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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19.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4-흉가 체험, 그 후(4)>




 방으로 돌아온 우리는 질척거리는 이불과 나뒹구는 약병들을 주섬주섬 치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힘도 없었지만, 이 일과 관련된 것들은 꼴도 보기 싫었다. 나는 약을 한껏 빨아들여 묵직해진 이불을 들고나가 대야에 던져 넣었고, 우민이는 걸레 다섯 개를 들고 방으로 들어갔다.


 “영감님이니까 될 거야.”


 “하지만 대사님 연세도 있잖아?”


 우리가 정리하는 동안 은미 씨와 연화는 심각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슬그머니 엿듣기로는, 아무래도 조금 전의 그 남자는 제대로 치료가 되지 않은 것 같았다. 연화는 전화기를 손에 든 채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다. 저런 버릇은 없었는데... 나는 우민이와 함께 바닥을 닦으며 귀를 기울였다.


 “그렇긴 한데... 근데 영감님 아니면 그거 못 뗄 것 같은데.”


 “너도 힘들다고 하고, 어제는 장군 신이었다면서? 장군도 안 되고 선녀님도 안 되면... 대사님도 힘드실 것 같아.”


 두 사람의 대화는 점점 심각해졌다. 나와 우민이는 걸레질을 멈추고 주저앉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우리에겐 전혀 관심도 주지 않은 채 심각한 얼굴로 대화를 이어갔다.


 “... 뭐 보이는 거 없었어?”


 “이상해. 그게 이상하더라니까. 자꾸 숨기고 가려. 어지간하면 다 보이는데... 갑자기 또 안 보여. 뭔가 자꾸 숨기는데... 있다가 없다가 그래. 있다가 없다가... 선녀님도 뭔지 모르겠대. 영감님은 볼 수 있을 텐데. 아까 걔가 말한 우물이라는 말도 수상하고. 분명히 우물은 없었는데.”


 뭔 소리여, 그게? 있다 없어? 우물은 또 뭐고? 나와 우민이는 서로를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걸레질은 이미 뒷전이다. 우리는 편하게 앉아 연화와 은미 씨의 대화에 집중했다. 두 사람은 한참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다시 걸레를 움켜쥐고 바닥을 닦았다. 다섯 개의 걸레가 모두 거무튀튀하게 변했다. 새 걸레를 가지러 가려고 일어서는데 연화가 손가락을 딱 튕겼다. 나와 우민이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두 사람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언니! 은호는?”


 “... 감당할 자신 있어?”


 “... 언니가 해야지.”


 “난 싫어. 짜증 나.”


 “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럼 영감님한테 보내. 난 몰라.”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니야?”


 “내가 왜? 애초에 내가 받지 말랬잖아. 언니나 나나 감당 못 한다고. 근데 언니가 억지로 받은 거잖아?”


 “내가 할 일이 그건데 어떻게 안 받아?”


 “좀 가려 받으면 어디 덧나? 저거 말고도 널리고 깔린 게 환잔데! 꼭 저런 거머리 같은 것들까지 다 받아야 해? 아무리...”


 “......”


 두 사람은 우뚝 말을 멈추었다. 나와 우민이는 얼른 고개를 돌리고 청소하는 척, 바쁘게 손을 놀렸다. 뒤통수가 따끔따끔했다.


 “나중에 이야기하자.”


 “... 아무튼, 은호에 안 보낼 거면 그냥 영감님한테 보내. 우리 능력 밖이야.”


 “... 생각 좀 해 볼게.”


 두 사람은 싸늘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대화를 주고받았다. 뒤통수에 구멍이 뚫리는 것 같았다. 나는 천천히, 최대한 자연스럽게 문을 열었다. 우민이가 바람처럼 쌩 하고 뛰쳐나가고 나도 그 뒤를 잽싸게 쫓았다. 와. 눈빛으로 사람 죽이겠네! 뭐 그리 중요한 이야기라고 사람 뒤통수 구멍 나게 노려 봐? 신발도 제대로 신지 못하고 주방으로 달려온 나는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어헉!”


 안채의 상담실 문 앞, 은미 씨가 이쪽을 노려보고 서 있었다. 겁나 무서워! 심장마비 오는 줄 알았다. 한 밤중에 소복 입은 거 봤을 때보다 더 무서웠다. 와. 손 떨려. 나는 얼른 문 뒤로 숨어 벌렁거리는 심장을 토닥토닥 달랬다.


 “옷부터 갈아입으시고, 치료하게 우민이랑 들어오세요.”


 “와아악!!”


 은미 씨의 목소리가 바로 옆에서 들려왔다. 나는 펄쩍 뛰며 손에 든 걸레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와! 놀래라! 시발! 겁나 놀랐어!!

 은미 씨는 뭐 이런 멍청이가 다 있어? 하는 눈으로 날 보다가 피식 웃고는 대청으로 올라갔다. 우민이는 안채 뒤쪽에서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었다. 저 녀석, 덩치는 산만한데 정말 잽싸다니까. 나는 터질 것처럼 벌렁대는 심장을 부여잡고 우민이를 불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오니 연화는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저녁은 먹고 가라고 했지만 서둘러 법당에 가 봐야 한다며 가버렸다. 나와 우민이는 웃통을 훌렁 벗어 내놓고 약을 발랐다. 곳곳에 멍과 생채기였다. 우민이는 누나, 여기도 아프고 여기도 아프고. 하면서 온갖 엄살은 다 부렸다. 은동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우민이가 아프다고 할 때마다 낑낑하는 소리를 냈다. 은미 씨는 은동이가 낑낑거릴 때마다 썩어 들어가는 미소를 지으며 노려보았다. 나 참. 개랑 기싸움을 얼마나 하는 건지. 애다, 애. 저런 걸로 개랑 싸워. 어유. 싸울 상대가 없어서 개랑 싸운다. 기가 찬다.


 “아니, 은동이가 뭐 했다고 그래요?”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러니까요. 왜 은동이한테 그래요?”


 “아무것도 안 했으니까요!”


 뭔 소리야, 저게? 어이가 없네. 안 되겠다. 밥부터 빨리 주문해야겠다. 나는 재빨리 단축번호를 눌렀다. 내 전화기에 유일하게 저장된 단축번호는 동네 반점이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여기 호은당인데요, 쟁반짜장 곱빼기 하나, 해물짬뽕 곱빼기 하나, 볶음밥 곱빼기 하나랑 칠리 새우 하나... 그리고 해물짬뽕 보통 하나랑 탕수육 큰 거 하나 해 주세요.”


 삼 인분 맞습니다. 세 사람 먹으니까 삼 인분이요. 제 건 짬뽕 보통 하납니다. 나머지는 저 둘이 다 먹을 거고요. 전화를 받은 사모님은 호호 웃으며 오늘 일찍 닫는가 봐요. 했다. 나는 그저 웃었다. 이 많은 양을 셋이서 먹는다고 하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가끔 주문하지만 주문할 때마다 대량이라서, 반점에서는 일찍 문 닫고 회식이라도 하는 줄 안다. 직원이라곤 나랑 우민이 뿐이고, 약사는 은미 씨 뿐이라는 것도 알지만, 친구들이 와서 파티라도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나는 굳이 그 환상을 깨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예, 그렇게 됐습니다, 하고는 허허 웃었다. 빨리 갖다 줄게요, 하는 대답과 함께 끊어진 전화. 은미 씨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이번엔 탕수육 큰 걸로 시켰어요.”


 은미 씨는 매우 만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내 등에 약을 치덕치덕 발랐다. 손길이 아까보다는 부드러워졌다. 진작 주문할 걸. 그랬으면 얼굴에 약 바를 때 덜 아팠을 텐데. 아오, 쓰라려. 덧나는 거 아니야?! 덧나기만 해 봐! 신고할 테다! 이 약, 냄새도 고약하네. 썩은 오이 냄새가 난다. 으윽. 난 오이가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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