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정호 X 김은지, 두 정신과 전문의 트라우마 대담
세월호 참사는 진료실에만 머물고 있던 정신과 의사들을 현장으로 한마음이 되어 달려가게 했습니다. 그중 김은지 원장은 당시 단원고등학교 스쿨닥터로서 트라우마 현장의 한복판에서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돌봤습니다. 스쿨 닥터 임기를 마친 후에도 이들의 곁을 떠날 수 없어서 안산에 개인의원인 마음토닥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개원하여 진료와 상담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다음은 김은지 원장과 채정호 교수가 사회적 참사와 트라우마 관련하여 2019년에 나눈 특별대담 중 일부입니다.
Q. 채정호 : 선생님이 트라우마에 관심을 두게 된 계기가 무엇인가요?
A. 김은지 : 사실 제 인생도 세월호 전과 후로 나눠진다고 할 정도거든요. 2014년 4월, 5주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때 제가 단원고등학교에서 자원봉사로 2개월 동안 일했습니다. 그 뒤로 2년 가까이 단원고 생존 학생들과 단원고의 많은 간접 경험자들을 만났습니다. 사실은 제가 교과서에서 배운 트라우마는 사람이 충격을 받으면 너무 불안해하고 또 그것이 당연한데, 막상 재난 현장에 나가보니 이런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너무 많은 것이 필요한 거예요. 사람들의 관심, 정부의 서포트, 소셜네트워크 그리고 사회적 그룹의 지지, 그리고 가족들…. 정말 많은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게 되면서 내가 여기서 이렇게 많이 경험한 것을 더 많은 사람한테 알리고, 도움을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에 안산에 개원하여 세월호 경험자들도 만나고, 각종 트라우마를 겪은 분들을 돕고 있습니다.
Q, 채정호 : 선생님이 계속 정신적으로 어두워지고 힘들어지는 것들에 대해서 여러 번 말씀하셨는데요, 선생님은 진정한 정신 건강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A. 김은지 : 저는 세월호 생존 학생들을 보면서 ‘이렇게 많은 증상이 있는데, 어떻게 잘 지내지?’라고 의구심을 품을 때가 많았거든요. 잘 지내는 이유는 아주 단순(simple)했습니다. 곁에서 도와주는 부모님, 곁에서 나를 믿어주는 친구들, 그리고 본인들 말에 의하면 ‘우리가 이렇게 잘 되도록 도와주는’ 사회복지사 선생님과 김은지 선생님(웃음) 등이 있었던 거죠. 힘들어도 그냥 한 걸음, 한 걸음 가는 겁니다. 진정한 정신 건강은 사람이 잘 살 수 있게 도와주는 사회적인 시스템이 얼마나 건강한지까지 포함한다고 생각합니다.
Q. 채정호 : 어른들이 아이들을 건강하게 해주고,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할 텐데, 어른들이 만든 사회 체계 안에서 아이들이 고통받고 있다는 건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우리사회가 정신적으로 힘든 것에 영향이 분명 있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능이 무너지고, 여러 가지 장애, 특히 정신장애까지 가지 않더라도 정신적으로 고통을 많이 받고 괴로워하고 기능이 떨어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거든요. 그런 사람들에게 선생님이 어떻게 하면 좋을지 말씀해주실 수 있을까요?
A. 김은지 : 주로 아이들이나 젊은 분들이 진료실에 와서 “선생님, 제 삶은 왜 이럴까요? 저는 왜 이럴까요?”라고 말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가 좋아하는 단어를 하나 알려주는데요, ‘흑역사’라는 단어를 알려줍니다. 친구들한테 그렇게 얘기해요. “선생님이 생각하기엔 지금이 네 인생에서 ‘흑역사’인 것 같아. 너 살면서 지금보다 힘들었던 때 있어? 아마 없었을 걸? 선생님이 원하는 건 앞으로도 지금이 네 인생에서 유일한 ‘흑역사’였으면 좋겠어.” 제가 레지던트 때, 그때는 누구나 힘든 시기가 있으니, ‘나는 왜 이 정도의 사람일까?’라고 생각하면서 교과서를 뒤졌어요. “나는 우울증에도 맞는 거 같고…, 내가 경계성 인격장애인가?” 이러면서 교과서를 봤어요. 그러면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떡해야 건강하지?’ 하면서 건강한 방어기제를 찾아봤습니다. 아시다시피 유머(Humor), 승화, 이런 게 있잖아요. 그때 제 눈길을 끈 게 ‘예견’이라는 거였어요. 지금은 이렇게 어렵지만 앞으로 다가올 것을 생각하면서 지금 시간을 견디는 거죠. 저는 아이들한테 물어봅니다. “너는 앞으로 어떻게 됐으면 좋겠니? 1년 뒤에 어떻게 됐으면 좋겠니? 어떤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 돈은 얼마나 벌 건데?” 너무 절망적인 상황이라도 사람은 자기 안에 작은 희망이라도 품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저는 고통에 처한 사람이라면 그것에 집중하면 좋을 것 같아요.
Q. 채정호 : 선생님도 꿈이나 비전도 있을 테고, 많은 일을 하고 계시지만 앞으로 하고 싶거나 이루고 싶은 것, 꿈과 비전을 나눠주신다면요?
A. 김은지 : 저는 의사로서 제 삶을 굉장히 사랑합니다. 내담자를 진료실에서 만나는 많은 순간이 기적이고, 그 속에서 제 삶도 달라지고, 이루 말할 수 없는 행복한 순간이 있거든요. (...) 그리고 큰일이 있었지만 사람의 삶이 쉽게 무너지거나 망가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안산이 망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걸 보여주고, 그렇게 되도록 돕고 싶었거든요. 제가 안산에 센터를 만들고 싶다는 게 안나 프로이트 센터를 만나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마음건강 센터를 통해서 ‘트라우마타이즈드’된 사람들이 성장하는 프로그램이나 지역사회 아이들을 돕는 프로그램, 트라우마 환자를 체계적으로 돕는 시스템을 만드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지만, 하나하나 완성되고 나서 제가 정말 하고 싶은 건 ‘안산이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세월호가 사람의 삶을 그렇게 쉽게 망가뜨리지 않았다’라는 것을 상징처럼 보여주는 센터를 짓는 겁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고, 노력하고 있고, 더불어 치유하고 있다는 것들을 보여주는 센터를 만들고 싶어요. 어떻게 보면 거창하지만, 참 진솔한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저의 비전입니다.
채정호 : ‘상처받은 치유자’라는 말씀도 해주셨지만, 안산이 너무 힘든 일을 겪고 회복해 나가고, 원장님 같은 분들이 뛰어들면서 좋은 지역사회로 살아남아 살아간다는 것이 대단한 일입니다. ‘안산’(安山)이라는 이름에 ‘안’자가 ‘안전할 안’자인데, 트라우마 속에서도 평안함이 있는 도시가 될 것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 원장님의 비전과 꿈이 잘 녹아들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재난 트라우마의 현장에서 사회적 지지와 연결을 생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