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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니 Nov 27. 2020

약방 호은당

<에피소드 15-고향 가는 길(1)>





<에피소드 15-고향 가는 길>


 바쁘게 보낸 날들 덕분일까. 어느새 추석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딱히 고향엘 가야겠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았는데 은미 씨는 다녀오라며 차키까지 줬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다녀오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은, 추석 연휴의 시작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은미 씨는 내가 갈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출발하려고 하는 내 앞에 커다란 쇼핑백 두 개를 내려놓았다.


 “이게 뭔데요?”


 나는 지난번에 캔 산삼으로 담근 산삼주 병을 내려놓고 가방을 열었다. 작고 네모난 상자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명색이 호은당 소사님인데 빈손으로 갈 수는 없잖아요? 그간 정우 씨가 열심히 빚으신 약이에요. 이쪽 가방에 든 건 부모님과 형님 내외분께 드리고, 이쪽 가방에 든 건 친척 분들 하나씩 드리세요.”


 “예에?! 이 많은걸 다요?!”


 내가 종종 은미 씨를 도와 약을 만들긴 했지만, 그게 몽땅 여기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지금까지 몇 주간 은미 씨가 계속 만든 것들이 이거였나?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 이 사람, 은근히 인간적이잖아?!


 “에이, 그래도 이건 다 못 받아요. 이만큼 살 돈도 없고요.”


 그렇다. 나는 어마어마한 월급을 받지만 어마어마한 적금을 퍼붓고 있다. 호은당에서 나가는 날 살 집의 집값을 모으는 중이었다. 다행히 호은당에서 일 한 이후, 목돈이 나간 적은 갑작스러운 화재로 입원했던 병원비와 부동산 사기를 당한 것 외에는 없었다. 병원비는 보험에서 거의 대부분 보상이 나왔으니 큰돈이 든 것도 아니다. 많이 버는 만큼 많이 모으고 있고, 은미 씨와 연화를 따라 여기저기 기부도 많이 하고 있어서 내 수중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는 돈은 그리 넉넉하지 않았다. 이 약들, 못해도 몇 백만 원은 충분히 할 거다. 그만한 돈은 없다.


 “선물이에요. 제가 정우 씨 가족들에게 드리는 선물. 그러니까 가지고 가세요.”


 “그럼 부모님 것만 받을 게요. 친척들까지 안 챙겨 주셔도 돼요.”


 “음... 그럼, 오실 때 참외라도 한 박스 갖다 주세요. 참외로 약값 하죠, 뭐.”


 은미 씨는 별것 아니라는 듯 말했다. 이걸 진짜 받아도 될까. 하지만 은미 씨 성격상 주면 받는 것이 좋다. 안 받으면 갖다 버릴지도 모른다. 자존심이 드럽게 세니까. 나는 잠시 고민하다 그냥 받기로 했다. 고마움을 담은 인사를 몇 번이나 건네고, 나는 하얀 차에 올랐다. 으윽. 뒤는 절대 보지 말자.

 우민이에게 밥 안치는 법도 상세히 알려 주었고, 사나흘 충분히 먹을 국과 반찬들을 해 두었으니 괜찮을 거다. 섣불리 요리할 생각 말고, 배달 음식 먹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명절에도 배달을 하는 식당은 꽤 있다. 우민이는 걱정 말라며 가슴을 탕탕 쳤다. 네가 제일 걱정이거든.

 올라오는 길에 전이랑 튀김이나 잔뜩 챙겨 와야지. 하며 나는 시동을 걸었다. 은동이가 컹컹 짖으며 배웅했다. 저 녀석, 엄청나게 커졌다. 이제 성견이라고 봐도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도 크는 중이다.

 은동이를 비롯해 우민이와 은미 씨의 배웅을 받으며 나는 고향을 향해 떠났다.


 서울에 자리를 잡은 6년 만에 고향집에 간다. 기분이 묘했다. 지금까지 붐비는 귀성길이나 괜히 흰 눈으로 볼 친척들이 신경 쓰여서 별의별 핑계로 미루고 미루었는데, 지금은 조금 달랐다. 보조석에 뽁뽁이를 두툼하게 두른 채 곱게 앉아 벨트를 맨 산삼주 때문인지, 뒷좌석에서 달그락거리는 수십 개의 한약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기분이 들떴다. 마음이 뿌듯했다. 나, 그럼 성공한 건가?

 꿈꿨던 삶은 아니지만,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지금이라면 성공한 거라고 봐도 되지 않을까? 물론 차는 내 차가 아니지만 말이다.


 귀성길이 밀릴 것은 예상했다. 하지만 지금은 밤 10시라고! 고속도로에서 시속 50킬로라니! 이게 말이나 돼?! 내 다시는 안 내려간다! 설에 가더라도 기차나 버스 타고 갈 거다! 맙소사. 이대로 가다가는 해 뜰 무렵에야 도착할 것 같다. 아, 피곤해. 출발한 지 2시간이 다 됐는데 아직도 경기도를 벗어나지 못했다. 해마다 고향 다니는 사람들은 어떻게 다니는 거지? 이러다 진짜 일곱 시간 걸리겠는데...

 결국 나는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휴게소로 들어갔다. 가장 밝은 곳에 꾸역꾸역 차를 세우고 잠시 눈을 붙였다 가기로 했다. 이 차로 어두운 곳에 있는 싫었다. 환한 조명 때문에 눈이 부시긴 했지만 나는 금세 잠이 들었다. 정말 피곤한 탓이었다. 장시간 운전하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화들짝 놀라 눈을 떴다. 내가 운전을 하던 중이었나?! 졸음운전?! 아, 아니구나. 휴게소네. 나는 환하게 밝은 휴게소 간판을 보고 벌렁거리는 심장을 쓸어내렸다. 순간 내가 졸음운전을 한 줄 알고 나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콱 밟았다. 무안하네. 아무도 없어서 다행... 어엉?

 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머리를 쓸어 넘기는데 언뜻 인기척이 느껴졌다. 뒤에서... 저어기... 뒷좌석... 돌아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무언가 느낌이... 오싹한 기분이 든다. 제발. 제발! 나는 벌벌 떠는 손을 조심스럽게 뻗어 보조석 아래에 둔 가방을 살그머니 들어 올렸다. 뒤에서 뚫어지게 나를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분명히 무언가 있다! 내가 미쳐!!

 가방을 챙긴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아주아주 자연스럽게 전화기를 들고 차 문을 열었다. 덜컥. 차 문이 열리는 순간, 뒤에서 분명 덜그럭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허억... 그 나무 상자들! 은미 씨가 준 약상자들! 약상자들이 달각거렸다!! 누가 있어! 확실히 있다고!!!


 “으아악!”


 다른 생각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냥 나는 화다닥 달려 환하게 밝혀진 휴게소로 미친 듯이 달렸다. 뒤를 돌아볼 생각 따위 없다! 뒤는 무슨! 미친! 심장아! 멈추면 안 된다! 뛰어!

 허둥지둥 휴게소 안으로 들어가니 사람들이 꽤 많았다. 북적이는 사람들 틈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가까운 기둥 뒤에 숨었다. 여기 숨으면 안 보이겠지. 와. 진짜. 간 떨어지는 줄 알았다. 귀신, 귀신이다! 귀신이 차에 있어! 나 어떡해...!!

 벌렁거리는 심장이 가라앉고,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어 돌아보았다. 조명 덕분에 훤한 주차장, 드문드문 선 차들 사이에서 문이 비쭉 열린 흰색 자동차가 보였다. 여기서 봐서는 아무것도 없는데... 차 문이 열려 있으니 사람들이 기웃거렸다. 젊은 남자가 문을 닫을까 말까 하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 일단... 일단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용기를 내어 다시 나가기로 했다. 아, 후달려!


 “어, 혹시 이 차, 차주 되십니까?”


 “아, 예. 예... 제가 좀 급해서...”


 “아, 하하하! 그렇죠. 장거리 가다 보면 힘들 때 많죠! 그래도 문은 꼭 닫으세요.”


 남자는 내가 화장실이 급해서 문도 안 닫고 뛰쳐나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는 호탕하게 웃고는 자리를 떠났다. 주변에서 무슨 일인가 쳐다보던 몇몇 사람들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사라졌다. 주변은 다시 휑하게 비워졌다. 아, 무서워! 무섭다고!!

 전화기를 꺼내 보니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은미 씨... 자겠지? 열 시만 되면 기절하는 사람이니까... 연화도 자고 있을까? 우민이는... 그래. 우민이는 안 잘 거야! 얼마 전에 게임기 샀는데 그거 한다고 맨날 늦게 자니까!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화면을 문질렀다. 차 문도 닫지 못한 채, 나는 차에서 멀찍이 떨어져서 코톡을 켰다.


 -자냐?


 -벌써 도착했어?


 우민이는 냉큼 답장했다. 나는 이 일을 이야기하느냐 마느냐 한참 고민하다가... 결국 말하기로 했다. 다행히 은미 씨도 연화도 있단다. 나는 연화에게 물어봐 달라며 조금 전의 일을 장황하게 적어 보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차 안을 들여다보는 것이 두려워 다시 도망치고 싶어 질 무렵, 답장이 왔다.


 -형, 아무 문제없을 거라는데? 그냥 형이 피곤해서 잘 못 느낀 거 아니야? 상자들은 차가 흔들려서 걸쳐져 있다가 떨어진 건지도 모르잖아. 누나들이 좀 더 쉬다가 가래. 많이 피곤해서 그런가 봐.


 그래... 그런 거지. 그래. 그런 거야.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상자들이니, 이동하는 동안 흐트러지거나 균형이 깨져서 나뒹군 거야. 그래. 그런 거야. 내가 너무 오버했다. 너무 피곤해서 그런 걸 거다.

 그럼 그 시선은 뭘까. 차마 차 안은 들여다보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차 뒤를 보았다. 내 차가 선 자리 뒤로 두 대의 차가 더 서 있었다. 그래.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서 뒤에 있던 차의 라이트에 놀란 걸 거야. 그래. 그거 아니면 설명할 방법이 없잖아? 설마 귀신이 차에 타고 있겠어? 말도 안 돼.

 나는 허탈한 결론을 내리고 차 문을 쿵 닫았다. 그래. 내가 피곤해서 그래. 에너지 드링크라도 하나 마시자. 내일 쓸 에너지 오늘 다 당겨 쓰고, 내일은 집에서 쉬지 뭐. 환하게 밝혀진 편의점으로 들어가 새파란 황소가 달리는 음료 두 개, 녹차 하나, 초콜릿 한 통을 사고 밖으로 나왔다. 흡연 구역에는 꽤 많은 사람들이 있었다. 나도 그 사이로 슬그머니 섞여 들어가 담배를 꺼냈다.


 “저기, 죄송합니다. 라이터를 깜빡해서, 불 좀... 감사합니다.”


 사실 라이터는 있다. 단지 누군가 산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이다. 뭐라도 좋으니, 멀쩡한 사람과 짧은 대화라도 하고 싶었다. 안심하고 싶었다.

 나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옆에 선 남자에게 라이터를 돌려주었다. 그도 꾸벅 인사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참 인사성이 바르지. 역시 한국 사람들은 참 착하고 정이 많아. 저 작은 라이터 하나에도 인사가 오고 가니 말이야. 괜히 다른 생각을 하며 조금 전의 그 느낌을 지워보려고 애썼지만, 내 눈은 여전히 하얀 차에 꽂혀 있었다.

 담배 한 대를 다 태우고도 차로 돌아가기 싫어서 괜히 미적거렸다. 인형 뽑기 기계에서 오천 원을 쓰고, 짝퉁 지포 라이터가 든 뽑기 기계에서 만 원을 썼다. 물론 내가 건진 건 하나도 없다. 황소 음료수 두 개를 모조리 벌컥벌컥 비워버리고, 녹차 병과 초콜릿을 들고 터덜터덜 차로 돌아왔다. 심호흡을 몇 번이나 한 뒤, 나는 차 문에 손을 댔다.


 “아무것도 없어. 기분 탓이다. 이건, 내가 피곤해서 그런 거야. 박정우,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그래. 피곤해서 그래. 그때 이후로 내가 너무 오버해서 그래. 이제 괜찮다고 했는데 내가 괜히 예민하게 군 탓이야. 지금까지 이 차 계속 타고 다니면서 아무 일도 없었다. 괜히 어두우니까, 괜히 그 날 생각에 오버하는 거다. 피곤해서. 그래. 내일 쓸 에너지 다 끌어 모았으니까, 집까지 무사히 가자. 절반만 더 가면 된다. 금방이다.

 나는 힘주어 문을 열고 뒤는 돌아보지 않은 채 차에 올라 문을 쾅 닫았다.


 “어으! 힘이 막 솟네! 어우! 좋다! 가자!”


 나는 괜히 큰 소리를 내며 씩씩하게 가방을 내던졌다. 그래. 내가 이렇게 용감하다고!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량 오디오 볼륨도 올렸다. 빵빵 울리는 음악은 흥겨웠고, 초콜릿은 달달했다. 초콜릿을 한 번에 세 개를 털어 넣고 와득와득 씹으며 나는 벨트를 쭉 끌어당겼다. 버클을 채우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힐긋 뒤를 돌아보았다.


 “으아아아아악!!!”


 뒷좌석에 앉아서 내 의자 쪽으로 쑥 내민 피투성이 얼굴을 나는 보았다. 뻥 뚫린 그 눈이 나를 보고 있고 길게 찢어진 새빨간 입술이 시커먼 어둠을 문 채 씨이익 웃는 것을, 나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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