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anA Oct 25. 2017

인요가란 이름을 붙였을 뿐.

처음부터 요가의 일부분이었다.

이름이 참 요가스럽다. 뭔가 참을 인자 같기도 하고 사람 인자 같기도 하고. 처음 들었을 때부터 나는 그 분위기와 내가 상상해버린 이미지만으로도 이 요가가 좋아졌다. 그러나 이 이름은 중국식 이름이란다. 뭔가 짬뽕이 된 것 같지만 어찌 보면 우리가 접하는 모든 요가는 인도의 요가와 동떨어져 있다. 태생은 인도이나 발전되어온 배경이 전세계이니 당연히 원조와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마치 짜장면이 중국의 그 맛과 다른 것처럼.


처음 인요가를 접한 것은 발리에서였다. 선생님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한 자세를 오랜 시간 동안 유지하는데 무리하지 말라고 정확한 자세를 취하는 것에 중점을 두라고 얘기했다. 힘이 들지 않게 자세를 편안하게 취해야 하는 것인데 문제는 그 아사나가  너무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한 시간 반 정도의 수업이 특별하게 다가왔다. 일단 오분 이상 같은 아사나를 유지하자 몸에 불필요한 힘이 빠져나갔다. 지쳐서 빠져나가는 것이지만 그래서인지 더 몸이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호흡이 차분해졌다. 빈야사나 아쉬탕가 스타일의 요가는 무리하기 시작하면 호흡이 커진다. 깊게 숨을 마시기 급급한 나머지 거친 우짜히 호흡으로 변하게 된다. 그렇게 좋은 인상을 받고 계속 인요가에 대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러나 몇 가지 자세들과 개략적인 소개를 제외하고는 많은 자료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인요가에 대해 자세히 접근하게 된 것은 지도자 과정에서였다. 하나의 과목으로 인요가가 정해져 있었고 20시간의 수업이 진행되었다. 차분한 목소리를 가진 선생님은 뭐든 조곤조곤하게 나지막이 속삭이듯 설명했다. 그러나 목소리는 작지 않았고 발음은 정확했다. 마치 내가 받았던 인요가의 첫인상만큼이나 선생님은 인요가와 닮아있었다.


수업이 끝나고 선생님이 추천해주신 책 두 권을 바로 구매했다. 그중 최근에 나온 책이 내가 교과서로 삼겠다 선택한 한 권이고 다른 한 권은 더 오래되었지만 가장 기본적인 동작들과 인요가의 역사를 비롯한 관련된 이야기들이 쉽게 설명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요가를 생각할 때 가장 많이 떠오르는 아사나는 아마도 눈을 감고 앉아서 다리를 겹치고 앉아 명상을 하는 연꽃 자세일 것이다. 요가의 기원이 어디서부터 인지, 무엇을 위함인지는 주장하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무도 부정하지 않을 명확한 한 가지는 명상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깨달음을 얻는 해탈의 경지가 궁극적인 도착지라는 것이다. 아쉬탕가 요가의 전사자세가 나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실제로 그 아사나들은 전투를 하는 것에서 착안되었고 전사들이 하는 요가이기 때문이란다. 역동적인 흐름과 적절한 힘이 필요한 아사나들이다. 그러나 인요가는 편안한 자세와 차분한 호흡, 그리고 최대한 몸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래서 인요가를 선호하는 에세이들을 읽다 보면 아쉬탕가나 빈야사를 통해 얻지 못한 명상을 위한 몸을 인요가를 통해 얻었다는 경험들이 들어있다.


그럼에도 인요가는 아쉬탕가나 빈야사에 비해 유명하지 않다. 왜일까. 사람들이 좋아하는 화려한 동작도 없고 후드득 떨어지는 땀방울도 없다. 한 시간이 지나 몸에 활발하게 돌아가는 혈액순환의 기운도, 뭔가 운동같은 것을 했다는 성취감도 없다. 인요가는 때론 묘하게 기분이 안 좋아지기도 하고 아프지 않았던 관절 사이가 쑤시기도 한다. 게다가 선생님은 화려한 동작을 시연하지도 않고 차분한 분위기에서 매우 쉬운 아사나를 취하는데 생각보다 잘 되지가 않는다. 그러니까 뭔가 눈에 딱 들어오는 특징이 없는 데다 매력적인 느낌도 많지 않다.


뭐든지 시각적인 부분에 집중돼 있는 현재의 요가의 트렌드와는 거리가 있는 것이 인요가이다. 그럼에도 나는 이 요가가 너무 좋다.


인요가를 처음으로 소개하고 널리 퍼트린 사람은  Paul Grilley 가 있고 Sarah Powers 가 있다. Bernie Clark’s 의 The complete guide of YIN YOGA 에 따르면  Pauld이 만들어낸 수련법과 이론들이 있지만 그로 인해 인요가 YIN YOGA가 태어나게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이름이 붙여진 것뿐이라고 한다. 어떤 아사나든지 누가 만들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부분 어떻게 순서를 만들어 수련하냐가 주요 포인트이고 그로 인해 각각의 이름을 갖는다. 아쉬탕가의 프라이머리 시리즈만 해도 일부를 빈야사 요가에서 그대로 사용하기도 한다. 다만 한 시간 반 정도의 꾸준한 아쉬탕가 요가 수련을 통해 더욱 효과적으로 몸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이들이 검증하였고 그로 인해 정답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Sarah Powers 나 Paul Grilley 역시 아쉬탕가, 빈야사로 대표되는 강한 몸, 유연한 몸을 만드는 수련을 해왔던 사람들이다. 그랬던 그들이 인요가라는 이름을 붙이고 새로운 수련법을 만들어 나누기 시작했다. 가장 큰 계기는 명상을 위한 몸, 오랜 시간 동안 마음을 비우는 자세를 위한 몸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 방법은 하타요가나 발레의 유연한 몸을 만들기 위해 소위 몸을 찢는 과정과도 유사점을 갖는다.


그러면서 그들은 과학적인 접근도 한다. 어째서 오랜 시간 근육을 사용하지 않고 말 그대로 몸을 놓아버리는 것이 도움이 되는지, 해부학자들과 운동 학자들을 만나서 그들만의 과학적인 논리를 구축하였다. 그러나 재밌게도  Daoist Yoga에서 기본적인 뿌리를 가져왔다.


간단하게 손가락을 움직여보는 것으로 설명을 해보자. 처음 지도자 과정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준 이 간단한 예시에 나는 감탄해버렸다. 아무리 손가락에 힘을 실어보아도 위로 올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힘을 푼 상태에서 다른 손가락을 사용해서 들어 올리면 손가락 자체의 움직여지는 반경이 달라진다. 그러니까 근육을 사용함으로 인해 마치 더 몸을 잘 사용하고 있는 것처럼 느끼지만 실제로는 관절 사이의 공간을 제한하는 것이기도하다.  근육을 사용하지 않아야 관절 사이의 공간 자체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공간의 차이가 사람마다매우 크고 그로 인해 개개인의 아사나의 한계가 결정되어진다. 물론 수련을 통해 극복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 안에도 나의 몸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선생님이 했던 말 중에 태어난 순간이 가장 부드러운 상태이나 점점 나이를 먹고 모든 관절과 뼈가 굳어져가며 죽는 순간 가장 딱딱해진다고 하는 말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근육을 어떻게 변화시켜 더 많은 아사나를 해보겠다는 도전과 수련이 아닌 다른 관점으로 몸을 바라보자. 아직 몸이 견고하지 않은 아이들은 그 어떤 어려운 아사나도 다 가능하다. 인도의 어린아이들이 요가를 접하게 돼서 몇 년 만의 수련에도 소위 고급 아사나를 하게 되는 이유도 그에 있다. 반면 몇십 년 동안 딱딱해질 대로 굳어버린 몸으로는 아무리 근육을 키우고 힘을 조절한다 한들 움직일 수 있는 몸의 반경 자체는 한계가 있게 된다.


그래서인지 한 가지 아사나를 인요가 스타일과 아쉬탕가 스타일로 해보면 전혀 다른 반응이 온다. 아쉬탕가 스타일이 근육통을 유발한다면 인요가 스타일은 관절의 뻐근함을 유발한다. 그래서 두 방법을 병행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인요가는 아주 느린 속도로 변화를 가져온다. 그냥 단순히 생각해보자. 근육을 만드는 시간과 관절사이의 공간을 바꾸는 시간, 무엇이 더 반응이 빠르겠는가. 아무래도 더 딱딱하게 느껴지는 인요가가 훨씬 지루하다. 그러나 그만큼 편안하기도 하다.


전통적인 요가는 오래된 자세를 유지하는 하타요가와 가장 가깝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지금의 역동적인 요가보다는 인요가와 더 비슷하다. 명상을 위해서 강한 힘을 가져다주는 단련된 근육도 필요하지만 골반과 척추의 열림 또한 중요하다. 그럼에도 그 이름, 인요가라는 구분이 생기기 전까지 우리는 한 가지 아사나를 힘을 사용하지 않고 오랜 시간 유지하는 수련법 자체를 요가원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요가를 하겠다고 한 시간을 들였는데 고작 열 가지 정도의 아사나 밖에는 하지 않는데다 힘을 주지 말라고 최대한 편안하게 뼈와 뼈 사이의 공간을 느껴보라고 한다면 당황할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요가에 대해 알고 있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것을 요가라고 강요받는 기분일 것이다.  모든 것에는 양면이 있다.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음과 양으로 구분되는 양면이 있다. 그 중 한 가지 만을 계속해서 수련하고 단련하는 것이 요가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돼버린 현실이 안타깝다.


요가에서의 중심은 언제나 나이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수련이 나를 행복하게 하고 아프지 않게 한다면 그것이 나의 정답이다. 인요가는 내게 새로운 세계를 열어주었다. 아주 서서히 변화가 오고 있기에 때론 그 시간에 다른 수련을 했다면 벌써 더 많은 아사나를 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더이상 내겐 천개도 넘는 아사나를 모두 다 섭렵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이름이 없었을 뿐, 오래전부터 인요가는 존재했다. 분명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모습이지만 어쩌면 당신이 찾는 요가의 모습이 그 안에 있을 수도 있다.  요가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들여다 보기를, 그리고 그 고요한 아사나 속에 느리지만 깊은 변화를 만날 수 있기를 소망해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문에 담긴 묵직한 울림.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