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그럼에도 한 걸음씩 나아가기를

『율의 시선』김민서

by 발자꾹

지루하고 우중충하게 내리던 비가 그치고 파란 하늘을 보며 가을이 왔다고 느끼는 순간, 강원도에선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갑자기 찾아온 추위에 몸은 움츠러들고 발걸음은 빨라졌다. 구립도서관 2층 문화아지트의 문을 연 순간 반가운 얼굴들이 맞아준다. 다들 갑자기 추워졌다며 짧은 가을을 아쉬워했다. 그런데 갱년기가 막 시작된 그녀는 겉옷을 냉큼 벗고는 반팔 차림에 연신 손부채질을 한다. 이미 수년간 갱년기를 겪어온 선배들은 ‘이 또한 지나가리라’ 미소로 토닥여 주었다.

호르몬 치료제를 먹느냐 마느냐를 두고 잠시 열띤 토론이 이어졌다. “검사받고 조심하면 괜찮다는데.” “아뇨, 처방대로 먹었는데도 부작용이 왔대요.” 각자의 체험이 부닥쳤다. 사람마다 다르니 누구의 말이 옳다 그르다 할 수가 없다.

누군가 갑자기 눈앞에 섬광이 보여 안과에 갔더니 망막에 구멍이 생겼다는 진단을 받고 레이저치료를 받았다고 했다. 그 뒤로 잘 지내고 있다니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쉰다. 나이 들면서 몸 구석구석에서 신호를 보낸다. 안타깝지만 우리 몸은 노화를 겪어내고 있다. 이제는 견디는 법을 배우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다 며칠 전 세상을 떠난 백세희 작가의 이야기로 옮아갔다. 그녀의 나이 서른다섯. 정확한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섯 명에게 장기를 기증했다는 소식에 숙연해졌다. 그녀는 『죽고 싶지만 떡볶이가 먹고 싶어』로 많은 사람들의 아픈 마음을 달래주었다. 세상을 떠나면서도 여러 사람들에게 희망을 안겨주었다. 그녀의 평화를 빌었다.

오늘 그녀들의 이야기에도 죽음이 크게 자리했다. 시작부터 그녀들은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율의 시선』

김민서 창비

주인공 율은 중학교 3학년이다. 어릴 적 자신을 구하려다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게 늘 부채감을 갖고 살아간다. 율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자신이 밉고 또 그걸 지켜본 세상 사람들이 밉고 두렵다. 율은 그 뒤로 사람들의 시선을 피한다. 결국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 사람들의 발을 보며 살아간다. 율은 친구들도 믿지 못한다. 그저 공감하는 척 좋아하는 척하며 겉으로만 친구들을 만든다. 그런 율 앞에 죽은 고양이를 안고 있는 소년 도해가 나타난다.

도해는 율의 가짜 공감을 꿰뚫어 본다. 율은 보통 아이들과 다른 도해를 보고, 자신과 비슷한 아이를 발견했다며 관심을 멈출 수 없다. 도해는 남들의 시선과 기준에 얽매인 율에게 자신의 기준을 가지라고 한다. 율은 도해가 궁금하다. 한여름에도 긴팔을 고집하는 도해가 낭만적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도해는 쓰레기 더미에서 엄마의 폭행을 견디며 살아내고 있었다.

그녀들은 『율의 시선』 곳곳에서 지난주에 함께 했던 『비스킷』을 읽어 냈다. 그중에서도 도해의 한마디는 가슴을 치고 지나갔다.

“내가 보이는 사람은 오랜만이네.”


지난 시절 무수히 지나친 수많은 만남 속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고 존중하고 살아왔을까. 뜨끔했다. 도해는 큰 아픔이 있지만 삶을 사랑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길을 찾으려고 한다. 그래서 “비스킷”처럼 부서지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알아보는 율을 만나지 않았다면 어떤 길을 갔을지 알 수 없다.


율과 도해는 비정상인 취급을 받지만 내면은 누구보다 성숙하다. 누군가는 철학자 같다고 표현했다. 그런데 누군가 말했다. “만약 우리 자식들이 율과 도해 같다면 과연 우리는 이해할 수 있을까?” 다들 고개를 가로저었다. 글에는 율의 시선과 마음이 담겨 있지만 현실에서 우리는 누군가의 행동밖에 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또 이렇게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누며 깊이 생각한다. 판단하기 전에 이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가득하다.

중학교 때 도시에서 전학 온, 늘 혼자 다니던 아이를 떠올린 이도 있었다. 어쩌면 그 아이는 율의 시선으로, 도해의 마음으로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그녀들을 바라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율과 도해 그리고 진욱을 비롯한 아이들을 보며 어른들은 그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행동해야 할지에 대해서도 이야기가 오갔다. 누군가는 제대로 대처하고 개입해야 한다 하고 또 누군가는 바라보고 기다려줘야 한다고 했다. 이 또한 아이마다 처한 상황마다 다르니 정답은 없으리라.


모두의 선망이던 진욱에게도 아픔이 있었다. 아버지의 투자 실패로 집이 기울자, 엄마는 집을 나가고 아버지는 종일 좁은 슈퍼마켓에서 축구 영상만 본다. 진욱은 아버지의 관심을 받으려 축구에 매진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 축구를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진욱의 아버지는 최선을 다했다고 말한다. 그녀들도 각자의 거울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우리는 얼마나 아이들 눈을 바라보고 이야기했을까.”

“난 좋은 엄마가 되겠다고 하면서 아이들이 원하는 엄마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엄마였던 거 같아.”

그러다 잠시 어린 시절로 돌아갔다. 누구는 관심을 받으려 ‘착한 아이’가 되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고 하고, 또 누구는 반대로 엉뚱한 행동을 이어갔다고 털어놓았다. 그런 기억 때문에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이 또 다른 실수였을지 모른다”는 고백을 하는 그녀들은 다시 반성 모드로 돌입했다.

율의 시선은 발끝에서 시작해 서서히 올라가 도해를 따라 하늘을 바라본다. 아버지 기일이 다가오자 율은 다시 방황한다. 봉안당에 함께 가자는 엄마를 외면한다. 그리고 또다시 죽은 아기 고양이를 안고 있는 도해를 만난다. 율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 무기력했던 자신의 삶은 가치 없다며 오열하고, 도해는 세상에 가치 없는 삶은 없다고 맞받아친다. 그리고 그래봤자 세상에서 자신을 이해하고 진짜 도와주려는 사람이 없다는 율에게 말한다.

“네 상처에도 장례를 치러줘.”

둘은 함께 고양이 장례를 치른다. 율은 처음으로 아빠가 잠들어 있는 봉안당을 찾아간다. 오랫동안 미뤄두었던 이별 인사를 하고 나자, 마음 한구석이 뻥 뚫리는 것을 느낀다. 율은 점차 다시 사람들의 눈을 다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그녀들은 자신의 상처를 스스로 어루만지고 한 걸음씩 나가는 율과 도해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자신을 돌보고 나면 주변의 상처에도 눈을 돌리고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에 깊이 공감했다.

그녀들은 도해와 율의 우정이 깊어지면서 서로의 짐을 덜어주고 일사천리 해피엔딩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 점에도 큰 점수를 주었다.

큰비가 내리던 날 사라진 도해는 쓰레기 더미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고, 도해의 엄마는 재판을 받는다. 병원에서 몇 달 동안 깨어나지 못했던 도해는 율이 자신의 소설을 병실에 가져다 놓은 날 다시 사라진다. 그녀들 중 한 명은, 평소에 자신은 다른 별에서 왔다며 언제고 다시 돌아갈 수 있다던 도해가 어린 왕자처럼 세상을 떠날까 봐 두려웠다고 했다.

졸업식 날, 율은 집에 들어서다 자신의 글이 담긴 노트를 발견한다. 노트 뒤에 적힌 글귀에 놀란다.

그럼에도 새는 또다시 날아 보기로 했다.

율은 도해가 다녀갔음에 안도한다.

인간은 나약하다. 너무 쉽게 부서지고 무너진다.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숨기며 끊임없이 상처를 입는다. 하지만 그렇게 부서지고 무너지면서 강인해진다. 모순적이었다.
모순적이기에 인간은, 삶은 매력적인 것이었다.
216

그녀들은 김민서 작가가 2000년 생이라는 사실에 놀랐다. 얼마나 큰 아픔을 겪었기에 글이 이렇게 깊을까 안타까웠지만, 그 아픔이 이렇게 글로 다시 태어나 많은 이들을 다독여 줄 수 있음에 감사했다. 세상에 많은 율과 도해가 자신의 가치를 깨닫고 스스로 보듬으며 조금씩 나가길 바랐다.


*다음 주 10월 28일에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면 사랑할 수밖에 없는 "책 좀 빌려 줄래?"를 읽고 이야기 나눕니다.



#화요일의그녀들

#율의시선

#아픔

#자기돌봄

#함께

keyword
이전 12화더 이상 부서지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