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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자꾹 Oct 30. 2024

의사도 실수할 수 있다


지난봄 일이다.    

 

며칠 전부터 아들이 왼쪽 발이 불편하다고 했다. 수영을 너무 열심히 해서인지, 발목을 꺾는 스트레칭을 너무 과하게 해서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내내 ‘아프다 괜찮다’를 반복하길래 동네 정형외과에 가보라 했다. 다 큰 녀석이니 혼자 가보라고 했다가, 혹시라도 발목 상태가 생각보다 심각할까 봐 같이 집을 나섰다.  

    

정형외과에 가니, 늘 그렇듯이 의사가 진료하기 전에 엑스레이부터 찍는다. 발 사진을 찍고 나서, 아들은 진료실로 들어갔다. 별거 아니려니 생각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다. 텔레비전 화면에서 눈을 떼고 진료실 쪽으로 기린처럼 목을 쭈욱 빼 들고 이리저리 두리번거렸다. 아들은 보이지 않는데, 양쪽 진료실로 사람들이 들어간다. '도대체 아들은 어디로 간 거지?'     


좀 더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진료실과 진료실 사이에 있는 초음파실에서 아들의 하얀 양말이 보인다. 초음파까지? 무슨 큰 사달이 났을까 봐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한다. 진료를 보던 한 의사가 초음파실로 들어갔다. “괜찮을 거야.” 나는 나에게 마법의 주문을 건다. 몇 번 더 주문을 외면서 나를 다독여 주니, 아들이 초음파실에서 나왔다. 다시 진료실로 들어가야 한단다.      


진료실에서 나온 아들에 따르면, 인대가 늘어났단다. 인대가 찢어지거나 물이 차지는 않았지만, 부목을 대기 직전이라는 거다. 그냥 두면 큰일 날 뻔했다. 주사를 맞고 물리치료도 받고, 약도 먹어야 한다고 했다.     


30~40분 기다려야 물리치료가 끝난다기에, 나 혼자 집으로 왔다. 텔레비전을 보며 쉬고 있는데 카톡이 울린다. 아들이 얼굴 사진을 올렸다. 무언가 불편해 보인다. 물리치료 끝나고 보니 시합 끝낸 격투기 선수처럼 얼굴이 부어있었다고 했다. 놀라서 다시 의사한테 갔더니 '비스테로이드계 진통제'에 대한 알레르기라고 했단다. 진통 효과가 빨리 나타나라고 병원에서 주사를 맞았으니 그렇게 빨리 심하게 나타났나 보다.

  

아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 상태로 혈압이 오르거나 목이 부으면 아나필락시스※ 증후군으로 넘어가 생명이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했다. 약도 새로 처방받았단다. 병원에서 다른 성분의 주사를 맞고 나서 부기가 가라앉으면 온다고 했다. 의사는 아들에게 앞으로는 어떤 병원에 가든 꼭 비스테로이드계 약을 먹으면 안 된다고 미리 말해야 한다고 하고서, 새로 약을 처방해 주었단다..     


처음에 처방받은 약을 내가 가져왔기 때문에 다시 가서 약을 바꿔와야 했다. 아들 상태도 확인할 겸 다시 집을 나섰다. 잘생긴 아들 얼굴이 엉망이었다. 여기저기 물집 잡힌 것처럼 보였다. 아들 말로는, 처음에는 얼굴 전체가 퉁퉁 부었는데 한결 나아진 거라 했다. 아무튼 조금씩 가라앉는다니, 다행이다 생각하며 지켜보기로 했다.     


 아들이 병원에 있는 동안 나는 처방전을 들고 약국에 갔다. 아들이 새로 받았다는 처방전을 봤더니 아까 받은 약과 이름이 똑같았다. 병원에선 약을 바꿨다고 했는데, 이상해서 약사한테 물어봤다. 약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아까 가져온 처방전이랑 똑같다고 말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처방전을 들고 다시 아들에게 뛰어갔다. 아들이 접수하는 직원한테 말하니 알아보겠다고 했다.      


토요일이라 그런지 병원에는 환자가 계속 밀려들었다. 우리는 30분 정도 더 기다려야 했다. 다행히 아들 얼굴은 많이 가라앉았다. 본인도 많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처방전을 들고 온 간호사는 무심한 말투로 좀 전에 새로운 처방전이라고 준 것은 잘못된 거라고 했다. 지금 처방해 주는 약은 진통제가 아니라 부은 얼굴을 가라앉히는 약이라고 했다. 처음에 처방해 준 약은 비스테로이드계 진통제라 먹으면 절대 안 된다고 말했다. 그리고 약국에 가서 그 사실을 말하면, 약사가 약을 바꿔줄 거라고 했다.     


아들과 나는 약국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하고 약을 바꿔 달라고 했다. 약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아까보다 200원이 적게 나왔다면서 거슬러 주었다. 원래는 다시 약값을 받아야 하지만 이번에는 환불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고 약 봉투를 받아 들고 나왔다.


우리는 약을 받아 들고 가슴을 쓸어내리며 약국을 나왔지만, 왠지 씁쓸했다. 만약 내가 처방전을 자세히 보지 않았다면, 약국에 가서 묻지 않았다면, 아들이 잘못된 약을 먹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오늘은 토요일이라 응급실 말고는 병원들이 일찍 진료를 끝낼 거라고 생각하니,  그 순간 가슴이 턱 막혀왔다. 큰일은 없었지만, 병원에서 잘못된 처방전을 주고서 아무도 우리에게 사과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몰려드는 주말에 일하는 의사의 고단함은 이해하지만, 사람의 목숨이 달린 일을 하는데 좀 더 신중히 처리해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오늘 아주 큰 걸 배웠다. 병원에서 약을 처방받으면 기계처럼 약국에 처방전을 내밀 것이 아니라 반드시 나 스스로 잘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약사에게도 물어보고 확인받아야 한다. 의사도 틀릴 수 있다.    

  




*아나필락시스 증후군   

 

아나필락시스란     

아나필락시스는 특정 물질(알레르겐)에 대해 우리 면역체계가 과도하게 반응하여 갑작스럽고 심각한 전신 알레르기 반응이 나타나는 질환입니다. 이 반응은 매우 빠르게 진행될 수 있으며 즉각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아나필락시스의 증상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해 아나필락시스가 발생하면 피부에 가려움증이나 발진, 두드러기가 나타나는 것을 시작으로 매우 빠르게 전신으로 다양한 증상이 퍼질 수 있습니다. 입술과 혀가 붓고, 기관지 근육이 수축해 숨쉬기가 어려워지며, 호흡할 때 쌕쌕거리는 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가슴이 답답하거나 복통을 느낄 수 있고, 설사와 구토가 동반될 수 있습니다. 심한 경우 혈압이 급격히 떨어져 어지럼증을 경험할 수 있으며, 심장 박동이 빨라지거나 심정지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아나필락시스는 생명을 위협할 수 있는 응급상황이므로 이러한 증상이 나타나면 즉시 응급 처치가 필요합니다.

-세브란스 병원 알레르기 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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