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riter’s block을 깬다는 핑계로

글을 쓰게 되지 않는 이유, 글을 쓰게 되는 이유

by 푸알

사람은 언제나 도달했던 제일 높은 지점을 자기 역량이라 여기는 꼴사나운 경향이 있다. 나도 언젠가 생각만 하면 글감이 떠오를 때가 있었다. 지금은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눈앞에 아무 것도 나타나지 않는다. 제대로 된 글을 내놓지 못한 지도 벌써 1년이 다 돼 간다. 에베레스트 등반에 한 번 성공했다고 다음 번 등반 성공이 보장되는 건 아니다. 내 자신이라 생각했던 모습을 현재에 찾을 수 없다면 그건 나를 잃어가는 과정이라 봐야하지 않을까 싶다. 나태의 결과는 과거의 상실이다.



과거를 상실해서 꼭 우는 사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자신을 잃은 빈자리에 새로운 자신을 채워 넣으려는 사람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은 그렇게 하라. 진취적이고 뜨겁고 긍정적인 사람은 사라진 자신의 일부에 아무런 미련을 갖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짐작하는 어투를 쓰는 이유는 내가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 내가 이뤄왔던 것들에, 내가 걸어왔던 길과 나의 창작물에 가치를 두는 종류의 인간이다. 나는 그런 인간이기에 글을 써왔다. 그런 인간이기에 글쓰기를 선택한 것이다.


내가 글을 쓰겠다고 결심했던 시점을 정확하게 짚기는 어렵다. 인간은 매번 뭘 하겠다고 결심을 하고 그 결심을 매번 풀어버리는 동물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야구장 잔디 외야석에서 공이 근처에 떨어지는 걸 보고 ‘소설을 쓰겠다’고 결심했다고 하는데, 이런 일은 보통 사람에겐 일어나지 않는다. 일찍 일어나겠다는 결심도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세상이다. 나 역시 그런 인간이기에 과거를 돌아보면 수없이 결심과 실패를 반복해왔다.


다만 지금 시점에서 결심의 순간을 재구성해볼 수는 있겠다. 이 같은 작업은 순전한 조작이며 창작이다. 개인의 기억 속에서 매순간 감정적 부담을 더는 방식으로 합리화가 일어나고 있다. 자신을 서술한다는 건 그처럼 ‘본래 있었던 일’과는 멀어지는 일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경험한 일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해 안달난 동물이다. 어떤 질서도, 의미도 없는 세상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해야만 생존할 수 있는 동물이다. 글을 쓴다는 것, 서술한다는 것은 이 해석을 노골적으로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이 주제를 생각할 때면 2015년 유럽 여행에서 뭔가를 느끼고 온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가진 재원과 여력에 비해 여행을 꽤나 많이 한 편이라 생각하는데 그 중 백미가 이 유럽여행이었다. 35일 동안 10킬로그램 배낭을 메고 엄청나게 많은 도시를 돌아다녔다. 고백하건데 멍청한 여행방식이었다. 장소의 정취를 느끼기도 전해 이 동네 저 동네를 전전했다. 런던, 브뤼셀, 암스테르담, 프랑크푸르트, 프라하, 빈, 베네치아, 피렌체, 밀라노, 인터라켄, 베른, 파리. 12개가 넘는 도시를 갔지만 이들이 어떻게 달랐느냐를 물으면 대답할 말이 없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파리의 지하철이 런던 지하철보다 더럽고 냄새가 났다는 정도 말고는 무얼 더 말할 것이 없는 여행이었다.


혹자는 내게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우고 온 것 아니냐고 여행 소감을 물었다. 그런데 모두가 똑같은 커피를 마시고 똑같은 대중교통 수단을 이용하고 똑같이 의자에 앉아서 업무를 보는 세상에 뭘 기대한단 말인가? 다양한 삶의 방식을 배우려고 유럽에 가는 건 낭비다. 나는 여행 직후에 훈련소에 입대했는데 오히려 그곳이야말로 세상 여러 군상들을 모두 모아놓은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삶의 다양성은 문화, 계급, 윤리관의 차이에서 온다. 유럽에서 나는 그저 중산층의 삶을 피상적으로 훑어볼 수 있었을 뿐이다. 그보다는 논산훈련소에서 더 다양한 인간 군상을 마주했던 것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여행을 가면 무언가가 바뀔 것이라는 생각은 영락없는 착각이다. 어딜 가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여행은 장소를 바꾸지, 삶의 조건을 바꾸는 활동이 아니기 때문이다. 안이 텅 빈 그릇을 두고, 어딘가로 떠난다면 내용이 찰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멍청한 것이다. 텅 빈 용기는 안에 무얼 넣지 않으면 절대로 차지 않는다. 어딜 가든 그걸 채우는 연습이 필요하다. 나는 인생에 관성을 주고 싶었던 셈이다. 평생 무언가를 채우는 삶이 좋은데, 채우는 게 쉼없이 쌓였으면 좋겠다는 했다. 집에서 푸쉬업을 많이 했는데 여행지에서 운동을 하려니 빨래가 장애물이 됐다.


도미토리형 숙소에서 10개 침대 한 가운데서 웃통을 벗고 헉헉 대며 운동을 하는 것도 도저히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책을 읽으려 했는데 네덜란드어와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출판되는 책을 읽을 수는 없었다. 또한 책은 한, 두 권씩 살 때마다 점점 짐이 됐다. 먹고 싸는 건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그 때 나는 내 안을 채워왔던 것들의 한계를 알게 됐다. 그것들은 내가 평생 관철하기에는 불편하고 무거운 것들이었다(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들이었다). 다 성가시고 귀찮은 조건이 붙는 일들이었는데 열정이 없다면 영원히 그에 발목잡히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됐다.



나는 사막이나, 바다 한 복판에 표류돼도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했다. 지속할 수 있는 활동들로 내 삶을 채우고 싶었고 그 답이 글쓰기였다. 어디서든 수첩과 펜만 있으면 되니까. 실제로 군대에 입대하고 나서 나는 그 답에 상당히 만족하게 됐다. 군복 정강이 쪽에는 건빵 주머니라고 길쭉한 주머니가 붙어있는데 수첩이 들어가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이었다. 단순 노무 작업의 특징은 작업자의 머릿속을 텅 비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때 나는 온갖 글감을 떠올렸다. 그리고 잠깐 짬이 날 때면 수첩에 그걸 적었다. 여러 모로 글쓰기야말로 일상과 융합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활동이다. 늙을 때까지 잡고 있으면서도 쉬운 활동이다. 적어도 그때 나는 그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 같은 판단이 내가 지금까지 글을 써온 이유다. 동시에 내가 지금 글을 쓰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글쓰기는 육체적이면서 정신적 활동이다. 머리와 손이 합작해야만 한 편의 글을 완성할 수 있다. 그러나 잠깐이지만 직장생활을 해보니 머리에 글감을 채운다는 게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기사를 쓰는 일을 하다 보니, ‘검·경 수사권의 진실은 무엇인가’, ‘국회 정상화 포인트는?’ 따위의 생각이 언제나 머릿속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 같은 내 상황이 프로젝트 단위로 작업하는 모든 직장인에게 적용가능할 거라 생각한다.


글쓰기란 가장 물리적 제약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정신적 제약에 얽혀있는 활동이다. 내가 그걸 간과했던 것이다. 진행 중인 프로젝트로 머리가 가득 찬 경우에는 상당히 곤란해진다는 뜻이다. 예컨대 퇴근 버스에서 서강대교를 지나는 길목에 해지는 한강을 바라보는 일은 명상하기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대이다. 그러나 그때마다 시사 이슈들을 캐치업 하기 위해 라디오를 들어야 한다면 어떨까. 내일 닥친 마감을 끝내려면 기사 순서를 어떻게 배치해야하는지 정해야하는 상황이라면 어떨까. 글감이고 글쓰기고 뭐고 모두 다 사치스런 생각이 된다.


글을 열심히 쓴다면 비유와 우화에 둘러싸인 삶을 살게 된다(그래야만 한다). ‘이런 상황이 주어지면 어떨까?’를 매번 시뮬레이션하며 일상을 보내게 된다. 새로운 세계가 머릿속에서 수차례 생성됐다 스러졌다를 반복한다. 마치 레고를 조립하는 것과 같다. 나는 어릴 때 쌓여 있는 레고 부품들 중 괜찮은 것들을 골라서 ‘희한한 것’을 만들며 놀았다. 레고로 집을 짓는다며 변기모양으로 블록을 조립하고 투명 뚜껑을 덮어버린 곤 했다. 그걸 미래 시대의 변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내 기억 상으로는, 난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항상 즐거웠고 심지어 아버지에게 자랑하기까지 했다.


작가, 특히 문예적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일상 속에서 상상력의 유희를 즐기는 사람이다. 이는 작가의 필요조건이다. 그러나 점점 그 조건이 내 일상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 느껴진다. 우스꽝스러운 세계를 창조할 여력이 점점 떨어지고 있다. 예전에 내가 조립해놓은 세상들은 글감의 형태로 저장돼 원고지에 펜을 올릴 때 바로바로 꺼내 쓸 수 있었다. 그것들이 지금은 뿌연 안개 저편에서 표류하고 있을 뿐이다. 나는 머릿속에 내가 하고자하는 말이 있다는 것을 알 뿐 그걸 명확히 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됐다. 상상을 조합하던 신경이 무뎌진 것이다. 이제 아무런 잔상 덩어리들이 남질 않으니 무슨 글을 쓸 수 있단 말인지.


어느 철학자(아마도 스피노자)가, 변화하고 싶다면 우선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삶의 조건을 바꾸기 위해 노력하라는 조언을 한 적이 있다고 들었다. 그 말은, 바뀌는 삶의 조건 속에서 무언가를 유지할 때도 그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라 들린다. 나는 환경에도 변하지 않는 중심축으로서, 무기력한 세상에서 내게 의미를 채워주는 발전기로서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러나 꽁짜 점심은 없다고 나는 ‘선택’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우를 범했던 것이다. 선택을 유지하기 위해 각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서 말이다.


지금 상황, 조건이 변하면서 글을 쓰지 않게 된 내 처지를 무슨 말로 변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생은 내가 하고픈 것과 멀어지게 만드는 해류 같은 것이다. 그걸 견디며 버티기 위해서는 흐르는 만큼의 에너지가 반대로 쏟아부어야 한다. 김연수 작가가 전업작가가 되기 전에 글을 썼던 방법에 대해 읽은 적이 있다. 매일 퇴근하고 일찍 잠자리에 든다. 12시에 일어나서 2시까지 소설을 쓴다. 다시 잔다. 그게 무엇이든 밥벌이를 와 동시에 글을 쓰는 건 이런 종류의 결심을 요구하는 일일 것이다. 하루키적 결심을 완성시켜주는 건은 결국 김연수식의 결심이라 믿는다.


변하고 있는 삶의 조건을 강제로 멈추면 어떨까. 백수로 남아 굶어 죽고 말겠지. 변화에 맞춰 다른 일을 선택하는 결심은 어떨까. 영원히 남이 시킨 일이나 하며 표류하는 인간으로 남겠지. 그렇다면 writer’s block을 깬다는 핑계로 조금 긴 글을 써보는 건 어떨까. 근시안적이군. 장기적 해결책이 아냐. 그래도 뭐 어쩌겠어. 난 내가 해왔던 일들을 사랑해. 언제나 모든 일이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가진 않는다. 그래도 사랑을 부정할 수는 없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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