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리 코넛 플레이스
▲ 카페 코넛플레이스에 있는 카페 코스타커피의 인테리어
출국하는 날이다. 탑승 시간은 한밤중이어서 온전히 하루가 남은 셈이다. 뭘 할까? 우선 아침식사는 거리에 나가서 간단하게 오믈렛과 짜이 한 잔으로 해결하고 마치 호랑이가 먹잇감을 구하듯 마지막으로 빠하르간즈를 뒤졌다. 우선 망설였던 헤나를 해볼까.
빠하르간즈 거리에는 헤나를 그려주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 오다가다 많이 보긴 했지만 선뜻 내키지 않아 하지 않고 있었다. 몸에 그린 큰 그림이 사람들에게 공포감을 주는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불량스러워보이는 것 같기도 했기 때문. 딸도 망설이는 눈치였다. 딸에게 해보라고 했다. 몇 곳을 다녀보다가 싸게 예쁘게 그려준다는 한 청년의 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정작 헤나를 그리는 사람은 나이 든 아주머니였다. 딸은 여러 무늬들 중에서 하나를 정한 다음 팔뚝을 내민다. 딸의 팔뚝에 헤나를 그리는 것을 지켜보는데 청년은 나에게도 싸게 해주겠다며 자꾸 꼬드긴다.
나도 용기를 내서 해보기로 했다. 디자인 파일을 보았다. 두 권을 뒤져도 마음에 드는 문양이 보이지 않는다. 한참을 고민한 끝에 문양을 섞어서 아주 작게(?) 10cm 정도로 해줄 수 있느냐 물었다. 헤나를 그리는 여인은 자신이 있단다. 그녀는 밑그림도 없이 술술 그려나갔다. 종이도 아닌 피부에 쉽지 않을 텐데. 그리는 모습이 신기해서 사진도 찍었다.
헤나, 붓 사용해 그리는 줄 알았는데...
▲ 헤나 딸과 내 팔에 헤나를 하고 장난스럽게 이름도 새겨넣는다
그녀는 붓을 사용해 그리는 게 아니었다. 헤나 튜브 밑부분을 조금 자른 후, 튜브를 짜가며 그리는 것이었다. 피부에 선을 따라 찰흙을 얹어놓은 것처럼 입체적이었다. 무늬를 다 그리더니 서비스로 이름을 새겨준단다. 진짜 이름을 대기는 민망하고 이름 중의 한 글자를 바꿔서 부르기 쉬운 외국식 이름인 '지니'라고 알려줬다.
헤나는 30분 정도 지나면 마른다고 했다. 마를 때까지 옷을 걷어올린 채로 있어야 했다. 우린 마치 예방주사 맞았을 때처럼, 옷을 걷어올린 채 걸어다녔다. 현지인들은 우리의 팔뚝을 보더니 "지니 지니"라고 이름을 부르며 깔깔 거린다.
다음에는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인도에 가면 인도 영화 한 편 쯤은 봐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현지인들이 많이 간다는 빠하르간즈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봐야 인도의 맛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 텐데 극장을 쉽게 찾을 수 없었다.
▲ 코넛플레이스와 빠하르간즈 서구적인 복합상가인 코넛플레이스와 빠하르간즈의 식당에서 본 거리
"엄마 우리 코넛 플레이스 가서 볼까요?"
"그래 가보자. 근데 가이드북 없는데 어떻게 가지? 어제 H에게 줬잖아."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볼게요."
우리의 숙소는 저렴한 곳이라 와이파이가 제공되지 않지만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의 와이파이를 잡아 쓸 수 있었다. 딸은 구글지도로 이리저리 검색을 하더니 코넛 플레이스 지도를 찾아서 갈무리해놨다. 사진 파일로 저장하면 3G 없이도 지도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스마트폰의 세계는 위대했다. 가이드북이 없어도 걱정이 없다.
코넛 플레이스는 지하철을 타고 라지브촉에서 내리면 걸어서 금방이라고 한다. 지하철역은 가까이에 있었다. 능숙하게 표를 끊었다. 근데 거스름돈이 생각보다 적다. 50루피를 냈는데 30루피만 주는 것이다. 전날에는 세 정거장 거리에 1인당 8루피라고 했는데 오늘은 두 정거장 거리임에도 10루피라니... 인도의 지하철은 우리나라와 달리 거리 비례가 아닌건가? 이상하다 싶어서 창구에 계속 서 있었더니 그제서야 4루피를 더 내준다.
"우리를 뭘로 아는 거야? 우리 이제 인도인 다 됐다고! 지하철비 얼마인지 다 알거든!"
우린 당당하게 거스름돈을 챙겨서 전철을 탔다.
'카푸치노 한 잔 무료'에 낚였습니다
▲ 먹거리 왼쪽 위부터 우타뺨이라는 인도음식인데 한국의 빈대떡같고 차오미엔은 중극음식으로 볶음면이고 아래는 카푸치노와 초코시럽 얹은 크로와상
라지브촉에서 내렸다. 스마트폰 속 지도를 보며 걸었다. 지도대로 가니 정확하게 목적지에 닿을 수 있었다. 구글 지도는 가이드북보다 훨씬 정확했다. 코넛 플레이스는 생각보다 훨씬 크고 깔끔한 곳이었다. 우리의 강남역처럼 번화한 곳이라더니 여지껏 본 인도와는 사뭇 다르다. 도로는 공원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어 있고 건물들은 원형으로 줄지어 있었다. 블럭마다 알파벳이 붙여져 있어 건물을 찾기가 쉬웠다.
흙먼지 없이 깨끗하게 포장된 길 위에는 우리가 아는 다국적 기업들이 있는데 나이키·아디다스와 같은 브랜드 외에도 고가의 브랜드샵들도 있었다. 우리가 여행을 하며 보았던 인도는 비포장 흙길과 흙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허름한 건물들뿐이었는데. 반듯하고 세련된 건물들을 보니 시골에서 갓 상경한 사람처럼 어리벙벙했다.
사람들에게 물어서 극장을 찾았다. 상영중인 영화는 네 가지 정도였는데 그 중 액션물과 로맨스물이 괜찮아 보였다. 고민끝에 로맨스물을 골랐다. 대사를 알아듣지 못해도 대충 눈치로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영화였다. 영화 이름은 <Akaash Vani>.
영화 상영까지 남은 시간은 1시간가량. 코넛플레이스를 둘러봤다. 고급스러워보이는 기념품 가게도 있고 맥도날드 같은 프랜차이즈 패스트푸드점도 있었다. 쇼핑을 하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고 배가 고프지도 않아서 커피전문점에 갔다. 내부는 첫눈에 보기에도 깔끔했고 직원들도 친절했다. 실내 장식도 인도풍이 아니었다. 한 켠에선 젊은이가 노트북을 펴놓고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원시 속에서 현대로 튀어나온 느낌이었다.
딸은 거리에서 받은 '카푸치노 한 잔 무료'라는 전단지를 내밀며 주문했다. 그런데 온전한 무료가 아니었다. 카푸치노는 다른 메뉴를 하나 더 주문할 때 무료라는 것. 크로와상 하나를 같이 주문했는데 빵값보다 빵 위에 얹어주는 초코시럽 값이 더 비쌌다. 카푸치노에 넣는 시럽도 추가 요금이 붙었다. 결국 '카푸치노 한 잔 무료'는 낚시였다.
커피를 마시고 영화관에 갔다. 영화관 입구에서는 가방을 검사하고 금속탐지기를 통과하게 한다. 인도 여행에서 검색대를 빼고는 말을 할 수 없을 만큼 검색대는 도처에 있었다. 기차를 탈 때도, 전철을 탈 때도, 유적지에 입장할 때도 심지어 영화를 볼 때까지도...
이거 영화야? 뮤직비디오야?
상영관 들어가기 전에 카메라를 맡겨야 했다. 불법으로 촬영해 동영상을 올리는 것을 막기 위함이란다. DSLR과 컴팩트 카메라·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모두 맡기고 입장했다. 영화관 내부는 인도의 또다른 면을 보는 듯했다. 코넛 플레이스는 인도의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이용하는 곳인 듯했다. 로맨스 영화라 그런지 관객들은 모두 젊은 커플들이었다.
인도 영화는 상영시간이 길어서 중간에 쉬는 시간이 있다고 했다. '긴시간 동안 알아듣지도 못하는 영화를 잘 볼 수 있을까?'라는 걱정과 함께 영화가 시작됐다. 여주인공은 '여신급'이었고 남주인공 역시도 '조각 미남'이었다. 등장인물들은 모두 힌디어로 말한다. 가끔 나오는 짧은 영어 대사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 영화속의 인물이 다 인도사람인데 왜 가끔 영어로 대사를 할까 궁금하기도 했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인도는 워낙 넓고 인종도 언어도 다양한 지라 같은 힌디어라도 지역마다 의미 차이가 있다고 한다. 못 알아 듣거나 뜻을 좀더 분명하게 할 필요가 있을 땐 영어를 사용한다고 했다.
▲ 인도영화 우리가 본 로맨틱영화 Akaash Vani와 영화관
영화 <Akaash Vani>에서 Akaash는 남자주인공 이름이고 Vani는 여자 주인공 이름이었다. 대학생인 Akaash와 Vani는 캠퍼스 안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순간 사랑에 빠진다. 행복하게 연애를 하던 중에 Vani의 집안이 기울어지게 되고 Vani는 부잣집 남자에게 시집을 가게 된다. 그녀는 남편의 홀대를 받으며 불행한 결혼생활을 한다. 어느날 Vani의 대학 친구들이 놀러와 그들은 여행을 떠났는데 여행지에서 Vani는 Akaash와 재회한다. 결국 Vani는 남편과 이혼을 하고 용감하게 자기의 사랑을 찾아가는 내용인 듯했다.
중간에 20분 정도의 쉬는 시간이 있었으나 특별히 할 일도 없었다. 현지인들은 나갔다 오거나, 팝콘을 사먹거나 하는 정도였고 그 외에는 조용했다. 인도 영화를 봐야 하는 이유가 인도인들의 영화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해서라는데, 여기서는 싱거울 정도로 조용했다. 현지인들이 많은 영화관은 예쁜 여성이 나오면 휘파람 소리가 들리고, 옆사람과 시끄럽게 대화하는 왁자지껄한 분위기란다. 그런 문화를 느끼지 못해 아쉬웠다.
영화 속에는 인도 영화에 단골로 나오는 군중들의 신나는 춤과 노래도 거의 없었다. 물론 노래 몇 곡이 삽입돼 있긴 했지만, 어깨가 들썩거릴 만큼의 흥겨운 노래는 아니었다. 마치 잔잔한 한 편의 뮤직비디오 같았다. 중반에는 지루해서 졸립기까지. 그냥 잘생긴 남녀 주인공을 본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영화관을 나와 숙소로 향했다. 딸은 스마트폰에 저장해놓은 지도를 본다.
"엄마 여기서 빠하르간즈까지 한 구간인데 걸어갈까요?"
"그래 30분 정도면 걸어갈 수 있겠지?"
이번에는 길을 한 번에 찾았다. 헤매지 않아서 예상 시간내에 도착했다.
"딸, 다음에는 어디로 갈까?"
▲ 델리역과 공항철도 왼쪽은 뉴델리역이고 오른쪽은 공항철도의 내부
어느덧 저녁이 됐고, 출국 준비를 시작했다. 우선 공항철도가 운행되는지를 확인했다. 입국한 날에는 공항철도가 운행되지 않아서 버스로 왔기 때문이다. 버스는 사람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공항철도는 30분 정도면 될 터. 다행히도 공항철도가 운행되고 있었다. 운행 시간 간격과 운임까지 알아봤다. 짐도 부칠 수 있다는 문구까지 확인하고 나와서 숙소에 갔다. 맡겨놓은 배낭을 찾았다.
탑승 시간은 오전 1시 20분인데 오후 8시쯤 공항철도역으로 갔다. 넓긴 한데 휑한 게 아직 기틀이 안잡힌 듯했다. 수하물은 공항에 가서 부쳐야 한다고 했다. 그래도 붐비지 않고 쾌적한 전철을 타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사람은 많지 않았고 공항까지 역은 네 구간. 금방 도착했다.
이제 여행은 끝났다. 그동안의 일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새로운 사람들 만나는 재미도 있고 고생도 많았지만 왠지 고생했다는 기억보다 재미있었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타고난 여행 체질인걸까.
"딸, 이번 여행 어땠어?"
"솔직히 처음엔 걱정했는데... 엄마와 함께 20일씩이나 24시간 내내 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요. 엄마가 옆에 있으니 여행의 로망인 이성과의 만남 기회도 없을것 같고 엄마의 걱정어린 잔소리도 살짝 걱정 되고..."
"나도 사실은 걱정 됐어. 부모자식간이라 해도 취향이나 감성이 다른데 잘 맞출 수 있을까, 갈등을 빚진 않을까 걱정했지."
"이번 여행으로 엄마를 좀 더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엄마가 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걸, 특히 바라나시에서 아팠을 때 엄마가 있어서 진짜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네가 아픈 몸으로도 일어나 카주라호로 가자고 배낭 메고 나올 때 정말 고마웠어. 엄마는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줄 알고 식겁했다."
"그런데 딸, 다음엔 어디로 갈까?"
"엄마, 나 취업 준비 해야 되는데..."
이번 여행에서 나는 딸과 환상적인 조화를 이뤘다. 좌충우돌하긴 했지만 큰 갈등을 빚지 않고 서로를 위해주고 존중하며 무사히 마지막 일정까지 마쳤다. 딸에게도, 엄마인 내게도 서로에게 조금더 너그러워지는 계기가 됐다. 아르바이트를 하는 딸에게 조금씩 적금을 들라고 말할 생각이다. 다음 여행지를 어디로 할까, 세계지도를 펼쳐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