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좀 빌려 줄래?』
아직 10월이 다 가지도 않았는데 새벽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다. 도서관 2층 문화아지트의 문이 열리자, 하나둘 익숙한 얼굴들이 들어선다. 누군가 옷깃을 여미며 “이젠 진짜 춥다. 아직 10월인데.” 하며 아쉬워한다.
요즘 그녀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부모님 이야기로 시작된다.
“시아버님이 평소 당뇨가 있으셨는데 약 부작용으로 저혈당이 와서 정말 큰일 날 뻔했어요.”
119가 출동하고 결국 입원하셨단다.
“우리 아버님은 전립선 수술하셨는데 다시 소변에 문제가 생겨 입원하셨어요.”
안타까운 마음이 가득하다. 그래도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만큼은 고단함도 잠시 멈춘다.
커다란 가방을 든 큰언니가 들어왔다. 찹쌀에 늙은 호박과 단팥을 넣은 호박범벅이 가득 든 통을 내려놓으며,
“우리 동생들 생각나서 쑤었어.”
그 말 한마디에 모두의 얼굴이 밝아졌다.
“역시 최고야!”
가을 내내 체험학습 때문에 바쁘다는 그녀가 모처럼 찾아와 귤 한 팩을 내려놓으며 환하게 웃는다.
이에 질세라 커피 향을 풍기며 들어온 막내에게 발자꾹 그녀가 말한다.
“속이 약해서 끊었는데 또 마시네. 커피는 요물이야.”
“우린 중독자지.”
웃음이 번진다.
*오늘은 얘기에 빠져 먹거리 사진을 깜빡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오늘의 책은 멈출 수 없는 책 읽기의 즐거움이란 가제가 붙은 — 『책 좀 빌려 줄래?』
(원제: I Will Judge You by Your Bookshelf)
나는 책에 단단히 빠졌어.
남들 앞에서도 책을 읽어.
무슨 물건이든 책갈피로 써.
글 안 써지는 병의 특효약을 찾아 헤매고 있어.
글을 쓰지 않으면 못 살아.
그래서 말인데… 책 좀 빌려줄래?
카툰 형식이라 줄글에 익숙한 그녀들은 익숙해 지는데 시간이 걸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표정이 살아 있는 그림과 생각 거리가 넘쳐 읽는 내내 서로를 떠올리며 행복했다고 털어놓았다.
“비 오는 날 책에만 우산을 씌운 장면에서 이미 책 사랑이 느껴졌어요.”
“마지막 장의 단풍 숲에서 책 읽는 그림도 좋았어요.”
작가 그랜트 스나이더는 치과의사다.
“이렇게 잘 쓰면 전업 작가들은 뭐 먹고살지?”
농담 섞인 말에 웃음이 터졌다.
<독서가의 변천 단계>
책을 만나고, 빠지고, 동일시하고, 책이 인간관계를 대신하고, 글을 쓰다 책에 데이고,
책을 등졌다가 다시 돌아와 책을 사 모으고, 결국 다음 세대에 물려주는 사람들.
저마다 다른 단계에 있는 그녀들. 누군가 책을 등진 적이 없다 자랑스럽게 말했다. 그런데, 누군가는 퇴고하다 책을 미워할 뻔했다고 고백했다. 그래도 여전히 책을 사랑하는 마음은 가득해 보였다.
작가는 <타인의 책장>을 염탐하기 좋아하면서 자신의 책장은 보여주기 싫어한다. 그녀들 모두 다른 집에 가면 자기도 몰래 책장을 들여다본다고 털어놓았다. 하지만 역시 내 책장은 보여 주기 싫다고 했다.
그녀들의 <책을 즐겨 읽는 장소>는 각양각색이었다.
“밤에 침대에서 핸드폰 불빛 켜놓고 읽어요.”
“나는 무조건 책상 앞 의자. 침대는 불편해서.”
“헬스장에서 뛰면서도 책 본 적 있어요.”
그 한마디에 모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책갈피> 얘기는 더 기가 막혔다.
“옷 태그, 영수증, 심지어 머리카락까지 써봤어요.”
“와, 그건 좀 무섭다.”
그녀들은 작가가 말한 것처럼, 책을 읽다 옆에 있는 건 무엇이든지 책갈피가 된다고 했다. 웃음이 터졌다.
<나는 도서관 연체료 미납자로 수배 중이야>
미국이라는 부자 나라에서 연체료를 받는다는 것이 이상하다는 그녀들. 미국은 주별로 법이 다르니까 그런 걸까? 그래도 그녀들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차라리 우리처럼 대출 기간이 제한되는 것이 낫다며, 연체료가 있다면 가뜩이나 부족한 독서 인구가 뚝 떨어질까 걱정하는 그녀들.
결혼 전엔 밤새 책을 읽는 게 다반사였지만 아이들 키우면서 그런 일은 상상할 수 없었다는 말에 모두 공감했다. 하지만 아주 가끔 스릴 넘치는 책을 읽다가 식구들이 모두 잠든 주말 밤 올빼미가 되기도 했다. 『궁극의 아이』『나미야 잡화점의 기억』.
20년을 함께 했지만 그녀들의 <독서유형>은 조금씩 달랐다. 누군가는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연극형이라 했고, 누구는 여전히 한쪽을 고집하는 편독형이라 했다. 또 누구는 밤에만 눈이 반짝이는 야행형이라 했고, 또 다른 누구는 한 권을 읽으려고 영화도 보고 관련 책들을 수 없이 펼쳐본 적 있다며 자신을 준비과다형이라 수줍게 말했다.
<나는 글 안 써지는 병의 특효약을 찾고 있어>에서 투고한 원고를 퇴고 중인 그녀가 격하게 공감했다. 사실 특효약은 없다는 걸 알면서도...
“∧표시가 콧수염 달기라니, 우리는 한쪽 눈 찡긋 감은 눈웃음인데.” 문화의 차이도 재미있게 받아들였다.
<나는 고전을 읽고 말 거야(언젠가는)>에선 『화씨 451』 , 『시간의 주름』,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를 읽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렇게 그녀들의 새로운 책 목록에 세 권이 추가되었다.
예전 그녀들은 한 권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지만, 이젠 여러 권을 동시에 읽어도 괜찮다. 20년 세월의 독서 모임이 만든 내공이랄까.
작가는 말한다.
“완벽한 책도, 완벽한 생각도 없다.
완벽한 것은 없다. 그저 시작해 보자.”
“JUST DO IT!”
누군가 외치자 모두가 웃었다.
오랜만에 즐겁게 편안한 마음으로 책과 대화를 나눴다. 나를 들여다보고 또 서로 마주 보았다.
책 한 권이 닫히면, 또 다른 책의 표지가 열린다.
“이야기의 끝은, 또 다른 이야기의 시작이니까.”
*다음 주부터 3주 동안, 복잡다단한 현대사의 아픈 한 자락을 만납니다.
인혁당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다시, 봄은 왔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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