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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메모 MeMo Jun 17. 2020

두 번째. 그리고 쉼

전편과 딱히 연결되지 않는 후편

 결국 난 곰을 완성했다. 곰뿐만이 아니라 돼지와 닭도 같이 탄생시켰다. 소재의 컬러링에 대한 이견이 잠시 오갔었지만 예전에 비하면 그리 길지 않은 설전이었고 전시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중에도 거의 무탈에 가까울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 중이다. 작가로서 한 발 내디딘 기분이 들다가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결과물이 아니기 때문에 작가와 기술자 사이에 애매한 포지셔닝은 아직도 내 안에서 진동 중이다.  


 전시 철수를 일주일도 남기지 않은 지금에서야 이전 글의 다음을 써 내려가는 것은 순전히 내가 게으르기 때문이다. 많은 것들을 계획했지만 역시나 대부분의 것들은 아직도 미뤄지고 있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것들을 놓아버리지 않으려 계속해서 일정을 짜고 있음으로 약간의 위안을 찾는다. 생계를 이어나가고 일자리를 찾고 누군가를 도우며 몇 달을 지냈지만 역시나 누군가를 다치게 하고 실망하게 만들었다. 많은 다툼과 우울의 손을 잡고 같이 걸었다. 난 이제 그것들을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곳에서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다. 몇 년 만에 시작된 출퇴근은 생각보다 괴롭지는 않았지만 예상외로 체력이 부족해지기 시작했다. 조연으로 출연한 이동시 콜렉티브의 독립영화 '비관론자'의 크랭크업인 6월 초면 많은 것들이 정리될 것이라 예상했는데 끝나자마자 다른 일들이 계속된다. 예기치 않게 투잡러 생활이 시작되었고 주말 이틀은 틈틈이 쉬기에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이전에 카페를 운영할 때 한 번 번아웃을 경험한 지라 체력과 마음을 관리하는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따금 개인적인 일로 스트레스를 너무 받으면 하루 종일 잠만 잤다. 잠과 술, 연인과의 다툼과 먼저 떠나간 고양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범벅이 된 채로 집과 직장을 데굴데굴 굴러다닌 기분이다. 다행히 지금은 많이 벗어난 상태이고 글을 쓸 수도 있을 정도로 회복이 되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의 진행상태는 점점 좋지 않은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스르륵 거리면서 쌓아놨던 아이디어들과 계획들이 모래알처럼 야금야금 깎여서 흩뿌려지고 있는 느낌이다. 난 내가 하는 일을 얼마나 잘하냐에서 내 존재가치를 찾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나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하고 이번 일에서는 좀 대충 하기로 결심했는데 자꾸 내가 나를 떠민다. 더 잘하라고. 이번이 너 인생에 기회일지 아닐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라고. 매 순간에 혼신의 힘을 다하라고. 평생 이렇게 살다가 내일 모레 마흔이 되고 모아둔 돈 한 푼 없이 돈 못 버는 어설픈 작가로 누군가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그런 하찮은 존재가 될 거냐고.

 물론 될 생각 없다. 그렇지만 이번 일도 엄청나게 성공시킬 마음도 들지 않는다. 난 내가 마음을 꽂은 몇 작업과 몇 사람에게 내 애정을 집중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선 첫 대상을 나로 잡았다. 지금 다음 주까지 마감해야 하는 자수 작업과 전시 철수 그리고 일터에서 계획한 첫 행사를 마치고 나면 결과에 신경을 끄고 난 무조건 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전략적인 휴식을 취할 생각이고 그 뒤에는 내 창작활동과 나 자신의 완전한 합일을 이루기 위한 작업을 시작할 생각이다. 글쓰기가 좋은 수단이 될 것이라고 예상한다. 어쩌면 가장 놓지 말아야 할 것을 놓아서 지난 몇 달 간이 더 정리가 힘들지 않았었나 하는 생각이 들지만. 뭐, 지나갔으니 어찌하나.


 오늘도 역시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쌓여있다는 이야기를 미리 듣고 사무실로 향한다. 적당히 넘길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사랑하는 연인과 그 연인이 너무도 사랑하는 친구와 셋이 함께 판소리를 배우러 간다. 서로를 좋아하는 둘을 보는 것도 그렇지만 너무 오랜만에 노래를 부른다 생각하니 설렌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내 시간은 특별해진다. 그 특별함 안에 나의 쉼을 많이 넣어 놀 생각이다. 서로 너무 부담되지 않은 선을 지키면서. 조금은 다툴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한동안은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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