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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nA Nov 17. 2017

배움과 성장은 나로부터 시작이다.

요가는 성적을 내는 스포츠가 아니다.

우리는 언제나 앞으로 나아간다. 아이에서 어른으로 커가듯이 신입에서 임원으로 올라가듯이 시간이 지나면 앞으로 한 발자국 나아가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시간과 노력에 대한 대가가 눈앞에 펼쳐지길 기대한다. 우리의 뿌리 깊은 성장에 대한 강박관념은 요가에도 적용이 된다. 눈 앞에 나의 몸의 변화가 보이길 기대하고, 노력한다. 되고 싶은 모습을 미리 정해놓고 그 틀 안에 나를 맞춰간다.

요가, 얼마나 오래 하셨나요?

처음 지도자 수업을 선택했을 때 얼마나 오랜 시간 수련을 했는지 모두들 자신의 경력을 드러냈다. 시간이 오래될수록 더 잘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짧은 시간의 경력에도 엄청난 유연성을 자랑하는 이가 있었고,  나처럼 오랜 시간 동네 요가원을 기웃거리며 경력은 오래지만 고작 몇 가지 동작 외에는 달리 진도를 못 나가는 이도 있었다.  

모두가 부러워했다. 타고난 몸과 어린 나이, 거기에 순수한 열정까지 더해진 반짝이는 아이를. 어려운 아사나를 거뜬히 해내는 이가 나타나면 순식간에 열등감과 자괴감, 그리고 부러움과 시기가 요가원을 휩쓸곤 했다. 언제쯤 경지에 이를 수 있는지를 묻자 계산기를 두들기 듯 정확히 나올 수 없는 수련의 기간에 대해 스승님은 일반적으로 라는 전제조건을 붙여 말하였다. 꾸준한 수련은 너를 바꿔 놓을 거라고, 보통 6개월이면 저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그러나 잘못된 질문에 대한 답은 맞은 답이더라도 절대 정답이 될 수 없다. 요가의 성장이라는 질문을 아사나를 주제로 하는 순간, 잘못된 질문이 되버렸다.


요가의 성장에 대한 평가는 우리의 고정관념에서 나온다. 더 건강한 몸은 아름다운 몸이라고 믿는 것처럼. 그러나 요가는 점수가 있는 스포츠가 아니다. 라이벌들과 선의의 경쟁으로 누가 더 정확하게 높은 난이도의 퍼포먼스를 펼치를 가늠하는 종목이 아니다. 그럼에도 아름다운 배경이 되어주는 낙원 같은 휴양지에서 마른 몸으로 난도가 높은 아사나를 하는 요기니들의 사진은 목표가 되어준다. 우리는 멋진 아사나에 목마르다. 한 번의 성공은 계속된 도전을 부른다. 공을 들이며 하나씩 해내갈수록 더 어려운 아사나는 더 큰 성취감과 기쁨을 안긴다.  매일 반복되는 새로운 아사나에 한 발자국 다가서는 노력도 그 갈증에 의한 것이리라.


요가의 교과서라 꼽았던 3권의 책의 앞 머리글은 특징이 다 달랐다. 가장 최근에 쓰인 책은 지난 요가 산업의 발전이 어떻게 가르침을 한쪽 방향으로 몰아갔는지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주를 이루었다면 오랫동안 많은 사람들이 읽어온 책은 아주 원론적인 요가 철학에 더 많은 페이지를 할애한다.


그러나 그 책들에서 한 가지 일맥상통하는 요가의 목표가 있다. 명상의 절정에 닿기 위한 삶의 여정이 요가이고, 그 길은 누구나에게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아사나는 몸의 수련을 통해 마음을 다스리는 법을 알아가는 한 과정이다. 모든 아사나가 모두에게 좋다고 말할 수 없다. 요가가 나에게 무엇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요가를 하는 것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아직까지 정답처럼 정해진 요가가 없는 것도, 모두가 같은 요가를 할 수 없는 것도 우리가 모두 다른 몸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 언젠가 다다르게 되어 만나는 지점은 같다는 것이다. 요가를 한다는 것이 결국은 각기 다른 나의 삶을 들여다보고 나의 몸을 탐구하며 나의 시간을 들이는 것이다.


요가라는 주제를 잠시 벗어나 생각해보자. 삶을 내 뜻대로 실행에 옮기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다. 내 노력은 다른 이의 눈에 보이지도 않고 보여지지 않는 결과물은 외면된다. 내가 쌓은 인생이란 성은 나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지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다. 요가 역시 마찬가지다. 모두가 좋다고 얘기하는 것도 내 몸에서는 독이 될 수 있고, 내 마음에서 필요로 하는 위안이 모두에게 위안이 될 수는 없다. 그렇게 모두가 다 다르기에 요가 산업은 발전할 수 있는 한 가지 분야만을 공략하게 된다. 그게 바로 아사나이고, 자연스럽게 우리는 수많은 아름다운 아사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아사나는 누군가에 가르침을 받아 배울 수 있는 요가의 유일한 요소이다. 하지만 요가가 아사나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듯 배움은 아사나에만 국한되어서는 안 된다.


요가를 통해 선구자들이 얻고자 했던 것은 몸의 훈련을 통해 마음으로 닿고자 함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요가 연구자들이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은 아사나를 접근하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방법이다. 그러니 오래된 고서에서는 아사나가 아닌 호흡과 마음, 평소의 삶 속에서의 자신을 찾는 법을 배우고 최신의 요가책에서는 가장 안전하게 다치지 않는 아사나를 배우면 된다.  여기서 나는 궁금해졌다. 요가를 가르치는 이들은 얼마나 이에 대해 공부를 하고 있을까. 그리고 다시 되짚어 본다. 지금껏 내가 배웠던 공부, 수련은 어떠했던가.

이 아사나는 몸의 어느 부위를 사용하여 어떤 효과를 가져옵니다.


가장 흔하디 흔한 아사나에 대한 설명이다. 깊은 잠을 자기 위한 요가, 아침의 몸을 깨우는 요가, 사무실에서 할 수 있는 요가 우리의 일상 속에 매 순간은 요가로 만들 수 있다. 아사나는 몸을 매우 건강히 해준다는 통설을 우리에게 언제 어떻게 무슨 마음으로 요가를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준비자세를 가벼이 여기게 만든다.


얼마나 행복한지에 대한 질문을 받고 요가를 선택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몸과 마음의 평화를 얻어가기 위해 요가원을 방문한다. 그러나 막상 요가원을 방문하면 우리는 평화를 얻음과 동시에 눈에 보이는 배움에 빠지게 된다. 내가 기쁘고 행복하다면 그 누구도 나의 선택을 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의 길목에 서있었을 때 요가에 대한 접근은 언제나 항상 일방적이다. 그러다 보니 수련을 준비하는 것도 눈에 보이는 것에 치중하게 된다. 요가복의 선택 기준이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지보다 몸매를 잘 드러내는지를 고민한다. 수련을 하며 미세한 몸의 기운과 고요한 마음을 들여다보기보다 내 눈앞의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본다. 차분한 호흡으로 반복해온 익숙한 아사나보다 어제보다 유연하고 강한 몸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도전적인 아사나를 선택한다. 요가원의 잘못이 아니다. 그건 보이는 것에 기쁨을 찾는을 원하는 우리의 선택인 것이다.  


인생에서 돈과 명예만큼이나 몸과 마음의 평화가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인생을 통째로 바쳐 한 가지에 집중하고 몰두해서 어느 분야에서든 일인자의 반열에 올라서는 것보다는 삶의 균형과 질서를 찾고자 한다. 요가가 유행처럼 번지는 것도 눈에 보이는 아사나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줄 것만 같은 착시효과도 자신의 소소한 일상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적 분위기의 영향이다. 요가 산업은 그러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요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역시도 요가 산업의 일부분의 조각이 되고 싶었다. 평범한 직장인이 요가를 통해 마음의 평화를 얻은 멋진 사례가 되고 싶었다. 이 욕심이 더 어려운 아사나에 성공한 사진을 찍어서 자랑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어렵게 한 동작을 성공해서 익숙해지면 그다음이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아사나를 분석하고 도전하며 끓임없이 다른 이들의 아사나 사진을 찾게된다.  조금씩 천천히 수련하면서 이루고자 하는 목표가 그저 그 다음 아사나가 돼버린 건 순식간이었다.

지금 자신의 몸과 마음에 대해 집중할 수 있나요?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을 들여다볼 줄 아나요?
요가를 할 준비가 되셨나요?


이제는 틀려버렸지만 내가 듣고 싶은 요가원에서의 첫마디이다. 요가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물어봤다면 내려놓아할 욕심들과 눈 앞의 다른 이를 쫓아가는 여정을 좀 더 일찍 버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소소한 요가의 목표는 혼자서 조금씩 만들어가는 요가였다. 그러나 스승이라는 큰 거울과 오래된 요가의 역사를 모른채 도전하는 것이 어려워보였다. 스승에게서 배운 것이 깊어질수록 나 자신에게서 얻어야 하는 배움도 깊어져야 한다. 이제서야 하는 그 배움이 어느 한 부분에 치중되지 않았는지 고민해본다. 


아침과 저녁, 그리고 오후의 한 때 매트를 펴고 자리에 앉아 수련을 시작한다. 나를 보는 이 없이, 오로지 나를 보는 시간을 가져본다. 그리고 수련의 끝에 고요한 시간이 찾아온다. 만일 당신도 아사나의 끝없는 배움의 바다에서 헤매이고 있다면 잠시만 아사나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는 순간을 느껴보자. 어려운 아사나만이 그 시간을 가져오지 않는다.  그러니 오늘은 어려운 아사나 대신 가장 편하고 부드러운 아사나를 선택해보자. 그리고 스스로 성장하는 요기니가 되어보자. 


스스로에게 손내밀어 보는 것, 남이 아닌 나를 바라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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