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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Jan 14. 2018

내 몸을 느끼는 요가.

거울을 보고 사진을 찍는 대신, 느껴라. Feel it!

에캄 인헬 핸드 업, 두엘 엑셀 , 트리니 인헬, ~

아쉬탕가를 시작하는 구령이다. 그전에 만트라를 외운다. 주문 같기도 한 긴 구절을 낮은음으로 각자의 목소리로 만들어 낸다. 만트라를 외우는 동안 그 안의 숨은 뜻을 기억해보기도 전에 시작된다. 나의 적정한 속도와 나를 위한 만트라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요가를 본다. 대부분은 앞서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이고, 마이솔의 경우는 커닝 페이퍼 같은 안내서이기도 하고, 함께 하는 아쉬탕가 시리즈에서는 주변의 모든 이다. 그리고 듣는다. 호흡을 내쉬며 누군가의 구령에 맞춰 듣는 대로 흐름을 이어간다. 그렇게 타인에게 머문 눈과 귀를 다시 붙잡아 나의 몸과 나의 호흡에 온전히 집중하려 해보지만 막상 어떻게 느끼는지 무엇을 느껴야 하는지 모른다. 


자세,  Postures, Asana를 만들어가는 이는 항상 정렬 Alignment를 기억한다. 만일 그 정렬을 기억하지 못하면 앞서 시범을 보이는 선생님의 정렬을 훔쳐본다. 최대한 머릿속에 상상한 대로 자세를 취해보지만 뭔가 어색하다. 이윽고 거울을 통해 스스로를 판단한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무의식적으로 거울에 비친 내 모습만을 신경썼을지도 모른다. 거울을 보기 위해 고개를 드는 순간 몸의 자세는 한순간에 변한다. 그러나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다. 얼마나 나의 자세가 본보기와 비슷해지는지가 중요하다. 


우리는 너무 많은 정보를 쉽게 얻는다. 요가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상이 그러하다. 덕분에 많은 돈을 내지 않아도 전문가들의 고견을 듣고 본다. 노력하면 금세 따라 할 수 있다. 발칙한 상상 같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수많은 요가 유튜브 강의를 보면서 나는 그들의 노력과 성과에 감동한다. 그들의 스승이 누구인지 얼마나 수련을 하고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지 잘 모르지만 각자의 노하우들이 한참을 끙끙대던 아사나를 쉽게 변화시킨다. 그러나 아쉽게도 모든 이의 가르침이 그렇지는 않다. 맞아떨어지는 일은 가끔이다. 수많은 아사나를 접하고 빈야사의 조합을 만나지만 진짜를 모르겠다. 한 시간 남짓 영상을 접하고 나면 다시 한번 질문하게 된다. 

그들의 요가가 과연 나의 요가일까.
 남의 것을 보는 시간에 그저 나의 수련을 했어야 하는 걸까. 


BERNIE CLARK 의 YOUR BODY YOUT YOGA의 첫 번째 챕터는 가장 궁금했던 질문이 떡하니 제목으로 붙어있다. 무엇이 나를 멈추게 하는가. 한동안의 노력과 꾸준한 요가 수련을 통해 어느 순간 갑자기 안되던 동작들을 하나둘씩 해나가는 재미가 한참 시들해져 있는 요즘이다.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더더욱 그렇다. 왜 나는 더 잘하려고 하는지, 다음의 동작, 더 어렵고 멋져 보이는 아사나를 위해 노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동기를 찾지 못하니 막상 앞으로 나아가는 것도 벽에 부딪혔다. 더 이상 근육을 키우는 것도 의미가 없는 것 같고 유연해지기 위한 매일의 노력은 성과가 금세 드러나지가 않는다.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다.

 모든 것을 천천히 진행해서 결국 내가 원하는 동작을 성공한다 한들
그 다음은?


책에서 설명되는 근육과 뼈와 관련된 해부학적인 지식과 분석들은 그동안 내가 접했던 내용들보다 자세했다. 공부하듯이 정독을 해본다. 한참을 읽어 내려가다가 딱 한 부분에서 마음이 움직인다. 


We don't use the body to get into a pose-        

자세를 위해 몸을 사용하지 않는다.

we use the pose to get into the body.                

몸을 이해하기 위해 자세를 사용한다.


내가 요가의 아사나를 완성하려는 노력을
아사나를 하는 동안의 내 몸의 반응을 느끼는 것에 쏟았다면 어땠을까? 


요가의 동작을 분석하고 각 반응을 느끼는 것은 모든 이가 다르다. 우리의 몸이 남들과 다르게 구성돼있음에도 우리는 항상 같은 아사나를 구령과 함께 같은 시간 동안 수련한다. 요가원을 가서 그 어떤 프로그램을 선택하더라도 강약과 아사나의 차이가 있을 뿐 방식은 같다. 의식을 하지 못하는 사이 동일한 시간과 장소를 공유하는 이들은 한순간에 같아진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를 기울이면 나의 몸을 관찰하고 자세를 하는 동안의 나의 몸과 마음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

다른 이와 같은 것을 반복하더라도 달라질 수 있다. 적어도 내 몸에 관해서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나이니까. 


처음에는 무엇을 어떻게 구분해야 하고 느껴야 하는지 모른다. 알려주는 이도 없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참으며 요가를 한다. 아파오면 멈추지 않고 오히려 그 고통이 둔해질 때까지 반복하기도 한다. 머릿속으로 생각한다. ' 곧 이 통증이 사라질 정도로 동작에 익숙해지면 몸이 좀 더 강해지고 부드러워질 거야' 실제로 통증은 점점 둔해진다. 그 과정은 아슬아슬한 줄타기와 같아서 누군가의 적절치 못한 핸즈온(압력)이나 너무 오랜 시간의 유지 때문에 더 과한 통증이 시작되기도 한다. 마치 팽팽한 줄이 한순간에 탁 끓어지듯이 말이다. 


나의 경우엔 어깨와 골반이 가장 힘들었다. 오른쪽 어깨에서 목으로 이어지는 근육들이 항상 거꾸로 서는 아사나를 하고 나면 팽팽해졌다. 다리를 최대한 열고 가슴과 상체를 바닥으로 내려 편안하게 골반을 열었다고 생각했지만 오른쪽 다리 뒤쪽으로 저릿한 느낌이 오래도록 없어지지 않았다. 큰 부상은 아녔기에 언제나 견뎠다. 그러나 조금 나아졌다 싶을 때쯤 다시 시작되었다. 통증은 친구처럼 항상 함께이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마음 한편에서 자랑스럽게 여겼다. 적어도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반증 같은 것이니까. 


우리는 통증을 이겨내기 위해 수련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수련을 통해 통증을 얻는다. 그리고 통증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예고편이 있기 마련인데 그 작은 감각을 놓친다. 아마도 그 감각을 찾기 위해 수련을 한다면 다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울을 통해 나와 선생님을 비교하고 내 몸을 그려내는 것에 집중한다. 무리해서라도 남들과 비슷한 동작을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어느 순간 툭 끓어지듯 통증이 시작된다. 나 역시도 분명 전조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언제였는지 기억조차 못하는 걸 보면 내가 나의 감각을 무시했다는 것은 확실하다. 좀 더 정렬에 맞는 아사나를 어제보다 잘 하고 싶었기에.


요가를 처음 시작하는 이들은 단순한 호기심, 날렵하고 유연한 몸에 대한 욕구, 평온을 찾고 싶은 간절함 등등 다양한 목적을 갖는다. 그러나 다양한 목적 앞에서도 일동 차렷처럼 같은 시퀀스와 같은 강약으로 수련을 할 수밖에 없다. 초보자들의 경우는 심각한 부상이나 미세한 통증 자체를 접하기 힘들다. 대부분이 뻣뻣하고 굳은 상태의 몸으로 시작한다. 그래서 부상을 입기도 전에 이미 짧아진 온몸의 근육과 인대, 그리고 좁은 관절 사이의 공간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모든 몸의 반응, 감각은 아직 뻣뻣해서 라는 하나의 이유로 치부된다. 심각한 부상이나 통증은 초보자를 지나 더 멋진 자세를 하고 싶은 욕심에 휩싸이는 숙련자에게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때  느껴야할 내 몸에 대한 세세하고 예민한 반응을 감지하지 못한다. 아사나는 훌륭해졌으나 감각은 둔해졌다. 정신은 강해졌으나 목표는 이미 내가 아닌 타인의 발자국이다.


초보자들이 몸의 반응을 느끼는 것은 단순하다. 아프고 뻣뻣하고 뻐근하다. 시원하다거나 막힌 것이 뚫려서 순환이 된다거나 몸이 부드러워진 것 같다는 것은 착각에 불과하다. 무조건 아프고 힘들다는 말에 대부분의 요가 선생님들은 이야기한다. 수련하시다 보면 나아지실 거예요. 그 느낌에 대한 피드백이 오직 수련이라는 것이 예전에는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 대답을 다시 해주고 싶다. 


어떻게 아프세요? 어느 부위가 특별히 통증이 오나요? 둔하게 느껴지나요? 찌릿찌릿 하나요? 동작을 하고자 하는 방향과 반대로 당겨지는 것 같나요? 아니면 움직이는 방향으로 뭔가 딱딱하게 막힌 느낌인가요? 


요가를 하는 자신이 더 멋지게 사진이 찍히고 싶고 더 완벽한 아사나를 해내고 싶다면 접근방식은 달라진다. 아사나마다 쓰이는 근육이 있고 그 자세를 만드는 방법이 있다. 어쩌면 체조와 가깝다. 근육의 힘을 키우고 유연성을 만드는 운동을 병행해서 한다면 그 효과는 엄청날 것이다. 


요가를 하는 내가 어제보다 건강하고 평온하길 원하고 남이 아닌 나의 요가를 하고 싶다면 가장 먼저 다른 이의 멋진 아사나를 훔쳐보는 것부터 멈춰야 한다. 요가 선생님이 나의 요가에 답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몸이 다르고 통증을 느끼게 되는 한계도 다르다. 선생님이 가르치는 정렬이 모두에게 맞지 않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가르쳐 줄만큼 깊이 있는 수업을 찾기란 쉽지 않다. 선생님들도 역시 그 한계를 매일 부딪히고 나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다. 결국 같은 길을 가지만 한참 앞장서서 걷고 있는 셈이다.


요가 선생님의 눈이 엑스레이라서 나의 몸을 다 투시하거나 나의 근육을 이해하고 관절의 움직임의 한계에 대해 판단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누군가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때 '나'의 반응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하고 조언을 구해야 한다. 저항하는 몸의 반응들이 없어지고 한계를 넘어섰다고 느끼는 순간을 찾기 위한 방법을 함께 찾아가야 한다. 선생님은 나보다 더 많은 과정을 겪었고 풍부한 해석을 가지고 있을 뿐 나를 온전히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마주하는 요가원은 20명에서 30명까지 꽉 채운 공간에서 정면의 거울을 통해 날씬하고 아름다운 곡선을 그려내는 선생님들과 한 시간 정도의 수련이 대부분이다. 초보자인, 그리고 요가를 이제서야 막 시작하는 이들은 그 안에서 타협을 해야 한다. 요가원에서 내가 모르는 자세를 배우고 호흡을 맞춰가고 반복적인 수련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정답을 찾는 것은 자신이다. 어떤 동작을 취할 때 내 몸의 어딘가에서 시작되는 신호를 들어야 한다. 그리고 공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감각은 매우 다양하고 통증은 모두 다르게 오기 때문이다. 그 수많은 경험들을 하나로 묶어 당신은 지금 이것 때문에 이렇게 불편한 거니까 자세를 바꿔보라는 이야기도 스스로 판단해서 시도해야 한다. 타인의 제안에 나의 몸을 맡기는 순간부터 우리는 몸이 주는 신호를 무시하게 되고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춰가게 된다. 


가장 단순한 것부터 시작해 본다. 내가 아는 모든 요가 동작을 머릿속에서 떠올린 후 가장 고요한 시간, 다른 이의 간섭에서 멀리 떨어져 자신의 호흡으로 몇 개의 아사나를 연속으로 수련한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새로운 감각이 느껴지는지 오른쪽과 왼쪽, 전체적인지 국소적인지, 따끔거리는 것인지 저릿한지 아니면 단순히 사용을 전혀 하지 않은 덕에 짧아질 대로 짧아진 근육 때문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조금씩 그 한계를 움직이는 수련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 물론 수많은 아사나를 혼자서 찾아내고 반복할 필요는 없다. 우리에겐 요가원이 있으니까. 다양한 길을 보여주는 요가원을 선택해서 기꺼이 배우고 즐겁게 아사나와 가까워지면 된다. 그리고 고요한 순간의 혼자만의 수련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어느 순간부터 아주 다양한 감각이 되살아 날 것이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아사나를 찾아가는 여행 대신 내 몸의 얼마나 사랑스럽고 소중한지를 깨달을 것이다.  

아무리 뛰어난 테라피스트가 와도 나 자신보다 잘 다를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국 해답은 스스로 찾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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