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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따단언니 Mar 28. 2024

숨 가쁘게 달리던 내가 구례에서 배운 것

개발자에서 콘텐츠 기획자로 커리어를 바꿔 한창 명상 콘텐츠를 만들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좋아하는 일을 찾고 싶다고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꿈에 그리던 일을 하고 있었지만 막상 들어간 회사에서 매일매일이 무지갯빛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숨 쉴 구멍이 필요했던 나는 구례에서 만났던 호스트님에게 연락했다.

"혹시 이번 주말에 묵을 수 있을까요?"

아차차- 구례를 너무 얕봤던 것일까

당장 일주일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아무리 인맥 찬스(?)가 있다 한들 먼저 예약한 손님을 이길 수 없다.


감사하게도 호스트님이 여기저기 수소문해 내가 묵을 수 있는 곳을 소개해주셨다. 아무 정보도 없이 찾아간 그곳에는 난생처음 본 또 하나의 세계가 있었다.

'이떼힐'이라는 곳이었다. 지금은 숙소로 운영하고 있지 않고 있는데 호스트님께서 '서울에서 온 그 아가씨'에 대해 잘 소개해주셔서 하루만 묵을 수 있게 해 주신 것


이떼힐? 파리에서 바게트를 뜯어먹어야 할 이름 같다고 생각했다. 왜 이떼힐인지는 함께한 산보에서 이해할 수 있었다.


호스트님과 이떼힐의 주인장님, 그리고 나는 지리산 자락을 함께 걸었다. 셋이 나란히 걷는 것이 아니라 일렬로 한 명씩 조금씩 거리를 두고 혼자인 것처럼 걸었다.


그렇게 한창 열심히 걷다가 댕- 댕- 종이 울린다. 잠깐 멈춰서 걸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 지를 떠올리라고 알려주신다.

'얼마나 남았지?' '얼마나 더 가야 될까?'

뭐.. 대부분 이런 생각들을 하지 않을까


이떼힐은 '이름표 떼기 힐링' 이였다. '나'라는 존재는 가정에서는 맏딸, 누군가의 여자친구처럼 여러 존재로 이름표를 달고 있다.


그 이름표를 떼고 지금 바로 이 자리에 있는 '나'를 생각하라는 취지였다. 계속해서 앞으로 남은 길, 지나온 길만 생각하며 걷고 있던 내 머리가 종소리처럼 댕- 댕- 하고 울렸다.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내 발바닥의 세포 하나하나

살랑살랑 내 피부에 닿는 바람의 촉감

지리산이 나를 끌어안아주는 듯한 기운


심지어 명상 콘텐츠를 한창 만들다가 내려온 구례였는데

나는 명상이 아니라 겉을 감싸는 껍데기만 만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무것도 모르고 구례를 처음 왔을 때도 같은 배움이 있었다. 나는 항상 성실하고 빠릿빠릿한 사람이었다. 그런 성실함이 여행할 때도 나를 따라다녔다.


등산 장비 없이도 갈 수 있는 가벼운 산책로를 소개해주셨는데 산책로를 넘어가 등산을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나는.


긴 바지는 고사하고 배꼽이 보이는 짧은 크롭티에 반바지, 굽 높은 운동화를 신고서 정상을 1km 남겨놓은 지점까지 올라가 버렸다.


아침 일찍 출발한 덕에 내 앞에는 아무도 없었지만 뒤에는 등산복에 스틱까지 풀 장착한 등산객 무리가 있었다.


나의 옷차림을 보고 휘둥그레진 눈으로 한 마디씩 말을 건네신다.

"오메 벌써 올라갔다 내려오는기여?"
"거의 다 왔어! 우리랑 같이 가자"


평소 같았으면 끝까지 올라가는 것을 택했을 텐데 거의 처음으로 중도 포기하는 선택을 해보았다.


이런 선택을 해보아야 다음에도 내가 어떻게 하고 싶은 지 알겠지? 내려가는 선택이 포기가 아니라 나를 위한 선택이었다는 걸 바위를 기어가다시피 하며 깨달았다.


끝없이 달리는 것만이 옳은 선택지는 아니라는 것

단순히 등산에서뿐만 아니라 내 삶에도 필요한 이야기였다.


나는 내 삶에 필요한 힌트들을 구례에 올 때마다 쏙쏙 얻어갔다. 그게 내가 구례에 계속 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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