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출발선, 다른 속도
첫 출근 날, 같은 교육장에 앉아 있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 신입 둘, 단정한 단발머리의 여자 셋. 모두 똑같은 PPT를 듣고, 똑같은 다짐을 했던 것 같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날의 웃음은, 아직 씌워지지 않은 가면처럼 순진했다.
하지만 그 후의 속도는 달랐다. 처음엔 잘 몰랐다. 그저 누가 조금 더 적극적이고, 누가 말수가 적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어느 날, 남자 선배가 지나가듯 말했다.
> “너는 왜 항상 조용하냐. 그렇게 해서 어떻게 살아남겠냐?”
그 말이 이상하게 걸렸다. 조용한 건 나만이 아니었는데, 왜 유독 ‘여자 후배’인 나에게만 그런 말이 돌아올까?
2년쯤 지났을 무렵이었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팀으로 배정받았고, 그중 한 명은 빠르게 외부 발표에 나가기 시작했다. 사내 세미나, 교육대행, 신입 멘토링까지 줄줄이 그 사람의 몫이었다.
내가 보기엔, 나도 충분히 할 수 있었다. 자료도 내가 먼저 만들었고, 수치 분석도 내가 다 돌렸고, 팀장이 고개를 끄덕인 보고서도 내 손에서 나왔다.
하지만 발표는, 늘 그 남자 동기의 몫이었다.
> “목소리가 크잖아.” “조직 내에선, 남자가 앞에 서는 게 좀 더 설득력이 있어.”
그게 회사가 선택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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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묻지 않게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나는 왜 안 되는지'를 묻는 건 위험한 일이었고, 묻지 않는 사람만이 오래 버틸 수 있는 환경이었다.
나는 조용히 자료를 만들었고, 그는 발표 후 박수를 받았다. 그 뒤에서 나는 회의록을 정리했고, 그는 상무에게 칭찬을 들었다.
> "역할이 다를 뿐이야." "각자 잘하는 걸 하면 되는 거야."
그런 말들이 반복될수록, 나는 점점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데 익숙해졌다.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내가 나서면 안 될 것 같은 분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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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식당 앞에서 우연히 마주친 팀장이 말했다. “넌 일머리가 참 좋아. 근데 왜 그렇게 앞에 안 서?”
잠시 말이 막혔다. 앞에 서고 싶지 않았던 게 아니라, 그럴 수 있는 구조가 아니었던 걸 그는 몰랐다. 정말 몰랐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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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 후 노을 진 주차장, 차 안에서 혼자 엉엉 울던 날이 있었다. 누구에게 말도 하지 못하고, 소리를 죽이며 핸들을 부여잡고 울었다.
그날은 팀 전체 PT 발표였는데, 자료 초안부터 스토리라인까지 모두 내가 만든 자료였다.
하지만 발표자 이름은 마지막에 바뀌었다. 그건 내가 아니라, 남자 동기의 이름이었다.
회의실 복도에서 바꿔치기되듯 전달된 자료, “오늘은 너보다 걔가 조직 이미지를 더 살릴 수 있을 것 같아.” 그 말 하나로, 나는 그냥 지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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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 안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사다리'가 있다는 걸 나는 그때 알게 됐다. 그 사다리는 누구에게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누구에게는 닿지도 않았다.
같은 출발선에 있었지만, 속도는 다르게 설정돼 있었다. 어떤 이들은 점프를 할 수 있었고, 어떤 이들은 ‘기다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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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 나는 경력이 10년이 넘었다.
그 사이, 수많은 PT 발표가 있었다. 한 번도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기획안도, 스토리도, 성과도. 누가 봐도 빠르고 정확했다.
하지만 ‘나서지 않았다.’ 아니, ‘나서면 안 되는 구조였다.’
그들이 웃으며 말하던 ‘포지션 조율’과 ‘조직 내 이미지’가 언제나 내 속도를 재단하는 기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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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은 말했다. "기회는 열려 있다." 하지만 그 문은 늘 어떤 방향으로만 열려 있었다.
나는 그 문 앞에서 오랜 시간을 기다렸고, 누군가는 그 문을 그냥 밀고 들어갔다.
그게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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