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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설롬 May 18. 2020

시를 좋아하지 않는 당신에게 권하는 시집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꼼꼼하게 살펴보지 않는 것이 득이 될 때가 있다.

덕분에 이 책을 골랐으니까.


나는 책을 고를 때 심사숙고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추천을 받는 것이 아니라면 보통은 표지 디자인, 제목, 그리고 목차를 슥슥 살핀 후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 시작하고 완독에 대한 강박 관념도 없다.


최근 조금 어려운 책들을 읽었던 터라 편한 마음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를 찾고 있었다.

대충 훑어보고 내가 찾던 종류의 책이겠거니 했다.

책을 보면서도 평소 읽던 에세이들과 달리 시가 많이 담겨있다고만 생각했지 별다른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다.

시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이 책 덕분에 많은 시를 접했고, 그중 일부는 내 마음 한 켠에 자리를 잡았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시선을 오래도록 잡아두던 일러스트들도 이 책을 보는 큰 즐거움이었다.


완독 후 표지를 다시 살펴본 나는 놀랐다. 그리고 웃음이 나왔다.

표지 중간에 아주 큰 글씨로 이렇게 쓰여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

 

어떻게 이렇게 큰 글씨를 못 볼 수 있었지 싶으면서도 못 봐서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시 강의'라는 문구를 봤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 테니까.


시를 왜 좋아하지 않는지를 생각해 보건대 크게 두 가지 이유다.

가장 큰 이유는 게을러서.

시는 함축적이다 보니 읽자마자 무슨 말인지 알기가 어렵다. 뜻을 이해하고 시상을 느끼려면 상상을 하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나는 그게 귀찮을 정도로 게으른 사람인 것이다.

그다음으로 남 탓을 해보자면 입시 교육의 아쉬움이랄까.

문학이라는 것이 본질적으로 정답이 있을 수 있는 것인지 의문이지만 어쨌든 내가 경험한 입시 교육에서는 문학에서도 정답을 찾아내야 했고 안타깝게도 나의 정답률은 그다지 높지 못했다. 나는 시를, 아니 문학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고 자연스레 문학에 대한 흥미가 없어졌다.....고 변명해본다.


나 같은 독자들을 생각하면 '시 강의'라는 표현은 다소 우려(?)스렵다.

책을 읽고 나면 이 표현이 적절하게 느껴지지만, 책을 읽기 전에 보면... 조금 부담스럽다.

시... 그리고 강의...?

'시와 함께 삶의 언어를 찾아가는 열네 번의 여정' 정도는 어떨까 생각하며 며칠이 지나도 여전히 생각나는 시 몇 편을 소개해본다.




                    이마

                                                허은실


타인의 손에 이마를 맡기고 있을 때

나는 조금 선량해지는 것 같아

너의 양쪽 손으로 이어진

이마와 이마의 아득한 뒤편을

나는 눈을 감고 걸어가보았다


이마의 크기가

손바닥의 크기와 비슷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가난한 나의 이마가 부끄러워

뺨 대신 이마를 가리고 웃곤 했는데


세밑의 흰 밤이었다

어둡게 앓다가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

내가 오른팔을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기 때문이었다

단지 그 자세 때문이었다


- ≪나는 잠깐 설웁다≫(문학동네, 2017)




저자는 시의 화자가 혼자 앓다가 잠든 것 같다고 말했다. 그것도 세밑, 설 전날에. 너무 아파서 한밤중 홀로 깨어났고, 서러웠을 거라고. 문득 일어나 벙어리처럼 울었다는 표현에서 혼자 너무 서러워서 소리도 못 내고 울었던 모양이라고 이야기한다. 바로 그 자세 때문에. 자다가 깨어나 보니 내가 내 팔을 내 이마에 얹고 누워 있었다고, 아픈 것만 해도 힘든데 그 고통을 같이 나누거나 간호해줄 이가 없는 것이 화자를 더 서럽게 만들었을 거라고.




    김혜수의 행복을 비는 타자의 새벽

                                                                       성미정                                                


잠에서 깨버린 새벽 다시 잠이 오지 않아

뒤척이다가 생뚱맞게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건 인터넷 메인 뉴스를 도배한

김혜수와 유해진의 열애설 때문만은 아닌 거지


김혜수와 나 사이의 공통분모라곤

김혜수는 당연히 모르겠지만

신혼 초 살던 강남 언덕배기 모 아파트의

주민들이었다는 것

같은 사십대라는 것 그리고

누구누구처럼 이대 나온 여자

가 아니라는 것 정도지만

김혜수도 오늘 밤은 유해진과 기자회견

사이에서 고뇌하며 나처럼 새벽녘까지

뒤척이는 존재인 거지 그래도 이 새벽에

내가 주제 높게 나보다 몇 배는 예쁘고

돈도 많은 김혜수의 행복을 빌고 있는

속내를 굳이 맑히자면


잠 못 이루는 밤이 점점 늘어만 가고

오늘처럼 잠에서 깨어나는 새벽도

남아도는데 몽롱한 머리로 아무리

풀어봐도 뾰족한 답이 없는 우리 집

재정 상태를 고민하느라 밤을 새느니

타자의 행복이라도 빌어주는 편이

맘 편하게 다시 잠드는 방법이란 걸

그래야 가난한 식구들 아침상이라도

차려줄 수 있다는 걸 햇수 묵어

유해진 타짜인 내가 감 잡은 거지


오늘 새벽은 김혜수지만 내일은 김혜자

내일모레는 김혜순이 될 수도 있는

이 쟁쟁한 타자들은 알량한 패만

들고 있는 나와는 외사돈의 팔촌도 아니지만

그들의 행복이 촌수만큼이나 아득한 길을

돌고 돌아 어느 세월에 내게도 연결되지

말라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그러니 사실 나는 이 꼭두새벽에

생판 모르는 타자의 행복을 응원하는

속없는 푼수 행세를 하며 정화수 떠놓고

새벽기도 하는 심정으로 나의 숙면과

세 식구의 행복을 간절히 빌고 비는

사십 년 묵은 노력한 타짜인 거지


- ≪읽자마자 잊혀져버려도≫(문학동네, 2011)




책에서 저자는 시를 소개하기 앞서 당신이 제일 싫어하는 말 중에 하나가 "가장 쓸데없는 일이 연예인 걱정하는 거"라고 이야기한다. 세상에 걱정하지 않아도 좋을 사람은 없다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준 사람들인데 행복을 빌어줘야지 않겠냐며 위의 시를 보여준다.




                                    아버지의 모자

                                                                                     이시영


아버지 돌아가시자 아버지를 따르던 오촌당숙이 아버지 방에 들어가 한참 동안 말이 없더니 아버지가 평소에 쓰시던 모자를 들고 나오면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이 모자는 내가 쓰겠다." 그러고는 아주 단호한 표정으로 모자를 쓰고 사립 밖으로 걸어 나가시는 것이었다.

                                                                                                                                                      - ≪바다 호수≫(문학동네,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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