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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다시, 봄은 왔으나』

by 발자꾹

11월의 첫 화요일.

찬 바람이 매섭게 불었지만, 그녀들은 다시 구립도서관 2층 문화 아지트의 문을 열며 하나둘 모습을 보였다.

그림도 잘 그리고 손재주가 남다른 대표 그녀가 정성껏 수놓은 작품을 꺼냈다. 로즈메리 레몬그라스 클로버 등 갖가지 허브와 꽃이 화려하게 수놓인 천이 모두의 눈길을 끌었다. 액자를 만들겠다는 그녀의 말에 모두 두 손 모아 물개박수를 보냈다. 누군가는 사과를 또 다른 누군가는 단감을 곱게 깎아 통에 담아왔다. 단감의 달큼한 냄새와 사과에서 풍기는 새콤한 향내가 떠나는 가을을 물씬 느끼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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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동안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던 큰 언니 그녀는 농부와 소비자 모두에게 이로운 지속 가능 농법으로 재배한 카카오 쿠키와 초콜릿을 내밀었다. 막내가 가져온 커피 한 모금에 분위기는 더 화기애애해졌다. 이야기를 들으며 함께 가우디와 성가족 성당, 세비야, 몬세랏 수녀원을 다녀온 것 같았다. 아쉽지만 어느덧 책 이야기를 나눌 시간이 되었다.




오늘 그녀들은 4.9 재단 이창훈 씨가 펴낸 『다시, 봄은 왔으나』를 다시 펼쳤다.


억울하게 사형당한 여덟 분과 그 가족들이 진짜 봄을 기다리는 이야기, 그 두 번째 시간이다.

오늘은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선생의 삶을 함께 읽고 나눴다. 세 사람의 삶은 저마다의 달랐지만 결은 같았다. 가족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고,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인간의 양심을 지키려 무진 애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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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상진 선생은 1928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그는 초등학교 교사였고,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사람이었다. 교사직을 그만두고 사회에 참여하는 시민으로 세상의 불의에 맞섰으나 그는 꿈을 펼칠 수 없었다. 세상과 떨어져 양봉업자로 생계를 꾸려갔지만, 그는 세상의 끈을 놓을 수가 없었다. 유신체제는 민주주의와 통일에 대한 그의 열망을 ‘적’으로 규정했다.


부인 김진생 여사는 40대 중반에 남편을 잃고, 사람들의 차가운 눈길을 견디며 삯바느질로 자식들을 키워냈다. ‘남편의 성실함’이 자신을 버티게 했다는 말이 그녀들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또한 아버지의 결백을 전하고자 절절한 마음을 담아 대통령에게 편지를 쓰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 편지는 이천 민주화 공원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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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원일은 소설 『푸른 혼』에서 여덟 분의 삶을 연작으로 담아냈다. 그중 「팔공산」 편에서 선생의 삶을 다루고 있다. 작가 김원일의 부친 김종표는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로 해방 후 월북했다. 벌들의 세계를 해석하며 그보다 못한 인간 세상을 한탄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김원일의 부친 김종표는 일제강점기 사회주의 독립운동가였으며 해방 후 월북했다. 그 역시 그 모진 세월을 살아내기에 힘겨웠다. 그 가족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소설로나마 그들의 아픔을 풀어내려고 했다.


송상진 선생의 둘째 아들 송철환 씨가 무고한 아버지를 풀어달라고 당시 박정희 대통령에게 쓴 편지가 이천 민주화운동기념공원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 자 한 자 마음을 담아 꾹꾹 눌러썼을 중학교 3학년 아들의 마음이 자꾸 가슴께를 누른다.


각하, 저희 아버지는 결코 그러한 인물이 아닐 것입니다. 저희 가정에도 행복이 찾아올 수 있도록 각하께서 돌보아주신다면 저는 조국의 한 민주시민으로서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각하께서 어버이의 은혜로 보살펴주십시오. 만국민이 모두 행복하게 웃으며 내일의 영광의 조국의 발전을 볼 수 있게 바쁜 시간이나마 저희들의 아픈 가슴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
1974. 11.13 송철환



우홍선 선생은 1930년 경남 언양 출신이다.

6·25 전쟁 중 군에 입대해 치열하게 싸웠지만, 전쟁이 끝난 후 평화 통일의 길을 찾아 나섰다.

그는 통일과 민주주의를 꿈꾸며 통일민주청년동맹(통민청)에서 활동하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문했지만, 공산주의자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 정보부는 고문으로 사건을 만들었다.


부인 강순희 여사는 분을 참지 못하고 남편의 무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정보부에서는 남편들이 재판을 받는 중에 부인들도 끌고 갔다. 남편을 풀려나게 하고 싶으면 공산주의자라고 시인하라고 윽박지르는 요원들에게 여사는 도리어 정보부가 떠나가라 남편의 무죄를 외쳤다.


한편, 박정희 정권의 언론탄압으로 동아일보에 광고가 사라지자,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격려 광고를 보냈다. 강순희 여사도 남편의 억울함을 호소하며 광고에 동참했다.


여보, 그동안 얼마나 고생이 많으십니까. 그 어느 때와도 변함없이 진심으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들이 당한 인권유린과 억울함, 이 모든 감당하기 어려운 정신과 육체의 고통을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겨나갑시다. 안정과 평안이 보장된 내일을 고대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오늘을 불만 없이 누리며 살아갑시다.
1975년 2월 8일 세칭 인혁당관계로 사형선고를 받은 우홍선 피고인의 아내 강순희 올림


하재완 선생은 창녕 출신으로, 독립운동가 하은호·하영규 선생의 후손이다.

청년 시절 그는 친구 전두환과 함께 대구공업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대구공업중학교는 친일파를 타도하고 규탄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재완도 그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다. 친구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그 분위기에 휘둘려 좌절과 분노를 느꼈다고 기술했다. 학창 시절 절친이었던 두 사람은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갔다.

하재완은 사월혁명 때 다친 학생을 돕기 위해 자신의 가구 살 돈을 내놓았다. 앞선 분들과 마찬가지로 통일과 민주 세상을 꿈꾸며 활동하다 인혁당 사건으로 구속되고 고문당했다. 선생은 당시 “오적”으로 유명한 민중 시인 김지하와 교도관 몰래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김지하는 그들의 억울함을 깨닫고 감옥에서 나와 김지하는 동아일보에 “고행…1974”를 실어 조작된 사건을 온 세상에 폭로했다. 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부인들뿐 아니라 자녀들의 고통도 컸다. 그중에서도 하재완 선생 아이들의 고통은 읽는 이들의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늘 함께 놀던 친구들이 ‘빨갱이 자식’이라며 소풍날 도시락에 개미를 넣기도 하고, 네 살짜리 아이를 마을 당산나무에 묶어 놓기도 했다. 그런데도 말리는 어른이 하나도 없었다는 게 더 답답한 현실이었다.



그녀들은 책을 덮고 하나같이 그동안 너무 몰라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분들의 희생으로 민주주의에 한 걸음 다가섰음을 이제야 알았다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리고 책임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부산에서 자란 누군가는 어린 시절 “늘 입 다물고 조용히 살아라.”하고 말하던 아버지가 생각난다고 했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살아낸 모두가 겪어낸 공포가 다시 살아나는 것 같았다.

고문의 흔적을 감추려고 송상진 선생의 시신을 빼돌리려는 경찰들과 그들을 막아선 이소선 여사와 정의구현사제단의 문정현 신부. 그들을 막아서다 문정현 신부는 크레인에 올랐다가 떨어져 평생 지팡이를 짚고 살아야 했다. 그 부분에서 그녀들은 또 한참을 먹먹하게 앉아 있었다.

“고문을 얘기하니 영화"남영동 1985 "가 생각나요.”

“고통스러워하던 김근태 의원이 떠올라 가슴 아프네요.”

“그분들의 고통과 희생으로 우리가 민주주의 세상에서 살고 있는데 자꾸 잊어버리네요.”

그저 엄마였고, 자식이 전부였던 그녀들이 책을 읽고 토론하며 깨어난다. 미래를 걱정하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를 매번 진지하게 고민한다.

*다음 시간에는 『다시, 봄은 왔으나』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간이다.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선생의 삶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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