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입사 7년차, 나는 아직도 대리다
� “대리님은 왜 아직도 대리세요?”
� "말을 아껴야 한다는 조언, 그게 나를 얼마나 망쳤는지 몰랐다."
입사 7년 차, 나는 대리였다.
"이제 곧 과장 승진하겠네"라고 말해주던 상사의 말은 허공을 맴돌았고, 나는 여전히 '프로젝트를 잘하는 대리'로 불렸다.
"야, 너 이거는 잘했더라."
처음엔 그 말이 칭찬의 일종이라 여겼다. '잘했다'는 말을 듣는 게 흔치 않으니까.
하지만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알게 됐다.
그 말에는 '너무 튀지 마라, 이 정도까지만 해라'라는 선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나는 분명히 숫자를 만들었고, 기획서를 밤새워 준비했다. 발표 자리에서도 질문을 막힘없이 받았고, 임원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발표가 끝난 뒤, 내 뒤를 이어 다른 부서의 남자 동기가 올라와 프리젠테이션을 이어갔을 때, 분위기는 달라졌다. 발표는 형편없었지만 평가는 달랐다.
"역시 안정감 있네."
"아까 걔는 좀… 의욕이 과했지."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나도 모르게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러니까 이 조직은 의욕을 '여자의 결함'으로 읽는구나. 내가 같은 말을 했을 때와 그가 같은 말을 했을 때,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지 않는다는 걸 그날 분명히 알았다.
승진자 발표 날, 동기남자의 이름이 있었다.
회의 중에도 자료 한 장 제대로 안 읽고 오던, 발표 시간에는 늘 ‘그러니까... 뭐랄까...’ 하며 시선을 피하던 그 남자 직원.
"팀에 잘 녹아든다",
"분위기가 좋다",
"조직과의 케미가 있다."
그의 승진 사유를 들으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정이 북받쳤다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었다.
말이 안 나왔다.
나는 기획서 하나하나를 밤새워 다듬었고, 수치를 설득력 있게 만드는 데 매달렸다.
그런데 그 자리는 내 것이 아니었다.
능력이 아니라, 기분 좋게 웃어주는 사람이 앉는 자리였다.
커리어 플랜을 쓰는 시간이었다. 연말 평가 시즌, 팀장님이 말했다.
"다들 내년 커리어 목표 작성해요. 현실적인 걸로. 이상적인 건 말고."
나는 써내려갔다. '다양한 브랜드의 PM 경험을 축적하여 마케팅 쪽으로 전환 준비'라고.
그런데 팀장님의 피드백은 간단했다. 빨간 글씨로, 딱 한 줄.
‘현실적으로 회사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수정 바랍니다.’
정말 궁금했다.
'그렇다면 현실은 뭔가요?
내 커리어의 현실적 목표는 회사에 평생 대리로 남는 겁니까?'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커서를 눌러, 글을 지웠다. 그리고 이렇게 다시 썼다.
‘기존 역할에 충실하며 팀에 안정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구성원이 되겠습니다.’
커리어 상담이라 쓰고, 현실 순응 권유라 읽었다.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커리어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꿈은 접는 게 아니라, 조용히 서랍에 넣어두는 거라는 걸 배웠다.
"넌 너무 일을 잘하려고 해. 조직은 그런 사람을 불편해해."
이 말을 팀 선배가 조용히 내게 해줬을 때, 나는 도무지 그 말의 맥락을 이해하지 못했다.
일을 잘하는 게 불편한 일이라면, 그럼 나는 어디까지 감춰야 하는 걸까?
그 후로 나는 서서히 말을 줄이기 시작했다.
기획회의에서 말 대신 회의록을 정리했고, 아이디어 대신 자료조사를 택했다.
나서서 발표하던 자리에선 파트장 뒤에서 자료만 넘겼다.
그렇게, 나는 조직이 원하는 여성 직원의 '태도'를 배워갔다.
차별이 아니라 ‘배려’라는 말로 포장된 그곳에서, 나도 '조용한 대리'가 되어갔다.
점심시간, 신입 주임이 물었다.
“대리님은 왜 아직도 대리세요? 일은 거의 과장처럼 다 하시잖아요.”
나는 순간 입이 붙잡혔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조직은 나를 선택하지 않았다고?
능력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고?
커리어 플랜은 처음부터 정해져 있는 거라고?
결국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자리로 돌아와 엑셀 파일을 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결국, 또 눈치 보며 ‘지금 이 일’을 잘하는 것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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