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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었을까?

by 발자꾹

9월 한 달 내내 셰익스피어의 비극과 함께했다. 오늘은 박찬욱 감독의 문제작 “어쩔수가없다”를 함께 보기로 했다. 평소 모임에 맞춰 조조 영화를 예약했다. 가장 빠른 시간이 10시 30분이라니, 사람들이 정말 영화를 많이 보지 않는다는 현실을 체감할 수 있었다. 리클라이너 관이라 13,000원이었지만, 문체부에서 제공하는 할인권 덕에 7,000원에 볼 수 있었다. 더 좋은 소식은 이번 영화 관람은 회비로 충당한다는 사실이었다.

10시가 되자, 그녀들이 하나둘 나타났다. 쿠팡 야간 알바를 다녀온 그녀는 “두 번은 못 하겠다”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누군가는 주말 출판사 이벤트로 “단테의 신곡”을 보며 오랜만에 문화의 향기가 감도는 주말을 보냈다고 자랑했다. 김장 앞두고 고춧가루 시세와 배추 원산지를 따지고 병원 전산이 멈춰 오전 퇴원이 오후로 밀린 답답한 경험담까지 이어졌다.


제목: 어쩔수가없다 (No Other Choice)

감독: 박찬욱

씨네21

원작: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의 소설 The Ax (한국어판 제목 등으로는 『액스』)

장르: 스릴러, 블랙 코미디, 범죄 드라마


* 줄거리 개요

 주인공 유만수(이병헌 분)는 제지 회사에서 25년간 근무하며 가족과 함께 평온한 삶을 꾸려온 가장이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어쩔 수 없다”라는 말과 함께 해고 통보를 받는다.

 완벽하다고 믿었던 삶의 기반이 무너지자, 그는 재취업을 위해 수많은 면접장을 전전하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결국 그는 “자리를 주지 않으면 내가 만들어내겠다”라는 극단적 결심을 품는다.



10시 25분. 어서 입장하라는 문구가 눈앞에서 재촉했다. 그녀들은 줄지어 상영관으로 들어갔다. 리클라이너 관은 다리를 올리고 편하게 볼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시며 소곤대던 그녀들은 불이 꺼지자, 암흑의 세계에서 스크린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영화는 도시 외곽의 이층 집에서 시작했다. 남자는 장어를 굽고 여자는 아이들을 부르며 호들갑을 떤다. 행복해 보이지만 어딘가 어색하고 불편하다. 감독의 의도일까?

예상대로 영화를 보는 내내 불편했다. 박찬욱 감독이 “불편한 금자씨” “올드보이” “아가씨” 에서 보여 주었던 잔혹성과 불편함이 어김없이 이어졌다. 주연 배우 이병헌의 말대로 전작에 비해 웃음 코드가 곳곳에서 발산하긴 했지만 역시 잔혹했다.

그런데 두 시간 반이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박찬욱 감독이 추구하는 치밀한 미장(화면 구성)과 배우들의 열연 덕분이었다. 상영관을 나가면서 누군가는 “정말 많이 불편했다. 집에서 봤다면 초반에 꺼버렸을 것이다.”라고 얘기했다. 하지만 함께 보기로 한 영화기에 끝까지 참아냈다고도 했다. 불편하고 힘들었지만 나누고 싶은 이야기는 많다고 했다.

두 시에 근무를 시작하는 그녀 한 명이 먼저 떠났다.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몹시 아쉬웠다. 뜨끈한 국물 요리를 먹고 배를 든든하게 채운 뒤 카페에서 커피와 차를 마시며 본격적으로 영화 이야기를 나눴다.

우선 첫 장면이 어색했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하지만 이성민, 염혜란, 박희순 등 연기의 달인으로 불리는 배우들이 함께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몰입이 되었다고들 했다. 감독도 중요하지만 그걸 소화해 내는 배우들의 연기가 따라주어야 관객이 자연스레 빠져든다는 데 다들 공감했다.

시작부터 끝까지 제목이 화두였다. 회사의 해고 통보부터 주인공 만수의 선택, 만수와 경쟁 구도에 놓인 인물들의 선택, 만수 가족의 선택.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고발하는 것 같지만, 동시에 개인 책임을 희석하는 변명이 될 수도 있다. 해고와 경쟁을 강요하는 건 기업과 제도의 책임이지만, 결국 선택을 실행한 건 개인이었다. 살인의 현장에서 ‘먹고살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라는 말이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만수는 법 없이도 살 사람이었지만 회사의 부당 해고 때문에 달라진 걸까? 절도를 저지른 아들을 살리겠다고 친구에게 덮어씌우라 말하는 비틀어진 부모로서 그들의 선택을 ‘어쩔 수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을까?

살해하려던 사람이 아내의 불륜을 목격할까 봐 전화를 걸어 시간을 끄는 장면에서 그녀들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결국 아내의 외도를 목격하고도 마당에서 혼자 소리 없이 아우성을 치며 이리저리 구르는 모습이 너무도 안타까웠다고 누군가 말하자, 또 다른 그녀는 그 장면이 옥에 티였다고 했다. 이런 지점에서 토론하는 재미를 느낀다. 맞고 틀리고의 문제가 아니다. 각자의 감정과 해석이 다를 뿐이다.


영화의 배경과 생활 수준이 한국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얘기도 나왔다. 이층 집에 사는 공장 노동자의 삶이 과연 한국에서 가능한가? 미국 원작의 흔적이라 생각해도 쉽게 이해되지 않았다.

15세 관람가임에도 지나치게 잔혹했다는 불만도 있었다. 특히 엄마인 그녀들은 세상의 아이들을 걱정했다. 경험이 부족한 청소년들이 영화 속 대사를 “들키지만 않으면 된다”라는 식으로 받아들일까 두려웠다. 비극을 고발하려던 작품이, 어떤 이에게는 잔혹한 모범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점은 오싹했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기생충〉과 〈서울의 봄〉으로 이어졌다. 관객이 어디에 꽂히느냐에 따라 메시지가 비틀어질 수 있다는 점, 그리고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고발하는 영화가 결국 또 다른 불편함을 낳을 수 있다는 역설. 그걸 알기에 함께 보고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또 보게 되었다.

지난 4주간 셰익스피어의 비극을 읽고 토론하며 인간의 욕망과 나약함을 곱씹었는데, 우연히 개봉 시기가 맞물려 박찬욱의 비극도 함께 보았다. 맥베스 부인이 남편의 욕망을 부추겼듯, 만수 부인은 ‘방해되는 인간들은 죽여버리라’는 말을 농담처럼 내뱉고 자신도 모르게 파국을 밀어붙였다. 욕망을 향해 질주하는 맥베스의 장면과 겹쳐 소름 끼쳤다.

인간의 어리석음, 제도의 허점, 구조적 폭력. 안타깝지만 무대에서 뿐 아니라 현실 곳곳에서 잔인하게 나타난다. 불편했지만, 불편해야만 보이는 진실이 있다. ‘어쩔 수 없다’라는 말은 변명을 암시한다. 그 말을 내뱉는 순간, 주인공은 이미 또 다른 길이 있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무대와 박찬욱의 스크린은 결국 같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정말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걸까. 아니면 제자리를 빙빙 돌고 있는 걸까.




*개봉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영화라 많은 부분을 담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너무 많은 스포일러를 담고 있으면 선택에 방해가 될 것 같았습니다. 마지막 장면이 주는 울림이 크지만 이 정도로 마무리하겠습니다. 직접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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