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푸알 Aug 11. 2020

이 엿같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고, 3편



<조르바>는 자유와 인간에 대한 이야기다. 처음 <조르바>를 분석했던 대학 새내기 시절, 나는 정말 고생고생해서 프랑켄슈타인 같은 괴 보고서를 만들어 냈는데, 그 녀석의 탄생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나는 ‘자유’라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던 것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보면 느끼는 감정이 자유인가? 훈련소를 수료했을 때 느끼는 해방감이 자유인가? 연인과 헤어지고 몰려오는 허전함이 자유인가? 지금 그 처참했던 시절보다 나아진 것이 있다면 자유라는 것이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된다는 걸 알고 있다는 점이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서양 사상사에서는 ‘자유’의 의미가 200가지도 넘는다고 한다. 
당장 자유는 영어로 freedom와 liberty로 분류되는데, 그렇다면 조르바의 자유는 둘 중에 어떤 것인가. 많은 사람들이 조르바를 이 시대의 진정한 자유인이라고 찬양하는데, 그들이 말하는 자유인은 어떤 의미에서 자유인인가? 멋대로 내뱉고 행동하는 막무가내 늙은이와 무엇이 다를까? 망설임과 후회로 점철된 몽롱한 반생을 살았다는 오그레의 눈에, 늙은 진상 하나가 크레타의 아름다운 전원과 섞여 착시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닐까?
 
일단 조르바 팬들은 안심해도 좋다. 다섯 번에 거친 정교하고 정밀한 검증 과정을 거쳐 내린 결론에 따르면, 조르바는 자유인이 맞다. 특히 조르바의 자유는 니체의 자유와 거의 일치한다.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니체 사상의 추종자라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다. 작가는 실존 인물을 자기 머리 속에서 재구성해서 자유의 농도를 최대한 높여놨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니체의 자유란 무엇인가? 
니체의 자유를 알기 위해서는 이 세상이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이는 자유와 연결되어 <조르바>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던 문제다. ‘두목 이 세상이란 뭘까요.’ ‘세상은 왜 이따구로 생겨먹었을까요.’ ‘누가 그런 걸까요.’ ‘하느님은 엿이나 먹으라고 하지요.’ 잊을만하면 튀어나오는 조르바의 질문들은 이 세상이 도덕이나 인과의 질서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암시한다. 도덕이나 신은 없지만, 인간은 모두 죽고, 늙고, 나쁜 일이나 좋은 일은 영원히 반복된다. 세상은 이런 필연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필연성에게는 어떠한 하소연도, 눈물도, 질책도, 양심도 통하지 않아서 조르바의 아들은 세 살에 죽고, 이제 행복을 찾으려는 오르탕스 부인도 죽고, 죄 없는 과부도 죽고,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지식인인 오그레의 친구도 폐렴으로 죽는다. 어떤 신화 속의 영웅이라도 필연(운명)에는 이길 수 없다. 죽음도 이겨낼 수 없다. 운명이라는 놈은 교활하여 미래를 인질로 잡아, 결과가 드러나는 마지막 지점에서야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교활함을 대적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이 엿같은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바로 그 지점에서 니체의 자유(조르바의 저항)가 시작된다. 조르바는 삶을 사랑한다. 맛있는 음식을, 아름다운 여자를, 육체를, 풍경을, 향기를, 노동을, 노래를, 춤을 사랑한다. 그러나 삶에는 듬성듬성 깊은 구덩이가 숨어있다. 그 구덩이에 빠지는 조르바를 상상해보자. 구덩이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서 머리 위에서 겨우 빛이 들어오는 입구를 바라보며 절망 속에서 ‘누가 이런 구덩이를 파놓은거야’ 웅얼웅얼대는 조르바를 상상해보라. 도저히 상상이 안 된다. 조르바는 어떻게든 함정을 나오려고 하거나, 함정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힐 것이다. 여차하면 그 안에서 혼자 춤추고 노래부르고 난리칠지도 모를 일이다. 고가 케이블 사업이 실패했을 때, 그는 춤을 추었다. 오르탕스 부인이 죽었을 때, 슬픔을 갈무리한 채 노동에 빠져들었다. 과부가 죽기 직전에는 그녀를 위해 싸웠다. 매번 그는 좌절보다는 구원과 해탈을 찾았다. 이쯤에서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명문장을 음미해보자.
 
그는 공중으로 뛰어올랐다팔다리에 날개가 달린 것 같았다바다와 하늘을 등지고 날아오르자 그는 흡사 반란을 일으킨 대천사 같았다그는 하늘에다 대고 이렇게 외치는 것 같았다.
전능하신 하느님당신이 날 어쩔 수 있다는 것이오죽이기밖에 더 하겠소그래요죽여요상관 않을 테니까나는 분풀이도 실컷 했고 하고 싶은 말도 실컷 했고 춤출 시간도 있었으니... 더 이상 당신은 필요 없어요!
조르바의 춤을 바라보며 나는 처음으로 무게를 극복하려는 인간의 처절한 노력을 이해했다나는 조르바의 인내와 그 날램긍지에 찬 모습에 감탄했다그의 기민하고 맹렬한 스텝은 모래 위에다 인간의 신들린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p416
 
나는 언젠가 조르바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어느 날 밤눈으로 덮인 마케도니아 산에는 굉장한 강풍이 일었지요내가 자고 있는 오두막을 뒤흔들며 뒤집어엎으려고 합니다그러나 나는 진작 이걸 비끄러매고 필요한 곳은 보강해 두었지요나는 불가에 홀로 앉아 웃으면서 바람의 약을 올렸어요. <이것 보게아무리 그래 봐야 우리 오두막에는 들어올 수 없어내가 문을 열어 주지 않을 거니까내 불을 끌 수도 없겠어내 오두막을 엎어그렇게는 안 되네.>
조르바의 이 몇 마디 안 되는 말에서 나는 인간이 취해야 할 도리와 강력하면서도 맹목적인 필연에 부딪혔을 때 우리가 맞서 대적할 어조를 감득했다.
  p417
 
운명은 때때로 최선의 결과를 앗아간다. 사업이 성공할 수도 있었고, 과부가 오그레와 행복한 삶을 만들어갈 수도 있었고, 오르탕스 부인이 말년을 편안하게 보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고집쟁이라 절대 한번 선언한 것은 물리지 않는다. 그때마다 조르바의 선택은 저항이었다. 니체의 자유가 바로 저항의 자유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사실 자신은 없다) 강풍이 불 때, 단속해둔 오두막 안에서 호탕하게 배를 치며 웃을 수 있는 것. 
운명의 선언을 인정하고 할 수 있는 만큼 엿을 먹이는 것. 운명은 이 저항을 그대로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을 속수무책으로 만드는 것. 그리고 이런 태도는 닿을 수 없는 최선의 결과 대신 차선의 대안을 만들어낸다.
 
운명에 저항할 때 인간은 자유를 향한 일말의 여지를 붙잡을 수 있다. 거대한 힘의 틈바구니에서 인간은 겨우 발버둥칠 공간을 마련한다. 그 공간이야말로 조르바의 오두막이고 인간 영혼의 안식처이다. 인간이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그 오두막 안에서 뿐이다. 그 공간이 도덕, 민주주의, 국가주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등에 오염되었을 때 인간은 힘의 꼭두각시로 전락한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처럼, 자각 없이 맹목적으로 악을 행하게 된다. 끊임없는 사색과 넘치는 자신감으로 그 공간의 완벽한 주인이 되는 것. 자기자신의 자율성을 되찾는 것. 
자유란 결국 자율성을 향한 기나긴 투쟁 가운데서만 얻을 수 있다. 조르바는 책을 뜷고 나오는 자신감으로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나만 믿어요. 조르바는 조르바만 믿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조르바는 비판이 어려운 무적의 인물이 된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