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사를 끝낸 뒤의 고단함, 따끈한 음식 그리고 이슬 한 방울은 추억 팔이를 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추억 팔이는 모두가 지겹다고들 말하면서도 늘 되돌이표를 찍는, 모든 얘기의 종착점이다. 당일 봉사의 복기가 끝난 뒤에는 단골 코스로 '준직업병' 호소와 추억 팔이가 이어졌다. 독특한 모양의 천장을 쳐다보고는 '저긴 어떻게 도배를 할까?' 한참을 얘기하고 나면 비슷한 선례를 해낸 친구들의 명 강의가 펼쳐진다. 옆 테이블에서 듣던 친구들이 말려도, 또 다른 테이블에서 되풀이되는 완치 불가능한 준직업병. 대략 이런 형국이다.
“여기 벽에 실리콘 좀 쏴야겠는데?”
“안 그래도 나도 그거 보고 있었음”
“또 봉사 얘기 하나? 다른 얘기 좀 해라..”
“아니, 오늘 봉사한 집도 저런 옷걸이 있었는데.. 빡세던데”
“어, 나도 전에 저거 있었는데.. OO 구 유행인가?”
“그만.”
스무 살을 보내고 나서는 부쩍 추억을 팔 일이 많아졌다.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졌지만 한번 지나면 되돌릴 방법이 없는, 연말이 다가올 때 더욱 미워지는, 나이라는 녀석 때문일까. 한 치 앞도 모르는 꿈을, 목표를, 취업을 물어보는 것은 내 입에서 뱉은 질문이 스스로에게도 향해, 가슴이 뜨끔한다. 미래에 대한 준비를 숙제 검사라도 하듯 물어보는 어른들의 모습이 투영되기도 했다. 재수, 삼수, 편입, 자퇴.. 다양한 친구들이 모인 만큼 서로의 온당한 거리 유지가 필요한 거다. 서로에게 묻는 미래는, 서로에게 함께하자는 약속 정도가 충분했다. 그 이상의 얘기는 접어둔다. 지금 우리 모두가 웃을 수 있는 얘기는 추억 팔이 정도가 딱, 적당하다.
어떤 기억은 미화되고 사실은 왜곡되며 추억은 흐려진다. 추억은 힘이 센 줄만 알았는데, 그렇지만도 않더라. 함께 대학생의 미래를 이야기하던 중학교 친구들은 1년에 한 번 만날까 말까. 열댓 명에서 무리를 지어 놀던 고등학교 친구들은 고작 반만 만나는 정도. 함께 동기 사랑 나라사랑을 외치던 대학 동기들은 반이 데면데면. 더 강한 추억들이 나타나면 슬며시 자리를 내주었고, 어느 사이엔가 사라졌다. 끊임없이 추억 팔이를 하지 않으면 그 대단했던 기억도, 사랑했던 사람들도 오래 자리하지 못했다. 아무리 팔아도 추억의 밑천이 바닥나지 않도록, 곱씹어야만 한다. 지겹도록, 질리도록.
추억 팔이를 일삼는 게 아직도 과거에 살고 있다는 인상을 줄지도 모르겠다. 어찌 보면, 나의 추억 팔이는 잊힐 미래를 위한 대비책이라고 변명을 덧붙여본다. 행복한 지금이 잊힐 미래가 무섭고, 섭섭하다. 우리의 장판길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영원히 잊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래서 오늘도 펜을 들어 추억을 팔고, 추억에 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