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사』
오늘은 12월 첫 모임!
달력은 마지막 장만 덩그러니 남았고, 찬 바람이 종아리를 파고든다. 롱패딩의 지퍼를 끝까지 올렸지만, 몸은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사람들은 추위를 견디기 위해 옷을 겹겹이 껴입지만, 나무는 반대로 잎들을 떨궈 몸통만 남긴 채 겨울을 버틴다. 올해는 유난히 더위가 길었던 탓인지, 제때 낙엽을 떨구지 못한 나무들이 겨울을 맞았는데도 나뭇잎들을 껴안고 찬바람에 떨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이 왠지 안쓰러웠다.
길을 걷는데 갑자기 무언가 바람에 날렸다. 눈이 오나 싶었는데, 가까이 보니 갈색과 누런빛이 뒤섞인 마른 잎들이었다. 제때 떨어지지 못하고 말라붙어있던 잎들이 힘을 잃고 바스락거리며 공중을 떠다녔다. 너무 말라 가루처럼 부스러진 잎들이 머리카락과 뺨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건널목에 멈춰 서있던 친구가 뒤에 오던 나를 알아보고 손을 흔들었다. 반가워 걸음을 재촉해서 옆으로 다가섰다.
“잠깐만.”
하고는 친구가 머리카락에 붙은 낙엽 부스러기를 떼어주었다. 우리는 서로 바라보고 무에 좋은지 깔깔대며 웃었다. 책 모임 가는 길에 지난 주말 이야기를 나누며 또 웃었다.
오늘 모임 참석자는 다섯 명이다. 누군가 갑작스럽게 아르바이트가 생겼고, 또 누군가는 겨울맞이 여행을 떠났다. 빈자리가 아쉬웠지만 다음 주에 그네들이 펼쳐줄 이야기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며칠 전 송년회에서 다 나누지 못한 선물 꾸러미들을 펼쳐놓고 작은 잔치를 벌였다. 겨우내 신을 포근한 양말과 실내화, 이젠 필수품이 된 텀블러를 위한 작은 가방, 책 읽는 이들에게 꼭 필요한 책갈피. 그날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따로 챙겨두었던 마음이 탁자 위에 포근히 쌓였다. 막내가 정성껏 내려온 콜드브루 커피가 따뜻한 분위기를 갈무리했다. 한 모금 마시며 모두 환하게 웃었다.
12월 첫째 주라 그런지 다들 김장김치에 열을 올렸다. 제주까지 알타리를 보내준 엄마의 정성을 달가워하지 않는 딸 이야기에는 모두 서운해했고, 잇몸이 약해 김치를 씹지 못하는 아버지 얘기엔 모두가 마음 아파했다.
김장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었다. 여전히 배추를 절이고 양념을 하나하나 준비하는 이도 있지만, 절인 배추와 양념을 공동구매로 사서 버무린다는 이도 있고, 무채를 썰다 채칼에 베인 뒤로 김장김치를 사서 먹는다는 이도 있다. 김장하는 방식은 가지각색이지만, 추위가 닥치면 김장이 화두인 건 여전하다. 사는 방식은 달라졌지만 10년 전 이맘때도 지금의 그녀들도 비슷하게 겨울을 맞이한다.
오늘부터 그녀들은 유시민 작가의 『역사의 역사』를 4회에 걸쳐 함께 읽기로 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사마천을 만난다.
“역사란 무엇인가?”
작가는 서문에서, 숱한 역사가들이 역사에 대해 정의를 내려왔지만, 아직은 모두의 동의를 얻을 수 있는 답이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그 해답의 실마리를 찾기 위해, 각 시대의 역사가들을 불러내 ‘역사를, 어떤 시선으로 무엇을 중심으로 또 어떻게 기록해 왔는가?’라고 질문하며 탐색하기 시작한다.
그녀들도 같은 질문으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역사란 무엇인가?”
누군가는 살아온 이야기라고 했고, 누군가는 삶의 기록이라고 했다. 또 누군가는 지루하게 반복되지만 아주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는 삶의 발자취라고 했다.
“우연히 작년 이맘때 쓴 글을 봤는데, 지금의 나와 별로 다르지 않더라고요.”라고 그녀들의 살림꾼 그녀가 말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움찔했다. 바로 1년 전, 그 엄혹했던 ‘12.3 계엄 사태’가 훅 다가왔기 때문이다. 역사를 뒤로 돌리려던 무도한 무리에 맞서 깨어있는 시민들이 지켜낸 그 밤. 찬 겨울에서 봄까지 이어진 광장의 빛의 행렬. 수많은 역사서를 읽지 않았어도, 그녀들은 그날 밤 그 순간을 통해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온몸으로 배웠다.
유시민 작가가 안내한 『역사』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동안 알고 있던 사실과는 사뭇 달랐다.
“역사”라는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 헤로도토스. 그의 기록에는 설화가 많아서 비판받기도 하지만, 문서도 자료도 드물었던 시대에 발로 뛰며 최대한 사료를 모아 그리스와 주변 국가들의 문화와 풍습까지 기록한 그의 공로를 인정하자는 작가의 말에 그녀들도 동의했다.
그녀들은 학창 시절 『역사』를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괴물’ 같은 페르시아를 물리친 단순한 전쟁사로 배웠지만, 유시민 작가를 통해 알게 된 『역사』는 아홉 권에 달하는 방대한 ‘세계사’였다.
특히 이집트 기록에서
“여자들이 시장에 나가 장사를 하고, 남자들은 집안에서 베를 짠다.”
라는 구절을 보고 모두 눈이 반짝였다. 지금껏 "History"만 배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무도 오랜동안 남자 중심의 역사가 익숙하다 보니 이런 작은 일에도 놀란다. 지금은 남자도 여자도 아닌 '인간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와 달리 전쟁에 직접 참여한 역사가다. 헤로도토스와는 달리 감정이나 신화는 최대한 배제하고 권력을 향한 인간의 욕망이 충돌하는 장면을 기록했다. 그녀들은 그가 남긴 기록을 보면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떠올렸다. 그가 남긴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덕분에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치른 전쟁의 본질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전쟁의 승패를 가른 것이 힘의 우위라기보다 실은 전염병이었다는 사실에 모두 놀랐다.
유시만 작가는 페르시아 전쟁과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통해 전쟁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배웠다고 말한다. 두 전쟁 모두 미개하거나 인간의 지적 능력이 부족해서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의 능력과 사회 조직 사이의 조화가 깨질 때, 다시 말해 충분히 능력이 있음에도 권력의 욕심을 드러낼 때 언제든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이러한 사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사실과 역사 고증을 중점으로 두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기록은 랑케와 토인비가 이어받았고, 서사를 중심으로 한 헤로도토스의 방법은 재레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가 따랐다. 어느 한쪽이 옳다고 하기는 어렵다. 유시민 작가의 말처럼 역사는 사실 기록도 중요하지만, 삶의 이야기가 어우러져야 한다. 순간의 기록을 적나라하게 남길 수 있는 현대사회에서도 인간은 마음만 먹으면 역사를 역사가 왜곡하고 비틀어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사기』는 인간과 권력의 관계를 밑그림 삼아 시대와 문명을 그려 거대한 풍경화였다. 그런데도 서구 역사가들은 『사기』를 모르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59쪽
『사기』는 『본기』 『표』 『서』 『세가』 『열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선 두 역사서와 달리 전쟁이나 정쟁보다는 ‘기전체’라는 독특한 방식을 통해 복잡하게 얽힌 인간세계를 그려냈다.
사마천은 당시 중국 한나라 공무원이었기에 방대한 자료를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왕의 명령에 반하는 의견을 냈다가 생식기를 거세당하는 ‘궁형’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고 묵묵하게 역사를 기록했다.
사마천은 국가와 사회는 정치권력과 경제 제도, 사회 제도, 법률, 예술과 문화 양식의 복합체이며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그 구조와 양상을 분석했다.
-76쪽
『사기』를 읽으면 인간이 얼마나 모순적인 존재인지, 야수 같은 욕망과 고귀한 이상 사이에서 흔들리는지를 보게 된다. 덕분에 지금도 사람들은 처세술을 익히기 위해, 인생의 의미를 엿보려고 이 책을 읽는다.
역사는 반복된다. 그러나 아주 천천히 조금씩 나아간다.
그녀들은 이야기 끝에 다시 오늘을 생각했다. 처음에 말한 김장 준비가 떠올랐다.
“정보는 빨라졌지만 사는 건 별로 달라지지 않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인간사는 참 비슷하네.”
그래서 “역사의 수레바퀴는 돌고 돈다”라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수레바퀴가 그저 제자리를 도는 것은 아니다. 그녀들은 다시 1년 전 12월 3일 그 밤을 기억하자고 말했다. 그녀들은 그날의 두려움과 해방감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다음 주에는 환경과 문명의 관계를 풀어낸 이븐 할둔과 있었던 그대로의 역사를 주장한 랑케를 읽기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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