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이 자란다.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 대부분은
아이들이다.
아이들은 매일 아침 만나면서도 새로운 사람을 만나듯이
반겨주고
웃어주고
만져준다.
아이들은 관심과 스킨십을 통해 사랑스럽게 자란다.
그 아이들과 같았던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가난하고 척박한 산골에서
산과 들에서만 삶을
영위하다가
세상을 향해 포효하는 작은 호랑이처럼
뛰쳐나와 도시의 한 어느 곳에
정착하셨던
아버지
참
대단하셨던 것은
홀로 가족들을 위해 세상과 싸우시며
감정조차도 잃었을 것 같았던
아버지
그
아버지가
늘
새벽을 깨우시며
봄이면
"일어나 나뭇가지에 앵두꽃이 몇 송이 피었는지
세어보아라."
여름이면
"해가 중천이니 석류나무 아래 꽃봉오리 얼마나
떨어졌는지 살펴오아라."
가을이면
"게으름에 감나무 감 떨어진다 가지 부러졌는지
흔들어보아라."
겨울이면
"찬바람에 동백나무 붉은 꽃 얼지 않았나
둘러보아라."
봄여름 가을 겨울 사시사철 고향집 정원 마당에
과실수와 사계절 정원화가
어린날의 아버지와의 추억이 되어 피었다.
열일곱 나이에 보이는 것은
잡풀이요
한갓 식물에 불과했는데
그 작은 것에도 의미를 두고
관심을 두고
미련을 두고
고사리 같은 여식들을 내몰으신다.
개미가 잎 사이를 타고 오르면
진드기 방충을 하면서도
개미에 물린 동생 손등엔
시선도 주지 않으셨던
한없이 원망스러웠던
아버지
그리고
아쉬웠던 아이
나
지금
그때로 돌아간다면
조금은 그 마음에 내 마음 새겨진다.
말 못 하는 화초의
깊은 뜻을 알고 채근하셨던
아버지의
그 성화를
"너는 손이 있으며, 발이 있으니 가려운 곳, 아픈 곳 만져 보기라도 하지"
라고 하신다.
아이들
작은 토분에 다육이를 심으며
세상을 얻은 듯 만족해하는 아이
짧은 손가락 쥐락펴락하며
세상의 더러운 것 씻어내는 기분으로
흙을 씻는 아이들
유리 항아리에 가득 담긴 꽃을 보며
놀이할 땐 생각도 않던 엄마손
그리워 눈물방울 가득 머금는 아이
모두 다
내
아버지와 같이
그들을 좋아한다.
가려운 곳, 아픈 곳 보지도 못하고 만져보지도 못하며 아파하는 그들,
어느새
식물이 자람과 같이 아레카 야자수처럼 자란
고등학생 아들이 새벽 아침에
눈을 뜨면서
한마디
" 밥 주는 것보다 풀떼기 물주는 어머니가 자랑스럽답니다!"
유머스러운 한마디에
웃고 지나가지만
애틋함은
내 아이와 식물들이
동일하게 가슴에
와서
남는다,
"이쁜 내 새끼"
아이들은 식물과 같다.
라고
주장하고 싶다.
마음을 담아 내 이름에 석자를 아름드리
식물로 이름을 지으셨던
그분처럼
지금
난
식물을 사랑하고 꽃을 좋아하고 산과 들의 자연을
친구 삼아 늘 함께하는 자연인이 되었다.
도시 속의 자연인
게으른 아이는 성공을 못한다.
서두르는 아이는 실수를 잘한다.
빠른 아이는 놓고 가는 것이 많다.
느린 아이는 완성을 못한다.
고집 센 아이는 사랑받지 못한다.
헤픈 아이는 진중하지 못하다.
등등등.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훈계보다
아이들에게 한 포기의 식물을 기르도록 한다면
잃었던 심성을 찾고
누렸던 자기 고집을 버리고
늘
그 자리에서
웃고, 생각하고, 지켜보는 작은 식물의
마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내
장성한 딸과 아들이 두세 살 어릴 적에 꽃을 보고 웃고
나무를 보고 행복해하던 것처럼.....
호기심으로 만져보던 식물이 시들어 생을 마감할 때도
피어있던 꽃송이가 조막만 한 아기 손에 쥐여서
녹아내려도
앙증맞은 발로 막 새순을 틔우는 싹
웃으며 밟던 아이가
이젠
다 자라서 자기 나이와 같이 함께한
야자수를 보며 함께 든든해한다.
늘 그 자리에서
스스로를 지켜주었다고
늘 그렇게
교감하면서 자랐다고
행복해한다.
아이와 함께 자란 식물은
이미
내 아이가 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