 일으키곤 한다.
매일이 그렇게 다른 수련과 다른 아사나이다. 그 누구도 내게 가르쳐주지 않은 방법이다. 때로는 온라인 강좌를 듣고 키노 요가를 틀거나 아쉬탕가 프라이머리 시리즈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지난해 봄처럼 열심히 요가에 매달리지 않는다.
요가는 분명 목적이 분명하다. 그 과정 속에 마음의 수련을 위한 몸의 수련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가를 소비한다. 지금 이 사회에 상품으로 팔리지 않는 것은 없다. 종교, 철학도 마찬가지일진데 종교 색을 빼고 철학을 가미한 현대요가라면 어떨 것 같은가. 모든 것은 팔리기 위한 예쁘게 포장한 상품이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개개인의 믿음과는 별개로 지금은 모든 것이 상품으로 보여야 관심을 얻고 유명세를 떨치며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라갈 수 있다. 우리 역시 모든 것이 상품화되는 것에 익숙하다. 오히려 상품화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비싸지 않은 수업에 대해 이거 가짜아냐?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다 보니 뭐든 경쟁과 마케팅이 필수적으로 따라붙는다. 유명한 강사가 나오고 아름다운 사진이 스승의 타이틀이 된다. 위대한 구루라고 일컬어지는 이는 사진이 없던 시대부터 요가를 알렸다. 칼라 사진이 나오고 기록이 가능해졌을 때 그의 나이는 중년을 넘어선 노인이었다. 노인의 몸은 쭈글거렸고 조금은 배가 나와있었다. 그는 아사나를 시연하는 것보다 강의를 했고 구령을 붙였다. 그리고 그저 하나씩, 하니씩 앞으로 나아가라 말했다. 그의 젋은 시절이 어땠는지 그의 삶 자체에 대한 성찰은 없다. 그저 전설이 전해져 내려올 뿐이다.
그의 이름이 붙은 상품들이 요가 안에서 자리를 잡고 그에게 전수받은 이들은 전 세계를 돌며 강의를 한다. 우리는 그 한 시간, 두 시간의 강의를 듣고 핸즈온을 받기 위해 몇 십만 원을 지불한다.
지난봄 지도자 과정을 수백만 원을 내고 듣지 않았다면 아직도 나는 여기저기 강의를 쫓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른다. 배움은 항상 모자란 법이고 내 몸은 아직도 삐걱거리고 하지 못하는 아사나가 몇 백개나 되기 때문이다.
요가 선생님들은 매일 그렇게 산다. 수련과 수련, 반복과 반복 그러다 보면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 어느 순간 앞으로 나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매일 사진을 찍고 몸을 기록하고 행복을 노래한다. 요가 선생님은 그 삶을 동경하는 이들이 선택한 직업이다. (열악한 비정규직이라는 사실을 빼고 나면 그럭저럭 말이다.)
요가 선생님은 업으로 요가를 대하지만 나는 삶의 일부로 요가를 대해야 한다. 내 몸을 능가하는 요가를 하고 싶은 욕심을 매일 버린다. 조금은 느긋하게 하고 싶은 대로 호흡을 유지한다. 아마도 확실한 신념을 강조하는 요가 선생님에게 나는 대단히 건방진 요기니로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스승이라면 내게 강요하기보다 보여줄 것이다. 자신의 요가가 얼마나 삶 속에서 아름답게 자리 잡고 있는지, 그로 인해 행복하고 풍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를 말이다. 화려한 아사나보다 더 진정성 있는 모습으로 감동을 주지 않을까.
직장인 시절, 내게 요가하는 시간은 데스크에 앉아 굳어져 가는 내 몸을 깨우는 시간이었고 의식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명상이었다. 그런 내가 요가 시간을 위해 점심을 거르고 퇴근 후 휴식이 아닌 요가원을 향하느라 늦게 잠들곤 했다. 이제 와서 되돌아보면 그건 요가를 소비하는 쇼핑이었다. 나는 충분히 나에게 잘해 주고 있다는 확인이 필요했다. 억지로 편안함을 강요해야 했다. 나를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다.
덕분에 백수가 되어서도 요가를 하고 있다. 물론 내 맘대로, 내 멋대로이다. 백수가 되어서 요가를 시작했다면 빠져들어 헤어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내게는 요가가 삶의 중심은 아니다.
수많은 요가원에서 마케팅을 한다. 봄이 오고 새해도 밝았고 이제 슬슬 움직일 때가 되지 않았냐는 신호이다. 여전히 요가를 홍보하는 글은 힐링, 여유, 위로가 더해진 건강한 몸과 마음이다.
만일 당신이 지친 심신을 달래기 위해 요가를 선택했고, 요가원을 가기 위해 그나마도 쥐어짜 낸 여유시간을 쓰고 있다면 말이다. 요가원의 상품을 쇼핑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어 보일지라도 '시간의 낭비'에 도전해 보길 바란다.
그 누구에도 방해받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보내자.
요가조차도 떠오르지 않는 고요한 나만의 공간을 찾자.
요가는 그다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