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도 내가 썼는데, 발표는 왜 팀장님이 하죠?

침묵을 배운 사람들에게, 이제 와서 Speak Up이라니

by 시연

회의실 칠판 옆에 내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프레젠테이션 자료는 내가 만들었고, 발표 연습도 이틀을 했다.
슬라이드에 적힌 모든 문장은 내 머릿속에서 나왔다.

그런데 회의 5분 전, 팀장이 말했다.
“오늘 발표는 내가 할게. 너는 뒤에서 자료만 넘겨줘.”

‘왜요?’ 라고 묻는 대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리모컨을 들었다.
질문은 많았지만, 답은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조직에서 내가 '발표자'가 되기엔, 너무 많은 것이 지나치게 ‘과한’ 사람이니까.


슬라이드 6번 장표에서,

경쟁사와 우리 브랜드의 차별 포인트를 도표로 비교한 부분이 나왔다.
나는 여기에 우리만의 강점 코멘트를 미리 넣어놨다.
그런데 팀장은 뜬금없이 말했다.

“여기, 음… 아직 정리 중인데요. 우리 대리님이 좀 더 보완해줄 거예요.”

보완?
그 도표는 내가 밤 11시에 만든 최종본이었다.
회의실 안 공기가 싸늘해졌고, 나는 조용히 슬라이드를 넘겼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1일 오후 02_46_20.png

회의가 끝난 뒤, 같은 팀의 차장이 내게 슬쩍 말했다.

“그 자료 너가 만든 거지? 발표는 팀장님이 했지만, 딱 네 스타일이더라.”

그는 가볍게 웃으며 지나갔지만, 나는 웃지 못했다.
그 말은 '인정'이 아니라,
‘모두가 알지만 아무도 말하지 않는 구조’를 확인시켜주는 말처럼 들렸다.

결국 나는 또 그림자였다.
보고서를 만들고도 내 이름은 없고,
발표를 준비하고도 목소리는 없었다.

사실 팀장이 내 발표를 가져간 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 공모전 때, 내가 낸 기획안이 입상했다.
회사 전체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팀의 마케팅 공모전 수상 – 팀장 ○○○ 기획안 채택”

그 순간, 나는 알았다. 이 조직은 실행은 내가 하고, 성과는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돌아가는 구조라는 걸.


며칠 뒤, 팀장은 내게 피드백을 줬다.

“넌 일은 잘해. 그런데 너무 앞에 나서지 말고, 말투도 좀 조심하자. 괜히 불필요한 오해 사면 너만 손해야.”

아, 알겠습니다. 앞으로는 말 안 하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로 돌아왔고,
그날 이후 나는 조금씩 조용해졌다.


회의에선 아이디어를 말하지 않았고,
커리어 플랜엔 ‘팀 기여’만 적었다.
질문은 미팅이 끝난 후 슬랙으로 보냈고,
기획서는 언제나 '팀장 리뷰 후 제출'로 저장했다.

이 조직에서 나는 침묵을 통해 살아남는 법을 배웠다.


요즘 우리 회사는 ‘Speak Up 캠페인’을 한다.

슬로건은 이렇다.

“누구나 자유롭게 말할 수 있는 문화”
“심지어 반대 의견도 환영합니다”
“다양성이 조직을 살립니다”
ChatGPT Image 2025년 7월 31일 오후 02_44_31.png

모니터에는 반짝이는 문구들이 돌아가고,
복도엔 캠페인 포스터가 붙었다. 웃음이 나왔다.

지금까지 말하면 ‘예민하다’고 하고, 질문하면 '불만이 많다’라고 하더니,
이제 와서 “자유롭게 말하라”고?
역사도, 분위기도, 문화도 바꾸지 않은 채
캠페인 하나 붙인다고 침묵이 깨질까?

침묵은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니었다.
그건 조직이 오랜 시간에 걸쳐 내게 학습시킨 결과였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말하지 않는다.
아니, 말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말해도, 또 “말투가 좀 세다”는 소리만 들릴 테니까.



#발표는왜내가아닌가요 #크레딧도둑 #침묵의학습 #SpeakUp캠페인 #이제와서#직장인#차별#외국계의허상 #워킹맘의현실 #브런치소설 #전세#성과는남의것#나는일만

keyword
이전 05화능력은 나인데, 승진은 왜 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