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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햄릿』

by 발자꾹

어느새 완연한 가을이 되었다. 한낮에는 여전히 볕이 따갑지만, 길가엔 노란 은행이 여기저기 뒹굴고 밤엔 귀뚜라미 소리가 점점 더 선명해진다. 새벽녘엔 이불을 끌어당기기도 한다.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는 아침에 화요일의 그녀들은 다시 도서관 2층 문화아지트에 모였다. 사람들이 모이는 곳엔 여전히 에어컨을 켜는 곳이 많긴 하지만 기후변화를 걱정하는 그녀들은 창문을 여는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서는 순간 달콤한 포도 향이 풍겨왔다. 맏언니 그녀가 동생들에게 주는 가을 선물에 막내 그녀가 준비한 커피가 따뜻한 향을 퍼뜨린다. 살림꾼 그녀는 유통기한이 임박한 사과잼이 팔리지 않아 울상인 농부님을 돕겠다며 잼을 여러 병 샀다며 건네준다. 다가올 추석에 고단할 때 빵에 발라먹으면 고단함이 스르르 녹아버릴 것 같다. 맏언니는 또 서랍장에 잠들어 있던 스타킹이 한가득이라며 이제 금방 추워질 테니 한 장씩 챙기라 한다. 오늘도 시작부터 훈훈하다. 아니 뜨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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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오간 이야기는 지난 일주일의 근황들이었다. 쿠팡 아르바이트에 다녀온 그녀가 있었다. 저녁 7시 반부터 새벽 1시 반까지, 일이 고되기도 했지만, 처음이라 적응하느라 많이 애썼다는 말에 다들 걱정이 많았다. 깜깜한 밤에도 쉬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는 말에는 “그렇지 그렇지.” 고개를 끄덕인다. 또 다른 그녀는 아들이 흔쾌히 내놓은 민생 지원금 덕분에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며 소소한 즐거움을 나누었다. 가톨릭 사제가 청소년의 자립을 돕는 활동에 감명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자 청년층 사이에서 인기 있는 일본 애니메이션 “귀멸의 칼날”을 영화관에서 봤다는 이야기가 이어졌다. 청년층에서 유행하는 일본 애니메이션 열기를 얘기하며 영화가 잔혹한데 비해 15세 관람가라는 등급 선정이 옳은지에 대한 비판이 이어졌다.

이야기가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았지만, 그녀들의 시계는 정확했다.



10시 30분

오늘의 책, 셰익스피어의 『햄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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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곧바로 오필리어의 죽음으로 향했다. 스스로 죽은 것이냐, 정신 줄을 놓고 실수로 죽은 것이냐에 대해 논란이 일었다. 곧 누군가 “물에 빠졌으나 살려는 의지가 없었다”는 말이 나오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작품 속 여성상은 순종적이고 수동적이었으며, 자기의식조차 제대로 갖기 어려웠던 시대상이 안타까웠다. 햄릿이 어머니의 재혼을 두고 내뱉은 말, “약한 자여, 그대 이름은 여자”라는 대사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어머니의 부재와 상실이라는 키워드가 셰익스피어의 비극 곳곳에 자리하면서 작품을 더 비극적으로 만드는 것 같았다.

햄릿은 정말 우유부단한 인물일까? 토론은 곧 그의 성격으로 옮겨갔다. 누군가는 그를 “소극적이고 정신이 약한 사람”이라고 했지만, 다른 이는 “단순히 우유부단한 게 아니라 주도면밀하게 다각도로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확실히 해야만 행동으로 옮기는 성격, 그렇기에 기회를 놓치지만, 그렇다고 허약한 인간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들은 서로의 성격을 생각이 많은 햄릿형 인간과 행동이 먼저인 레어티즈형 인간으로 나누어 보려고 했는데 대부분 자신은 햄릿에 가깝다고 했다. 그녀 중 한 명은 자신이 행동형 같지만 때론 생각에 골몰한다며 사고형과 행동형의 중간쯤 어딘가라고 말했다. 평소에 ‘단호박’이라고 여겼던 그녀도 생각이 많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책 속 인물을 거울삼아 그녀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가졌다.

연극 속 연극 장면도 화제가 되었다. 햄릿이 배우들을 불러 아버지의 독살 장면을 재현하게 하는 부분은, 기존 이야기를 빌려 자기 현실을 반영하는 창작의 한 방식이었다. “거울 같은 연극”이라는 말이 나왔다. 지금까지도 많은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준 기법이라는 점에서, 그녀들은 역시 셰익스피어가 대단하며 엄지 척을 했다.


누군가는 저녁 시간에 하는 막장 드라마를 볼 때, 이전에는 그저 혀를 끌끌 차기만 했다면, 이젠 『맥베스』가 보이기도 하고 『오셀로』가 보이기도 한다며 함께 차례차례 4대 비극을 읽는 보람이 있다고 뿌듯해했다.

햄릿의 숙부이자 현 왕 클로디어스는 끝까지 완전한 빌런으로 남았다. 죄책감은 있었으나 끝내 반성과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흥미롭게도 그녀 중 한 명은 조선 시대의 반정을 예로 들며,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뒤에 왕좌에 오르고도 죄의식에 사로잡히는 인간의 심리는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클로디어스가 기도하는 순간에 햄릿이 칼을 거두어들였을 때, 그녀들은 종교적 맥락을 이야기했다. 구교와 신교가 혼재하던 유럽 사회, 기도 중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햄릿을 망설이게 했다는 것이다. “진짜 용서라면 당사자에게 직접 빌어야 한다”는 말이 나왔다.

누군가 예전에 그녀들이 함께 본 영화 <밀양>을 떠올렸다. 주인공 이신애는 아이를 잃고 괴로워했으나 종교를 통해 마음의 평안을 찾고 유괴범을 용서해 주려고 교도소에 갔으나, 범인은 이미 하나님께 죄 사함을 받았다며 천연덕스럽게 신애를 맞이한다. 신애는 그 자리에서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어떻게 하나님이 먼저 용서하냐”면서 울부짖는다. 복수와 용서, 목회자 그녀는 성경에도 죄지은 자가 피해자에게 직접 용서를 빌고 난 다음에야 하느님께 용서받을 수 있다고 했다면서 사람들이 멋대로 해석해서 많은 이들에게 해를 끼친다고 덧붙였다.

마지막 결투 장면에 대한 평가는 엇갈렸다. 햄릿과 오필리어의 오빠 레어티즈가 서로 용서하는 부분이 너무 짧아 아쉽다는 의견이 많았다. 그리고 이 짧고 격정적인 흐름을 어떻게 연기할지 궁금하다며 다른 어떤 작품보다 “햄릿”은 꼭 연극으로 보고 싶다고들 했다.

오필리어의 죽음, 레어티즈의 분노, 거트루드의 배신, 클로디어스의 음모, 그리고 햄릿의 망설임. 그 모든 이야기는 결국 인간의 약함을 드러내는 다른 얼굴이었다. 실존에 대한 고뇌, 권력의 본질에 대한 허무, 여성상에 대한 아쉬움…. 그녀들은 마지막으로 호레이쇼를 떠올렸다. 끝까지 햄릿의 곁을 지키고, 모든 진실을 세상에 전하겠다고 다짐한 친구. 화려한 주인공들이 하나씩 쓰러지는 무대 위에서, 오직 묵묵히 남아 진실을 증언하는 호레이쇼가 기억에 남는다는 말에 다들 동의했다.



화요일의 그녀들은 오늘도 일상과 책을 오가며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햄릿』은 400년 전 덴마크 궁정의 이야기였지만, 여전히 우리 삶 곳곳에서 주인공들을 만나기도 하고 때론 내가 고뇌하는 주인공이 되기도 한다. 맞벌이하면서도 집안일을 도맡아 하는 현실에 분개하면서도, 기운 없는 남편을 보면 안쓰럽다. 오십이 넘어도 들어야 하는 끝도 없는 엄마의 잔소리를 귀찮아하면서도 날이 갈수록 쇠약해지는 모습에 가슴이 미어진다. 권력을 좇다 추락한 이들의 추악한 모습을 뉴스를 통해 보면서 400년 전 덴마크 엘시노어 성과 다를 바 없다는 것에 답답해한다.

9월 한 달 내내 그녀들은 셰익스피어의 비극에 푹 빠져 지냈다. 처음엔 운문 같은 희곡을 읽는 게 어색해서, 몰입이 되지 않는다고 입을 모아 푸념을 늘어놓던 그녀들이 내년엔 꼭 희극도 읽어 보자고 한 목소리를 내었다. 바쁘다 바빠 쓰리잡을 뛰는 그녀가 연극 “맥베스”를 보고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그녀들의 가을을 짙게 물들였다.

*다음 주 9월 30일에는 2025 베네치아 영화제에서 커다란 관심을 끌어모았던 박찬욱 감독의 영화 “어쩔 수가 없다”를 보기로 했다. ‘어쩔 수 없이’ 아니 ‘기꺼이’ 함께 하기로 했다. 그녀들이 어떤 이야기를 만나고 또 나눌 수 있을까 무척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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