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1편
나는 <그리스인 조르바>를 다섯 번 읽었다. 보통 어떤 책을 다섯 번이나 읽었다고 하면 ‘너는 정말로 그 책을 좋아하는구나’라고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이 책을 사랑한다. 그러나 이 책을 사랑해서 다섯 번을 읽은 것은 아니다. 논리적인 인과관계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나는 이 책을 어떻게 다섯 번이나 읽게 된 바람에 사랑에 빠진 것이다. 누군가를 이미 사랑하게 된 사람에게도 사랑의 계기는 중요하다. 연인에게 너는 왜 나를 좋아해? 따위의 사면초가의 질문을 들었을 때, 사람들은 낼 수 있는 최대한 달콤한 목소리로 처음 만난 순간이라든지, 데이트하던 일상의 순간들을 극적 장면으로 포장하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순간을 낭만적으로 기억하기 위해 기름칠을 하는 로맨티스트가 아니다. 나는 뭉개져 흐릿해진 기억은 그대로 둔다. 따라서 내게 그런 질문을 한다면 이따위 부사어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다. ‘그냥, 자연스럽게, 어쩌다보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 <조르바>도 그렇다. ‘어쩌다보니’ 다섯 번이나 이 책을 읽게 되었고, ‘어느새’ 이 책은 나의 성경책이 되었다.
낭만이 없는 사람의 특징은 짧은 부사로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너의 여행은 어땠어?’ 이런 물음에 ‘별로’, 이 따위 부사로 대답하는 사람들 보면 정말 낭만이 없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런 질문에는 구구절절하거나 좌충우돌하지는 못해도 희노애락과 육하원칙이 있는 이야기 정도는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다섯 번에 걸친 나와 조르바의 인연도 ‘그냥’이라고 넘어가기에는 조금 아쉽다. 적어도 낭만 없다는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그렇게 혼자서 속으로 중얼대다보면 나는 내가 어느새 사방이 책으로 덮여 있는 흰 조명 밑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대형마트 앞에 보도에서 구석에 자리잡아 작은 존재감을 뿜어내었지만, 이제는 옷가게가 되어버린 언젠가의 기억 속 서점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그날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지만, <조르바>를 샀다. 왜 샀는지는 모르겠다. 정말 모르겠다. <조르바>와 함께 꽂혀 있던 세계 명작들이 뿜어내는 교양의 아우라가 나의 초라한 무지를 압박했던 걸까. 부끄러움으로 도저히 그 중 무엇이라도 사지 않으면 안됐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말 그렇다고 해도 왜 <조르바>였는지 지금에 와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이미 기억 속에서 장면만 남고 감정은 사라진 것이다. 사놓고 보니 썩 괜찮은 책이다 싶었다. 야간 자습 시간, 선생님의 눈을 피해 합법적으로 공부를 안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독서였고, 이 책이 그 시간을 충만하게 채워주었다.
두 번째 만남은 대학 새내기 때였다. 어느 수업에서 이 책을 읽어야만 했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서 꼼꼼하게 보고 쪼깨고 분석했다. 수많은 밑줄을 쳤고, 커피를 마시며 머리 깨지는 밤을 보냈지만, 내가 완성한 건 지금도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는 A4 5쪽 짜리 괴 보고서였다. 지금 와서 말하는데, 그 페이퍼는 길거리에서 나누어주는 헬스클럽 전단지만도 못했다. 전단지는 받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알 수 있지만, 내가 썼지만 그건 한참을 생각해봐도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 때 이 책이 보통 다룰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다. 학점도 쉽게 딸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세 번째는 정말 의외의 장소에서 만났다. 나는 그때 남자 냄새로 점칠된 녹색 공간에서 허리를 곧게 펴고 항상 정좌하고 있어야 했던 빡빡머리 훈련병이었다. 훈련소에는 진중문고라고 책 몇 권을 흩어놓은 책꽂이가 있었는데, 대개 애국심을 자극하려 애쓰는 별 볼일 없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진흙 속에 진주가 있는 것처럼, <조르바>가 그 사이에 숨어있었다. 자유가 없는 곳에서 자유의 이야기는 진정한 삶의 역설이었다. 나는 그 묘한 울림에 감동해 여건이 되는 한 <조르바>를 읽고 받아 적었다. 조교들과 부사관들은 자꾸 이상한 소리를 했다. 그들은 항상 챙이 긴 모자를 썼다. 긴 모자챙의 그림자에 가려 그들의 눈이 보이지 않았다. 그 그림자에다 대고 조르바의 얼굴과, 말투와, 머나먼 크레타 섬의 따듯한 바다를 그리곤 했다. 그러면 검은 윤곽 속에서 그들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때서야 위대한 문학작품이 종이 바깥으로 뿜어내는 아름다운 삶의 빛무리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네 번째 만남이야말로 내가 능동적으로 책을 찾아들었던 첫 만남이었다.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이 책 자체도 보통 책이 아니거니와 내 인생에서도 스치듯 흘러지나가는 책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개팅이 끝나고 어영부영 뜸들이다가 드디어 첫 번째 애프터를 신청한 꼴이었다. 나는 이 책을 내 식대로 소화했다는 증거를 남기고 싶었다. 공책을 펴고 떠오르는 온갖 것들을 적었다. ‘자유’, ‘인간’, ‘조르바’, ‘인생’, ‘죽음’, ‘부조리’, ‘하느님’, ‘춤’, ‘여자’, ‘즐거움’, ‘행복’ 등. 그러나 애프터는 실패로 끝났다. 책상 위에 오랫동안 앉아있었지만 어떤 문장도 써낼 수 없었다. 조르바와 ‘나’(작품의 화자)가 던지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캔버스 위에서 흘러내리는 물감 덩이처럼 뒤죽박죽 번져갔다. 메모한 '자유'나 '인간' 같은 단어는 너무도 어렵고 넓은 개념이었고 나는 그걸 건드릴 수 없었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고뇌하면서 400페이지가 넘는 긴 이야기를 쓴 이유가 바로 그 그 개념들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차선책으로 조르바와 주인공의 말을 모두 받아썼다. 쓰면서 내 마음은 경건해졌다.
다섯 번째 만남은 강제적이다. 운명이라는 놈이 꼭 투자자 같다. 투자는 기부가 아닌 만큼, 투자자는 돌려받을 것을 요구한다. 운명은 <조르바>를 접할 엄청난 기회를 그것도 네 번이나 제공했는데, 아직까지도 변변찮은 글 한편 내지 못하냐고 내게 독촉한다. 내가 무척이나 한심한 놈이 된 것 같지만, <조르바> 앞에서는 한심한 놈조차도 못 된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제까지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했으니까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을 없다만, 이제 그 투자자가 나를 믿지 못하고 직접 시련을 내렸다. 정기적으로 책을 읽고 그에 대한 글을 써야 하는 클럽에서 <조르바>를 요구한 것이다. 글을 쓰기 위해 나는 <조르바>를 한 번 더 읽었다. 분명히 읽었을 테지만 기억 속에서 스러진 묘사와 장면들이 녹색의 잎으로 싱그러운 나무를 다시 쌓아올렸다. 그리고 그 가지의 끝에서 여러 이야기와 잠언이 동백꽃처럼 흐드러졌다.
다섯 번을 읽고 깨달은 것 중 또 다른 하나. 누가 지었는 지는 모르지만 <그리스인 조르바>라는 제목은 최악이다. <위대한 개츠비>와 비교해서 생각해도 좋다. 독서계에서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 나가사와 선배의 오만한 선언은(‘<위대한 개츠비>를 세 번 읽지 않았다면 나와 친구가 될 자격이 없다’) 유명하다. 그러나 하루키와 개츠비의 팬들에게는 정말 죄송하지만, 나는 개츠비를 전혀 위대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 밖에 안 읽었으니 아직 한 번이 부족해서 그런 것인지는 몰라도. 개츠비가 위대하다면 조르바에게는 무슨 수식어를 붙어야할까. 그런 조르바에게 붙는 수식어가 ‘그리스인’ 이라니, 참으로 통탄하고 애석한 일이다. 흔히들 개츠비가 위대하다는 것이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고 몰락의 길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게 치면 조르바는 그 몰락이라는 것으로 65년의 세월을 꽉꽉 채웠으니 <위대한, 위대한 조르바>라고 불러야하지 않겠는가. 조르바에게는 개츠비 할아버지는 와야 대적할 수 있을 것이다. 진지하게, 시대를 초월하는 수많은 이야기의 집약, 그것이 바로 조르바이므로 <ZORBA, THE GREEK>가 아니라 <THE GREAT ZORBA>라고 불려야 마땅하다. 타임머신을 타고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편집인을 만날 수 있다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제안할 것이다.
<조르바>가 무엇이 그렇게 위대하냐고? 뒤의 글에서 아주 주저리주저리 쓸 테지만, 미리 한 마디 정도만 해두기로 하자. <조르바>는 한 가지 이야기가 아니다. 이 책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담겨있다. 조르바의 여러 이야기, 조르바 아버지의 이야기, 조르바 할아버지의 이야기, 할머니의 이야기, 아는 사람의 이야기, 나(화자)의 이야기, 나의 친구의 이야기, 나의 아버지의 이야기, 과부의 이야기, 오르탕스 부인의 이야기, 미미코의 이야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 셀 수가 없다. 물론 각각의 이야기들 중 서사를 진행하는 중심이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그 이야기만큼(아니 어쩌면 그 이상) 대화로, 행동으로, 회상으로, 웃음으로 전해지는 이 수 많은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다 장편 소설 감이다. 슬쩍슬쩍 들어오는 이야기가 모두 인생의 진리 하나쯤은 가지고 있으니, 이렇게 많은 이야기와 잠언들, 그리고 생의 교훈이 압축된 책을 나는 몇 개말고는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성경, 탈무드, 논어, 천일야화 등등이 그런 책들이다. <조르바>도 그런 책이다.
이 글은 그렇게 쓰게 된 복잡한 글의 프롤로그 격이다. 내게는 <조르바>와 이야기가 있지만, 앞으로 써야할 글에서는 그것을 쉽사리 녹여내기가 어려울 것이다. 써야하는 글은 분명히, 자유나 행복 따위를 다뤄 고루하고 딱딱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뒤의 글을 쓸 생각하니 첩첩산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