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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사상 암흑의 날

『다시, 봄은 왔으나』그 첫 번째

by 발자꾹

지난 주말 ‘한파주의보’에 놀랐다가 살짝 추위가 누그러진 화요일 오전 그녀들이 다시 모였다.


갑자기 찾아온 영하의 추위에 허둥지둥 코트와 패딩을 꺼내 입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는 그녀들. 지난 주말 필라테스 시간에 늦어 상가 계단을 뛰어오르다 층계참에서 웅크리고 자는 사람에 놀란 그녀, 오랜만에 가족과 골프를 즐겼다는 그녀, 다가올 감사에 정신없이 바빴다는 그녀, 당뇨 쇼크로 입원했다 퇴원하신 시아버지를 간병하느라 바빴다는 그녀. 조용히 유럽 여행을 떠난 큰 언니의 부재를 아쉬워하며 오랜만에 즐기고 오기를 바라는 마음 가득했던 그녀들.

날씨 이야기가 끝나자, 물가 얘기가 이어졌다. 냉동실에 고이 모셔뒀던 떡으로 궁중떡볶이를 해 가족들과 즐겼다는 얘기에 다들 환호했다.

그리고 10월 마지막 주, 대한민국과 전 세계를 들썩이게 한 APEC 정상 회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어느 나라 어느 강대국에도 뒤지지 않고 당당하게 선 대한민국 정부와 경제인들. 연일 오른 주가에 주식을 하든 안 하든 우리 경제와 정치 모두에 청신호가 켜졌다고 좋아했다.

하지만 곧 이어진 대화 때문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충암고 축제에서 충암고 출신 래퍼가 ‘윤 어게인’을 외쳐 물의를 일으킨 사건이 화제로 올라왔다.

“아직도 그날의 두려움이 생생한데‥.”

“그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라 역사를 부정하는 말이지.”

그녀들은 분노보다 안타까움과 슬픔이 밀려들었다. 민주주의를 위해 목숨 걸었던 이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자유가 있는 것인데, 그 희생이 너무 쉽게 잊히고 있다.

그래서 오늘의 책이 더 깊게 다가왔다.


『다시, 봄은 왔으나』

인혁당 재건위 사건 사형수 8인의 약전


역사에 관심이 많은 그녀들은 불편한 현대사의 한 자락을 함께 짚어 보기로 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 인혁당 재건위 사건을 전체적으로 짚어 보고 서도원 선생과 도예종 선생의 삶을 살펴보기로 했다.

1975년 4월 8일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되고, 18시간 뒤인 4월 9일 새벽 8명 모두 사형당했다. 국제법학자협회는 그날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규정하였다.

그녀들은 우선 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애쓴 분들에게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을 나눴다.

부패한 정권을 몰아낸 4·19 혁명, 그러나 무능했던 2 공화국, 그 틈을 타 1961년 5·16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그리고 1972년 유신헌법을 만들어 영구 집권을 꾀하던 시절.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학생과 시민들이 연이어 잡혀갔다. 정부에서는 긴급조치를 발동하고 정부에 반대하는 시민들을 사형할 수 있도록 했다. 그 속에서 ‘인민혁명당 재건위 사건’이 만들어졌다. 정부는 반정부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 그리고 정부에 반대하는 민청학련(전국민주청년학생 총연맹)을 사주했다는 혐의로 서도원 도예종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여덟 명을 사형 선고했다. 그리고 선고 다음 날 새벽, 판결문 잉크가 다 마르기도 전에 형이 집행되었다. 그들에게 다시는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끊임없는 진실규명운동을 통해, 2007년 1월 23일 재심을 통해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동안 속으로만 울부짖던 가족들은 오열하고, 드디어 민주주의에 한발 더 나갔다며 시민사회는 박수를 보냈다. 어느새 50년 세월이 흘렀다. 50주기 기념식은 뜻깊게도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열렸다. 그 어느 때 보다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다시 서는 민주주의를 크게 외쳤다.



이제는 어디에서나 그들의 이름을 크게 부를 수 있지만, 그분들을 다시 만날 수는 없다. 그분들이 꿈꾸던 평화통일의 길도 여전히 아득하다.


그녀들은 누구도 쉽게 말을 시작하지 못했다.

“그런데 여덟 분 모두 경상도 분이래요.”


보수의 심장이라 불리는 그곳에서 그들 모두 자유와 정의 민주를 위해 싸웠다니 모두 놀랐다. 그리고 지난 역사를 돌아봤다. 1956년 대구에서 진보주의자 조봉암이 70% 넘는 지지를 받았던 일, 1960년 3·15 마산항쟁보다 앞선 2·28 학생 의거, 일제강점기의 국채보상운동까지…. 대구 경북은 처음부터 보수의 심장이 아니었다. 그녀들은 그들이 깨어나기를 간절히 바랐다.


서도원 선생은 경남 창녕 출생으로 언론인이었고 교육자였으며 투철한 민주 의식을 가지고 사회운동에 참여했다. 총 대신 펜을 들었고, 진실을 쓰고 전하다 처형당했다. 누구보다 가정적이고, 손재주가 남달랐던 그. 그는 평화를 꿈꾸는 사람이었다.


서도원은 한평생 분단을 해소하고 평화적인 남북통일을 위해 투쟁하였다. 그가 떠난 지 올해로 반세기가 흘렀다. 그사이 원흉 박정희도 비명에 가고, 군사정권도 무너지고, 정치권력은 직선제에 의해 5년마다 국민의 심판을 받아 한편으로 같은 정권이 유지되기도 하고 여야가 바뀌어 새로운 정권이 들어서기도 했다. 덕분에 그를 사형대에 세운 법원의 판결은 재심을 통해 무죄로 바뀌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아직도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그가 죽음으로 이루고자 했던 꿈을 알기에 우리들의 가슴은 더욱 아파온다. -92쪽

도예종 선생은 경주 출신으로 교육자가 되길 꿈꿨으나 이루지 못했다. 교육감에 당선되고도 발령되지 못하고 결국 사회진보운동가가 되었다. 그의 삶의 궤적이 안중근 의사의 사촌 안경근과 맞닿아 있다는 대목에서 그녀들은 숙연해졌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이 이렇게 이어져 있었구나.”


도예종은 교육자로서의 꿈을 키웠으나, 사월혁명과 박정희 군사통치를 겪으면서 사회진보운동가로 성장한 인물이었다. 그의 꿈과 희망의 크기를 지금 우리가 가늠할 수 없으나, 지금의 사회진보운동의 과제와 도예종의 지향이 일치했다는 점은 확인할 수 있다.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는 ‘도예종의 진실 찾기’는 향후 우리나라 사회진보운동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데 큰 기여를 할 것이라고 본다. -153쪽


그녀들은 그 많은 단체와 활동 상황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땅의 민주주의를 위해 그분들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갔을지 아프게 느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누군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버지가 사촌이 월북했다는 이유로 경찰이 되지 못했어요. 그때 연좌제가 있었잖아요. 살아계셨을 때 더 여쭤볼 걸 그랬어요.”


그녀의 말에 아쉬움과 안타까움이 짙게 묻어났다.

2025년,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25년이 되었지만 우린 여전히 색깔론에 갇혀 있다. ‘인민’이라는 말도, ‘동무’라는 말도 마음대로 쓰지 못한다. 스스로 검열하고, 스스로 침묵한다.

불편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이름들, 그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우리가 있다.

그 마음을 안고 일상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다음 주에는 송상진 우홍선 하재완 님의 삶을 살펴보기로 합니다.


*2026년 6월 30일까지 이천민주화공원에서 "겨울공화국" 특별 전시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의 참여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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