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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 Oct 08. 2022

오늘도 버텨내도록

침잠하다


가족이기 때문에 할 수 없는 말이 있다. 이를 테면 그만 살고 싶다는 말 같은 것.


서른을 갓 넘긴 시절,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우울감에 빠져있었다. 침잠하며 자꾸만 눕고만 싶던 시간 속에 끝끝내 든 생각은 "나의 생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것. 마음이 아픈 병도 진짜 병으로 인정해줄 정도로 사회적 인식이 높아져 우울은 감기 같은 것이라 필요하면 도움을 받으라는 요즘에도, 막상 내가 신경정신과 진료를 보고자 하니 거부감이 컸다. 그래서 기준점을 정했다. 죽음에 도달하는 구체적 수단을 머릿속에서 강구하기 시작한다면 그땐 진짜 병원에 가기로.


다행히 거기까지 도달하지 않았으나 2년 넘는 시간 동안 겨울잠 자는 사람처럼 회복에 집중했다. 마치 그것이 본능인 양. 해도 뜨지 않은 겨울 새벽의 출근길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있으면 쌓인 것이 터지듯 서럽게 끅끅 눈물이 났다. 안구건조를 핑계로 기댔다. 원래도 사람들이 많은 장소나 만남을 기피하지만 더더욱 최소화하고 직장에만 겨우 나가며 단짝 친구조차 드물게 만난 건 내가 품는 부정적인 기운이 상대의 에너지를 갈시킬 것이 불 보듯 뻔했기에. 당시 뱉어내는 어휘에 냄새가 있다면 분명 고약한 악취가 났을 것이다.


SNS의 카드 뉴스 같은 걸 둘러보다 보면 건강하게 살기 위해 권하는 것 중 흔하게 '일정한 시간에 일어나 침대를 정리하라.'는 말이 자주 눈에 다. 교대근무로 규칙적 기상은 불가능할지라도 후자라도 해보고자 시도해보니 단순해 보이는 의식이 가져다주는 여파는 절순하지 않다. 기상 후 침상을 정리하는 건 곧 수면의 종결을 온몸에 알리는 행위다. 누운 자세에서 벗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는 노곤한 몸은 어도 기상을 깨닫게 된다. 정리된 침구는 다음 수면 시까지 당신이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니라고 선을 긋곤 급기야 누워 쉬는 것 말고 다른 행위를 해보라 종용한다. '침대 밖은 위험해.'라는 인터넷 유행어는 달콤하게 들리지만 실상은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설명이었던 셈이다.

 

우울감이 넘쳐흘러 그 무엇도 하고 싶지 않던 그때에도 이미 체결한 사회적 약속은 이행해야 한다는 의무감 넘치는 K-직장인답게 직장에는 꾸역꾸역 나갔다. 어딘가에 속하여 타의라 할지라도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건 이런 때 큰 도움이 된다. 당시 직장은 마치 나라는 껍데기를 가까스로 걸어 놓은 행거였다. 바람에 펄럭이는 텐트를 겨우 고정하는 핀 같은 거랄까. 터가 병원이다 보니 생을 붙잡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마음으로 근무를 한다는 게 기만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실상 나 하나도 가누지 못하는 마음 상태로 환자들 앞에서 가면극을 하고 있는 중이었으니. 매 순간 진심은 없고 기계적인 친절함으로 채웠는데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죄송하게도 그런 피상적인 상냥함 조차 건사하지 못다. 오늘날 출근이 나에게는 일상을 유지하는 수단이었음을 깨닫는다. 일이 나에게 삶의 이유는 될 수 없었지만 살아있는 상태를 유지하게 하는 의식이자 삶을 지탱하는 구조물이었던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면 따뜻한 물 한잔을 마시며 하루를 맞는 친구가 있다. 마른 입을 온기로 데우며 몽롱한 의식을 깨웠을까, 아니면 간밤의 잡념들을 몰아내고 비웠을까. 오직 그만이 알 일이다. 일상의 버팀목은 저마다 다르고, 우리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세상에 살아남는다. 침잠하는 나를 건져 올리는 방법은 생각보다 대단치 않은 것에서 시작되므로.







침잠: 1. 물속에 가라앉거나 숨음.
2. 깊이 생각하거나 몰입함.
3. 성정이 깊고 차분해서 겉으로 드러나지 아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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