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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푸알 Sep 11. 2021

매력 없으면 가망도 없나? 쌍방 사랑은 환상?

서미싯 몸의 <인생의 베일>을 읽고

<인생의 베일> 


매력이 없으면 그걸로 끝인가요? 


해리 포터는 사실 유년 시절 트라우마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고 그래서 저런 말을 한 것이며, <운수좋은날>의 김첨지는 사실 식민지 시대 좌절하고 있었고, 생활이 힘든데다가 유교적 사상에 젖어 있어 있었기 때문에... 잘 짜인 이야기를 읽고 나면 등장인물들의 속마음을 읽고 싶어진다. 해석하고 싶어진다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들이 모순된 행동과 말을 한 번에 꿰뚫을 수 있는 일반적 설명을 내놓고 싶어진다. 독자는 분석의 연쇄가 뻗어가는 최전선에 인물의 행동과 말을 접붙이고, 각자만의 판단과 해석에 빠진다.



이게 우리가 이야기를 가지고 노는 방식이다. 이야기라는 것은 결말 너머로 나갈 수 없다. 인물은 책의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종이와 글씨라는 존재의 기반을 잃는다. 이제 이야기와 인물은 독자의 공상 속에서 존재한다. 밥 먹고, 방 청소하고, 돈 벌고, 꼬인 인간관계를 푸는 데 하등 도움 안 되는 이런 공상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다. 잘 짜인 이야기라면, 정말 그 인물이 현실에 존재하는 것 같아 마치 누군가의 인생을 훔쳐보고 나아가 대신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주며 독자를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자기 전이나 걸을 때 그 인물이 생각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내가 그런 상황에서도 그렇게 행동하게 될까? 세상에 정말 그런 사람이 있을까? 그 인물의 꼴이 나 역시 겪게 될 보편적 인생일까?



주의할 사실은 인물을 판단하고 해석하기 위한 재료들이 선별적으로 제공된다는 점이다. 작가가 그렇게 작업을 해 놓는다. 인물은 신이 만든 것이 아니라 작가가 만든 것이기에 때때로 작가가 이야기 곳곳에 뿌려놓은 진술의 정체가 의심해볼 필요가 있다. 3인칭이나 1인칭 시점에서 내러티브가 이어질 때 어떤 문장은 인물의 생각인지, 작가의 생각인지, 세상의 진리를 일반적으로 설명한 것인지 헷갈리게 된다. 나 역시 <인생의 베일>을 처음 읽었을 때는 속절없이 속을 뻔 했고,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일 뻔 했다. 키티의 반복되는 진술이 그랬다.



책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키티의 진술 중에 일관적으로 반복되는 것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 수 있겠다. 찰스 타운센드를 사랑한다며 열정적이고 영원한 사랑을 부르짖었던 키티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변덕스러웠다. 당연하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 소설의 본질이 키티의 성장담이기 때문이다. 찰스가 자신을 위해 아내와 이혼할 생각도, 사회적 지위를 버릴 뜻도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키티는 찰스를 경멸하게 된다. 그런데 월터의 죽음 이후 홍콩으로 돌아와서 찰스의 유혹에 넘어가더니 다시 찰스를 완전히 떨쳐버리고(떨쳐버리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온다. 서머싯 몸이 키티의 시점에서 소설을 쓴 만큼, 매순간 그의 심리와 요동치는 멘탈이 적나라하게 공개된다. 약하고 비겁하지만 순수하고 솔직한 모습에 조금씩 독자들은 키티의 마음을 이해하게 된다.



줏대는 사시나무 떨듯이 흔들리고 언행이나 다짐은 과거 행적과 모순되지만, 놀랍게도 키티에게도 딱 하나 일관된 명제가 있다. 월터를 사랑한 적 없고, 사랑하지 않고, 사랑할 일 없을 것이라는 진술이다. 어떤 심각한 상황에서도 키티는 이 말을 반복해 마치 이 말이 다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예언처럼 느껴지기도 하며, 자기 자신을 세뇌하는 마법의 주문 같기도 하다. 작품 초반 월터와 결혼생활을 설명할 때 키티(작가)는 이렇게 상황을 설명한다. <그녀는 한번도 월터를 신경 써 본 적이 없었다.> 월터가 키티의 외도 사실을 알고 있다고 밝히자 키티가 이번에는 이렇게 생각한다. <그녀는 그를 단 1분 1초도 사랑한 적이 없었음을, 단 하루도 그와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은 날이 없었음을 유사시 다 털어놓을 작정이었다.> 월터가 콜레라에 걸려 죽고 난 뒤에도 키티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작가가 계속 반복해서 쓴다).



<물론 월터의 죽음은 그녀에게 충격이었다. 그녀는 월터가 죽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그녀는 그를 사랑하지 않았고 사랑한 적도 없었다. 그래도 슬픔에 젖는 것이 그녀에게 합당한 행동이었다. 아무에게나 그녀의 마음을 들킨다면 추하고 천박하게 보일 터였다.>



월터와 키티는 전혀 맞지 않는다. 월터 페인이라는 남자는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사교 모임에 가길 원하는 아내에게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미술관에 데리고 다니면서 회랑을 걷게 했다. 그는 분명 키티와 감상했던 미술품과 베네치아의 회랑이 갖는 예술적 가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키티는 예술과 아름다움과 인류의 고상한 가치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그저 하루 종일 재잘거리길 좋아한다.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인사말과 상대가 인사를 받아주기 위해 쓰는 또 다른 무의미한 말이 오가는 소통 속에서 즐거움을 얻는다. 월터는 이런 그녀가 무심코 던지는 일상적 말에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는다. 단적인 예는 이렇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네요.” 침묵. 그냥 “그래. 그렇군.” 하고 대답하면 어디가 덧나나. 어떨 때는 그를 잡고 마구 흔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이 치솟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키티가 월터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그는 매력이 없었잖아. 키티가 원하는 이성적 매력도, 인간으로서 매력도 갖지 못했잖아.



처음에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가 책을 다시 읽고 의심이 들었다. 작가가 키티의 진술 뒤에 뿌려놓은 명제. ‘처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 사람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사랑할 수 없다.’ 이 말이 진실일까. 이 명제는 키티의 주장과 논리가 시작되는 전제이다. 키티가 자신의 모든 행적을 정당화하는 종착지점이기도 하다. 너는 왜 그래? 나는 이러니까. 너는 이럴 때 왜 그래? 나는 이러니까. 키티야 너는 왜 그래? 나는 월터를 사랑한 적이 없으니까. 사랑할 수 없으니까. 왜 사랑할 수 없는데? 매력이 없는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으니까. 키티의 반복되는 진술을 듣고 있으면 인간이라는 존재가 본래 그런 존재라는 확신에 몰리고 만다. 인간은 아무리 자신에게 헌신적이라도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상대를 사랑할 수는 없다고. 키티는 작품 곳곳에서, 이야기의 여러 진행 단계에서 그렇게 ‘선언’한다.



<“남자가, 여자가 자신을 사랑하도록 만드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건 그의 잘못이에요. 여자 탓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지금 우리 관점에서 자신이 사랑하게 만들 조건이 전혀 없는 사람과 결혼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 시대에는 사랑의 결실이자 시작이라기보다 사회적 위상을 드러내는 통과의례였다. 여동생이 먼저 결혼을 해버린 혼기 찬 20세기 초 여성으로서 키티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고 작가는 썼다). 그러나 월터는 그가 키티를 사랑한다는 것 외 키티에게 어필할 수 있는 매력이 없었다. 몸, 얼굴, 목소리 등 성적인 끌림으로 대표되는 찰스 타운센트. 유머와 대화, 상대방을 편안하게 하는 소통의 재미로 대표되는 워딩턴과 비교해 그는 성적 매력도 없고, 대화 기술도 없고, 재미도 없다. 인간은 육체적 존재이면서 사회적 존재이다. 종족 번영을 위한 본성을 충족하는 데서 희열을 느끼도록 설계됐으며 오랜 집단생활 동안 상대와 연결되는 와중에 기쁨을 얻도록 진화했다. 내가 생각한 바를 이해하는 사람에게 감동하고, 그와 대화를 하고 싶고, 그의 이야기가 궁금해지는 게 인간이 설계된 방식이다. 그러니 매력과는 전혀 다른 층위에 사는 월터를 사랑할 수 없다는 말이 타당하게 들린다.



그러나 죽음과 절망의 공간 메이린푸에서 키티와 월터의 세계의 간극은 보다 좁혀진다. 찰스와 키티의 만남을 확인하고 배신감에 휩싸인 월터는 키티를 콜레라가 창궐하는 메이린푸로 데려간다. 월터는 그곳에서 키티가 전염병에 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던 것이다. 키티는 그곳에서 월터의 사회적 평판을 듣게 된다. 매력의 불모지인 줄만 알았던 그는 사실 죽음의 땅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체력과 심력을 불사르는 의사였다. 전염병이라는 인간의 절망을 끝내기 위해 연구를 이어가는 학자이자 구원자였다. 그를 두고 성자라 칭하는 메이린푸 프랑스 수녀원 수녀들의 평가를 들으며 키티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이 변화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여전히 그를 사랑할 수 없다고 세뇌하듯이 되뇌면서, 그의 세계를 조금씩 이해해 가는 자신을 느낀다. 허영과 사치, 타인에 대한 재단과 뒷담화로 가득한 런던과 홍콩의 사교계와 달리 메이린푸는 거지와 시체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또 전염병으로 동료들이 죽어가는 와중에도 자신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삶을 기부하는 수녀들의 도시였기 때문이다. 그곳에서는 이전까지 중요한 가치로 여기던 즐거움, 사랑, 허영, 타인의 시선 등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타인에 대한 헌신, 신에 대한 믿음, 숭고함, 이타심이 공기에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키티에 대한 배신감으로 메이린푸에 왔음에도 월터는 자신의 본분에 놀랄 만큼 충실했다. 자신의 몸을 갈아 넣어서 콜레라 환자를 치료하고 세균을 연구했다. 그는 본질적으로 프로페셔널한 직업인이었다. 자기에게 주어진 역할에 충실한 직업인은 그 자체로 귀감이 된다. 직업보다 깊은 소명에 삶을 바치는 사람들은 존경의 대상이 된다. 자신의 삶을 희생해서 타인의 삶을 보듬는 희생적 헌신이 그 소명인 경우에는 더더욱. 월터와 수녀를 보면서 키티는 물질적 풍요, 소비의 쾌락처럼 순간적으로 인간의 피부를 훑고 사라지는 욕망보다 깊고 높은 욕구가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뭐라도 해야한다’는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키티는 안절부절 못한다. 런던 사교계를 누볐던 키티는 수녀들에게 자포자기하듯이 가서 무슨 일이라도 시켜달라고 애원해 결국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맡는다. 키티는 그때 자신이 ‘쓸모 있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세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싶다는, 선함에 대한 갈망 역시 인간에게는 원초적인 것이다. 매일 길거리에서 시체를 치우는 광경을 목격하는 메이린푸에서 키티는 선과 미덕의 존재를 발견하게 됐다. 이로써 노동 없이 사는 유한계급에서 사회경제적 위상이 하락했지만, 인격적 위상은 비교할 수 없이 높아진다.



성적 매력이 없어도, 그와의 대화가 재미있지 않아도 인간으로서 미덕이 넘친다면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는 그럴 수도 있다. 키티는 워딩턴에게 그의 애인인 만주족 여인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만주족 여인과 그 가족들은 한커우 만주인 학살 당시 워딩턴의 도움으로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이 여인은 왜소하고 말랐으며 대머리인 워딩턴에게 무한한 사랑을 느껴 그를 따라다니게 된다. 이 여인과 첫 만남에서 키티는 이런 농담을 꺼냈다. “언제부터 여자들이 남자들의 <<미덕 때문에>> 그들을 사랑했나요?” 그러자 만주 여인은 풉 하고 웃었다. 이 만남 전 여인을 두고 키티와 워딩턴이 나누는 대화가 의미심장하다.



<“그녀를 많이 좋아하세요?”

그는 이제 시선을 위로 향했는데, 그의 못생긴 작은 얼굴에 장난꾸러기 학생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를 위해 모든 걸 버렸어요. 집, 가족, 안정, 자존심까지. 그녀와 나와 함께 있으려고 모든 걸 바람곁에 내던진 지 꽤 많은 해가 지났습니다. 난 그녀를 두세 번 돌려보냈지만 그녀는 늘 다시 돌아왔어요. 그녀로부터 도망도 쳐 보았지만 그녀는 항상 날 쫓아오더군요. 이제는 두 손 두 발 다 들었어요. 내 남은 평생을 그녀를 견뎌야 하겠지요.”

“그녀가 당신을 미친 듯이 사랑하는 게 틀림없군요.”

“좀 <<이상한 느낌>>이 들어요.”

그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앞이마에 주름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가 그녀를 정말 떠나면 , 결단코, 그녀는 자살할 것이라는 데 추호도 의심이 없어요. 나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니라 그녀는 나 없이는 살 의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알게 되면 흥미로운 느낌이 들게 마련이죠. 어쩔 수 없이 어떤 의미가 생긴다고 할까요.”

“하지만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보다 사랑하는 거예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에게는 고마움조차 모를 수도 있어요. 상대방은 나를 사랑하는데 나는 상대방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지루함만 느낄 테니까요.”

“쌍방간의 사랑에 대한 경험이 없어 놔서요. 제게 사랑은 오직 단수로만 존재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월터가 키티에게 사랑이라고 보인 헌신은 이 만주족 여인보다 훨씬 못한 것이었다. 또, 키티는 메이린푸에 오기 전까지 월터의 인격이 지닌 매력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 키티는 메이린푸에서 성적 매력과 인간적 소통의 매력 외 제 3의 매력으로서 인간성과 인격의 존재를 깨달았고, 그래서 이 만주족 여인에 궁금증을 품은 것이 아닐까. 그러나 아직 키티는 워딩턴이 말하는 <좀 이상한 느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 같지는 않다. 그러니까, 그에게 아무런 애정이 없음에도, 이 사람이 내게 보내는 무조건적 애정과 헌신 덕에 내가 감동하게 되는 이 ‘이상한 느낌’의 존재를 위딩턴의 입을 통해 들었지만 이를 강하게 부정하는 것이다. 키티는 중요한 것은 사랑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라고 항변했다. 사랑을 ‘받아서’ 그에 연동된 특별한 감정이 태어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한다. 바로 이 대화의 맥락이 중요하다. 쌍방이 통하지 안는 사랑은 지루할 뿐이라는 키티의 발언에 대한 워딩턴의 대답을 반복해서 적는다. <“제게 사랑은 오직 단수로만 존재합니다.”> 이는 워딩턴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가 평범한 연애에서 겪게 되듯이 사랑은 대개 단수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사랑이 단수로만 존재하는 상황에서 답을 내야 하는 것이다.



작품 초반부 키티는 월터를 ‘혐오’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사건이 진행될수록 이 감정은 조금 바뀐다. <그녀는 월터에게 이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이봐요. 우리 바보짓은 이제 할 만큼 하지 않았나요? 우리 서로에게 부루퉁해 있어요. 입 맞추고 친구가 되는 게 어때요? 우리가 연인이 아니라고 해서 <<친구>>가 되지 말란 법은 없잖아요?’> 월터가 죽지 않고 키티와 애증을 풀었다면 어땠을까? 그의 사랑이 키티에게도 워딩턴이 말한 ‘좀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할 수 있었을까? 찰스를 향한 것과 같은 정열적 사랑은 불가능할 것이다. 월터는 찰스와 같은 신체, 얼굴, 목소리를 타고 나지 못했으니까. 그래도 일과를 마친 둘이 한 방에서, 한 명은 안락의자에 앉아서 책을 읽고, 한 명은 침대에 누워서 오늘 있었던 일들과, 만났던 못난 사람들의 뒷담화를 하며 서로 일상을 공유하는 그런 생활을 보낼 수는 있었을 것이라 믿는다. 서로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느슨한 신뢰를 공유하며 이윽고 서로가 불편하지 않은 수준의 관계가 이뤄질 수 있었을 것이다. 찰스 타운센드와 도로서 타운센드는 이미 그렇게 살고 있었다. 찰스가 아무리 자잘한 외도를 한다고 해도 끝내 자기 없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도로시는 알고 있었다. 이 관계의 균형을 사랑이라 불러야 할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반복해 말해야겠다. 대개 사랑은 단수로만 존재한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상정하고 해답을 찾아야 한다.



똑똑하고 명석하지만 자존심이 너무 강하고, 세상과 타인을 방어적으로 대했던 월터 페인은 자멸적 죽음을 맞이한다. 그는 자신에게 닥쳤던 시련을 극복해내지 못했다. 메이린푸에서 키티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밝히며, 찰스의 아이인지 월터의 아이인지 알 수 없다고 고백한 순간부터 월터 정신의 균형이 무너진다. 그는 끝내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실험한 끝에 사망한다. 그는 아주 똑똑한 사람이므로 분명히 키티와의 관계 시점을 따져서 자신의 아이인지 여부를 판단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이가 아니라는 확신에 이르렀을 것이다. 그는 전메이린푸에 키티를 데리고 와서 키티가 죽었음을 바랐지만, 결국 죽은 것은 그였다. 그는 자기 자신이 만들어 놓은 감정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해 키티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렇다고 그 애증의 관계에서 자신을 놓아줄 수도 없었다. 메이린푸에서 키티의 마음 속에서 일어난 변화를 감지하기에 그는 너무 섬세했고 민감했고 방어적이었고, 무엇보다 이미 정신적으로 심하게 무너져 내린 상태였다. 그는 키티와 친구에서 시작해 새로운 관계를 수립하는 가능성을 거의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자멸적으로 일에 매달렸고, 끝내 자포자기의 심정이 돼 스스로를 실험대상으로 삼아 균을 주입했다.



나는 그가 죽기 직전에 사실 이 모든 것을 깨달았을 것이라 생각한다. 임종 시 그가 외친 말은 “죽은 건 개였어”였다. 각주에는 이 말이 올리버 골드스미스라는 18세기 영국인이 지은 `미친개의 죽음에 관한 애가'라는 시의 마지막 구절이라고 한다. 어떤 마을에 사는 한 착한 남자가 잡종개를 만나 친구가 되었다. 어느 날 그 개가 남자를 물자 사람들은 미친개에 물린 남자가 죽을 것이라고 법석을 떨었지만 정작 죽은 건 개였다는 내용이다. 죽은 건 개였고, 월터였다. 죽은 개가 물었던 대상은 남자다. 월터가 물었던 대상은 누구일까. 그가 전염병의 도시에 키티를 데려간 뒤 키티가 죽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고 고백한 이상, 이 이야기상 남자는 키티가 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데 이 남자는 ‘착한’ 사람이라고 한다. 문 개가 죽었다. 문 개는 왜 죽었을까? 월터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무고한(착한) 남자에게 잘못을 저지른 자가 죽었다면, <죄책감에 시름시름 앓게 됐다>는 해석이 가장 일반적일 것이다. 그가 죄책감을 느꼈나? 외도라는 죄를 범한 쪽은 키티인데도? 이 부분의 해석에 자신이 없다는 것을 먼저 밝혀둔다. 외도를 했다고 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설계를 하는 것은 과도하다. 그만큼 좌절감과 배신감이 컸다는 것이고, 이는 그만큼 키티에 대한 그의 사랑도 컸다는 것이다. 일방적이고, 자의적이었지만 이 정도 밀도의 감정을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그 자존심 강한 사람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오류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순간에 죽어버렸기에, 이 소설은 키티의 성장기가 될 수는 있어도 월터의 성장기가 될 수는 없다.



작가가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는 순간 이야기는 작가의 손을 떠난다. 이제 그 이야기를 받아들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혹자는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혹자는 여성소설로 <인생의 베일>을 읽었을 것이다. 내게는 사랑에 대한 소설이었다. 나는 그 친구를 좋아하는데 그 친구는 나를 좋아하지 않아. 다른 친구는 나를 좋아하는데 나는 그 친구와 사귈 마음이 없어. 이 미스매치가 끝없이 반복된다. 나는 이것이 성적 매력이 뛰어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성적인 차원에서 자신을 좋아하게 만드는 소수를 제외하고, 다수가 맞이하는 운명이라고 생각한다. 그 대부분에게 사랑은 단수다.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상대에 대한 사소한 호감을 시작으로 연애를 시작하고, 이 사람에게 나를 의탁할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는 순간 결혼을 하는 것이 오늘날의 자유연애이지 않나. 그러한 확신이 들어도, 매순간 상대에 배신감을 느끼고, 상대의 매력이 예전 같지 않음에 실망한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끌고 나가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대부분 사랑이 단수로 시작하는 이상 사랑은 실패하라고 예정된 게임과 같이 느껴진다. 우리는 언제나 이상적 상대를 꿈꾼다. 성적 매력이 뛰어나고, 나를 이해해줄 수 있으며, 내게 헌신적이면서 그가 인격자이길 바란다. 그런 사람은 없다. 그런 사람이 있다고 해도 그가 나를 사랑할 확률은 거의 없다. 내가 그를 찾고 그에게 헌신할 기회를 갖는다고 해도, 그가 키티와 같은 사람이라면 그의 마음을 돌리기 아주 어려울 것이다. 아주 적은 확률로 내 매력이 통하는 사람 중 아름답고 멋진 사람을 찾고 그의 마음을 얻는다고 해도, 그와 사랑하다보면 실망과 아쉬움이 쌓여 남보다도 못한 인연이 될 확률이 높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과 몸과 마음이 통하는 그 순간의 기쁨을 잊지 못해 타인을 갈구한다. 고독의 불안감을 참지 못해 나에게 항상적 안정감을 줄 단단한 관계를 찾아 헤맨다.



이렇게 온갖 조건부 확률의 중첩 속에서 어렵게 시작하는 사랑이지만, 일단 사랑을 하게 되면 우리는 두 가지 선택지를 접하게 된다. 상대를 사랑해보려 할 것인가, 말 것인가. 키티의 닫힌 사랑관에서 성적 매력이나 재미가 없는 사람은 이해의 대상이 되는 범위 밖으로 밀려나야 했다. 키티는 “나는 그를 사랑한 적이 없고, 사랑하지도 않고, 사랑할 수도 없다”고 반복해 말했다. 나는 키티의 이 명제에 공감한다. 그러나 이런 닫힌 태도로 지나쳐버린 사람들 하나하나가 월터와 같은 세계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 월터와 같이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을 만나는 일 자체가 드물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키티와 같이 매력이 없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과 잘돼봐야 친구이기 때문에 그런 인연은 추구하지 말아야 하나? 워딩턴을 사모하는 만주족 여인처럼 상대가 도저히 자신을 버릴 수 없도록, 그리고 끝내 ‘좀 이상한 감정’을 느끼도록 헌신적으로 상대를 감동시켜야 하나? 찰스 타운센드처럼, 사랑은 단수임을 알면서도 사랑이 쌍방향인 것처럼 거짓되게 상대를 속여야 하나? 무책임한 말이지만 결론을 보류해두겠다.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할 수 없으니. 여러분의 결론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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