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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을 일깨운 그해 봄의 아픈 역사

인혁당 재건위 사건 약전집 『다시, 봄은 왔으나』

by 발자꾹

엊그제까지만 해도 늦가을 단풍을 자랑하던 나무들이 어느새 가지만 남아 앙상하다. 저마다 겨울을 보내겠다고 나뭇잎들을 다 떨궈버렸다. 무채색 거리에 칼바람이 분다. 우리들은 그 바람을 피해 도서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연방 ‘춥다’라는 말을 내뱉는다.


“춥다, 추워. 진짜 겨울인가 봐!”

“벌써 11월도 하순이 다 됐는걸.”

연로하신 부모님과 시부모님의 밤새 안녕을 묻는 일은 이제 의식처럼 매주 이어진다. 이번 주는 다행히 큰 탈 없이 지나갔다는 소식에 모두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가오는 주말에 짧은 여행을 떠난다는 두 사람에게, 우리는 “가을을 꼭 붙들고 실컷 즐기고 오라”고 말하며 다 같이 떠나는 것처럼 좋아했다.

오늘도 탁자 위에는 간식거리가 가득하다. 명인이 만들었다는 한과는 입안에서 사르르 녹고, 일본 여행을 다녀온 지인이 건넸다는 초콜릿은 쌉쌀한 커피 맛을 더 깊게 해 주었다. 병아리콩과 요거트, 견과는 몸에 좋으니, 하나라도 더 먹으라고 서로 야단이다. 우리는 오늘도 이렇게 화요일 아침을 열고 서로를 맞이한다.


인혁당 재건위 사건 약전집 『다시, 봄은 왔으나』

1970년대 군사정권의 폭압 아래 공산주의 지하조직으로 조작된 인혁당 재건위 사건. 대법원 판결이 난지 스무 시간이 채 되지 않아 사형장으로 끌려간 여덟 분, 그리고 애도할 틈도 없이 ‘빨갱이 가족’으로 숨죽여 지내야 했던 이들의 가슴 저린 삶의 나날들.

오늘은 그 약전을 읽는 세 번째이자 마지막 시간이다. 우리는 이수병, 김용원 여정남 선생이 불의한 시대에 맞서 싸우며, 희망찬 미래를 꿈꾸었던 순간들을 함께 헤아려 보았다.

불의에 정면으로 맞선 혁명가, 이수병

이수병 선생은 1937년 경남 의령에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똑똑하고 곧은 성품을 알아본 주변의 도움으로 학업을 이어갔다. 부산사범학교를 다니며 부산 지역 고등학생들과 사회과학 서클 “암장”을 결성했다. 신흥대(현 경희대)에 들어가서는 민족통일연구회를 결성하고 활동을 넓혀갔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이 땅이 뉘 땅인데 오도 가도 못하느냐!”

쿠데타 세력은 그를 ‘친북 용공 불온 분자’로 낙인찍었다. 영구 집권을 꿈꾸던 박정희 정권의 감시 속에서도, 늘 호탕하게 웃으며 “밝은 세상”을 꿈꾸었던 이수병 선생. 그는 그 꿈을 펼칠 기회를 영영 빼앗기고 말았다.

단단한 의리파 지식인, 김용원

김용원 선생은 1935년 일본 교토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에 ‘조센징’이라 놀림받으면서도, 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부산고등학교 시절 “암장” 친구들과 교류했으며 이수병 선생과 깊은 인연을 맺는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를 통해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한다. 이수병 선생이 ‘불의에 맞서는 혁명가’였다면, 김용원 선생은 ‘양심적인 지식인’이었다.

“김용원은 친일파적인 요소가 있으면 용납을 안 해. 박정희 지지하고 그러면 용납 안 해.”

-인혁당재건위사건으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던 김종대 인터뷰


선생은 1974년 수감될 때까지 학생들에게 존경받던 훌륭한 교사였다. 그는 혁신계 인사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꿨지만 끝내 이루지 못했다.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젊은 혁명가. 여정남

여정남 선생은 1944년 대구에서 태어났다. 고등학생 시절 4·19 혁명과 5·16 쿠데타를 겪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의 열기로 뜨거웠던 대구에서 자란 그는 열정이 넘쳤다. 그는 1975년, 생이 끝날 때까지 감옥에 들고 나기를 반복하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여정남 선생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늘 호쾌하게 말했다.

“우리는 할 수 있다.
그놈들이라고 별거 있겠냐?”


긍정의 아이콘으로 주변을 환하게 비추던 그였지만 결국 서른한 살의 나이로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김용원 선생의 부인 유승옥 여사는 남편의 구명운동을 하다 정보부에 끌려갔다. ‘남편이 “공산주의자임을 인정하라’는 강요 속에 그들이 내민 물을 마시고 환각 상태에 빠진다. 너무나 수치스러워 아이들과 함께 쥐약을 먹고 죽으려 했다. 이수병 선생의 부인 이정숙 여사는 돌 지난 막내를 업고 날마다 서대문형무소로 향했다. 그 모습을 안타깝게 여긴 교도관 덕에 멀리서 아주 잠깐 그저 남편을 바라보았다. 그림으로도 글로도 다 담을 수 없었을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야기에 누군가 눈물을 훔쳤다. 그리고 갓 서른을 넘긴 여정남 선생의 죽음 앞에서, 엄마인 그녀들은 그저 말없이 속으로 흐느꼈다.

누군가 박건웅 작가의 작품 『그해 봄』을 꺼냈다. 작가는 여덟 분의 가족들과 인터뷰를 통해 그들이 겪었던 아픔을 글과 그림으로 절절하게 그려냈다. 갑자기 아버지와 남편 그리고 아들을 잃은 사람들. 빨갱이라는 세 글자에 갇혀 제대로 고인을 추모하기는커녕 고슴도치가 되어 서로를 할퀴어야 했던 시간들. 재심으로 여덟 분의 무죄가 확정될 때까지 웃음을 거두어야 했던 사람들. 그들의 소원은 거창한 민주주의도 통일도 아니었다. 그저 남편과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지내는 평범한 하루였다.

우리가 마주한 기억들

저마다 70~80년대를 살았던 기억을 떠올렸다.

누군가는 부마항쟁을 자랑스럽게 떠올렸고 또 누군가는 동인천 시위 현장에서 엄청난 인파를 보고 놀랐던 기억을 얘기했다. 누군가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사열했던 경험을, 누군가는 중고교 시절 교련 시간을. 또 다른 이는 반공 포스터에 뿔 달린 사람을 그리던 기억까지 소환했다.

2007년 1월 23일, 재심을 통해 여덟 분은 무죄를 선고받았다. 재심을 맡았던 김형태 변호사는 그 판결의 역사적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① 민주평화 통일운동의 결실

② 냉전체제 극복의 시발점

③ 유신체제의 위헌성에 대한 사법적 판단

④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한 자성

⑤ 과거청산의 전환

재심을 통해 국가의 폭력이 드러나고 희생자들의 무죄가 입증된 사실은 역사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그러나 그분들은 돌아올 수 없고 가족들의 고통 또한 되돌릴 수 없다. “앞으로 다시는 반복되면 안 되는 일이야.” 누군가 나직이 말했다.

누군가의 피와 땀으로 이루어진 민주 세상. 우리는 그 세상을 공기처럼 편하게 누려왔다. 그러다 지난 2024년 12월 3일, 다시 계엄령을 내건 그 밤 이야기가 이어졌다. 숨 막히던 그 순간들, 밤새 뜬눈으로 뒤척여야 했던 그때를 돌이키며 저마다 가슴을 쓸어내렸다. 우리가 평화롭게 이야기 나누는 이 시간 역시, 그 밤 모두가 간절히 바라고 애써 지켜낸 민주주의 덕이라는 걸 다시 일깨웠다.

3주 동안 아픈 현대사를 마주하면서 마음은 무거웠지만 머리는 맑아졌다. 도서관 문을 나서면서 우리는 다시 되뇌었다.


“잊지 말자. 잊지 말자.”


#다시봄은왔으나

#사법살인

#민주주의

#화요일의그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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