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이 출산하지 않는 이유를 출산하고서야 깨닫는다
올해로 16년차의 타향살이를 진행 중이다. 고등학생때부터 기숙사 생활을 시작했고, 대학생 그리고 직장인을 거쳐 지금 엄마가 되기까지 혼자 이사도 많이 다녔다. 자취방 생활을 시작하고부터 어엿한 독립된 개체로 지내다보니 편했다. 내가 원하는대로 집을 꾸리고, 누군가에게 양해 구할 일도 없고 퇴근 후 야근이 계속되거나 회식이 잦아도 구속받을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내가 원하는대로만 하면 되는 세상이었다.
사실 결혼을 하고도 남편도 나도 크게 서로의 생활에 터치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혼 전과 후의 일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족이 됐다는 느낌보단 연인으로 함께 살고 있단 생각이 더 강했다. 하지만 둘 다 이렇게 계속해서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고, 한 살이라도 더 젊을 때 아기를 빨리 갖고 낳고 키우자라는 마인드였다. 출산과 육아를 크게 어려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천운으로 아기 천사가 빨리 찾아와줬고 임신 과정도 큰 탈 없이 출산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육아도 순탄하리라 생각했던 것은 지나친 오산이었다. 나는 아직 조카도 없고, 주변에 아기를 낳은 친구도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회사에선 내가 첫 출산 휴가를 가는 사람이었다. 내 기억 속 마지막 아기는 7살 어린 내 동생에 대한 스쳐가는 기억들 뿐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본 아기와 엄마의 브이로그는 내게 정보를 제공해줬지만, 아름다운 편집으로 포장된 브이로그는 담장 너머 남의 집 구경하는 것일 뿐 내게 어떤 감흥도 가져다 주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뭣도 모른채 육아 현장에 내던져졌다.
그래도 모유수유 공부는 하고 갔던 터라, 젖이 빨리 돌게 하려면 아기에게 바로 직수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래서 바로 24시간 모자동실을 신청했고, 나와 남편은 뒷통수를 아주 크게 얻어맞았다. 칼로 찢어진 내 배는 나를 한발짝도 못 움직이게 만들었고, 나오지도 않는 젖을 물리고 아기가 울면 왜 우는지 몰라 허둥지둥 거렸다. 분명 젖을 물렸는데 왜 울지? 기저귀도 갈아주고, 둥가둥가도 해주고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모든 행위를 했지만 아기의 울음은 그치지 않았다.
겨우 하루, 24시간 모자동실에서 육아의 쓴 맛을 경험한 남편과 나는 그만하고 조리원에 조기 입소를 신청했다. 다행히도 자리가 남아있어 나와 아기는 조리원으로 남편은 집으로 돌아가 각자의 2주를 보내고 오게됐다. 모자동실을 맞보고 온 나에게 신생아실의 간호사들이 천사로 보였다. 그녀들은 아기의 울음 신호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고 넋이 빠진 산모의 멘탈을 잡아주는 등대였다. 수유콜 시간에만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 됐고, 나머지 시간은 내 몸을 회복하는 자유 시간이었다.
사실상 조리원 기간은 육아의 시간보단 산모의 회복에 좀 더 집중하는 시간이다. 간호사 선생님들께서 하루의 8할은 아기를 봐주고 계시니, 나는 정말 수유 시간에만 잠시 아기 '천사'를 만날 뿐이었다. 그렇게 꿈같던 2주의 시간이 흐르고 처음 함께하는 집에서의 생활은 혼간의 도가니 그 자체였다. 간호사 선생님 손에 있을 땐 알지 못했던 대소변 횟수, 수유 횟수, 낮잠 횟수 등 제로섬에서 시작하는 게임이었다. 남편의 짧은 출산휴가와 산후도우미의 시간이 끝나고 아기가 태어난지 꼬박 한 달 뒤에야 나는 혼자서 하루종일 아기를 보게 되었다.
조력자가 사라지고서야 진정한 육아가 시작되었다.
먹이고, 놀아주고, 기저귀 갈고, 재워주고를 반복하다보면 꼬박 하루가 간다. 아침 저녁으로 남편이 도와주지만 결국 이 육아는 온전히 내 몫인거다. 육아가 내 몫인건 괜찮지만, 육아 휴직이 끝나면 이 아기를 누가 봐주냐라는 문제에 당도했다. 현실이 느껴진다. 일하면서 가정을 잘 꾸려나가는 슈퍼맘은 상상 속의 허구로 느껴졌다. 남편이 육아휴직을 하거나, 도우미를 구하거나인데 또 웃긴 건 남의 손에 아기를 맡기지 못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일을 그만두자니 생활비가 빠듯하고, 어린이집에 보내자니 대기가 어마어마하고, 친정 엄마도 시댁도 도와줄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는 상황. 이래서 청년들이 출산을 하지 않는구나. 출산을 하지 않는 그 모든 조건을 내가 갖추고 있다니. 알면서도 아기를 낳았다니. 어쩌면 좋으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