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화 사는 게 재미없던 중년 남자의 독서치료 일기

문학치료사 박민근이 들려주는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by 생각속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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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의 마지막 구절은 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의 이론을 알면 이해가 쉬워진다. 헤세와 융의 관계는 처음에 비밀로 부쳐졌다. 헤세는 30대에 정신적 방황을 겪었다. 아내가 정신분열병에 걸렸고, 아들 역시 우울증으로 자살을 시도했으며 본인 역시 우울증으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급기야는 심리치료를 시작했고, 융을 만나 직접 치료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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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은 헤세가 정신적 방황을 마침표를 찍고 깊은 곳의 자아와 대면했던 경험을 그려낸 작품이다. <데미안>의 주인공 싱클레어는 내면 탐색을 통해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데미안이라는 거울 속에서 '나의 고유한 모습'을 만난 것이다.



책을 읽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고유한 모습을 발견하지 못한 채 살아간다. 40대 가장 희섭 씨도 그랬다. 그는 중년의 문턱에서 방향을 상실하고 고통스러워했다. 도무지 사는 게 재미없었다. 자신의 뜻대로 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다. 왜 사는지 당최 몰랐다. 책을 읽는 것이 그나마 유일한 위안이었다. 처음에는 혼자서 우울증을 해결해보려 했지만, 오히려 우울감이 심해져서 나에게 상담을 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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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자수성가했다. 도청 소재지에 있는 지역 명문고를 나와 서울의 명문대에 합격했고, 대기업에 취업해 어느덧 50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다.


"선생님, 욜로(YOLO)라는 말 아시죠?"

- 네, 'you only live once'라는 말에서 유래된 말이죠."

"한 번뿐인 인생인데, 나는 왜 이렇게 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거든요. 어떤 날은 종일 그 생각만 할 때도 있어요."

- 희섭 씨가 진심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나요?


오래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현실성이 없는 일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희섭 씨는 학창 시절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집안 형편 때문에 꿈을 접어야 했다. 가난한 형편에 다섯 남매의 맏이였던 그는 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는 꿈을 잃은 좌절감에 방황도 했지만 이미 한참 지난 일인데, 그것이 지금 삶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꿈을 접었다고 해서 지금 오십을 앞두고 뜬금없이 우울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사실 그는 자신이 우울해서는 안될 사람이라고 했다. 남들 눈에는 충분히 부러운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었다. 동창들을 가끔 만나는데, 다들 대기업 임원인 자신을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나머지 형제 중 누이들과 남자 형제 하나는 자신과 둘째 남동생 때문에 대학도 가지 못했고, 지금도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가끔 농사일을 도우러 가면 늘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우울증이란 요물은 그에게 주제넘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 화가가 되기 위해 진로를 바꿔볼 생각을 해보지 않았는지 물었다. 그는 군대에서 산업디자인이라는 전공을 알았고, 전망이 밝은 분야라고 들어서 디자이너의 길을 진지하게 고민했었다. 제대하고 다시 수능을 쳐서 미대에 진학할 생각까지 했지만, 제대 후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보고 끝내 포기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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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상실은 내면의 암과 같았다

그의 삶이 재미없는 이유는 당연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고 있으니, 사는 게 재미있을 리 없었다. 희섭 씨의 삶에는 언제부턴가 기쁨이 사라졌다. 무감동, 무감각뿐이었다. 자기 상실의 시간이 그의 삶을 채워가고 있었다. 자기 상실은 내면의 암과 같았다.


인생의 가장 아픈 감정 중 하나는 지나 온 일에 대한 후회이다. 우리는 왜 더 빨리 그 일을 그만두지 못했던가, 왜 그 일을 조금 더 빨리 시작하지 못했던가, 하며 후회한다. 둘 중 우리를 더 아프게 하는 것은 왜 좀 더 빨리 원하지 않는 일을 그만두지 못했던가 하는 후회이다. 이미 저질러놓은 일들 때문에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소위 '매물 비용의 오류'에 자주 빠지는 것이다. 심리학자 대니얼 카너먼은 "매몰 비용의 오류 때문에 사람들은 열악한 일자리, 불행한 결혼, 전망 없는 연구 프로젝트에 계속 집착하고 매달린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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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상실의 후회에서 벗어나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을 알아야 한다. 인생은 평생에 걸쳐 자기만의 일을 찾는 여정에 가깝다. 우리는 인생의 40퍼센트를 일을 하며 보낸다. 소명의식을 느끼게 하는 일을 하는가, 그렇지 않고 돈이나 명예 정도만을 주는 일을 하는가에 따라 삶의 질은 확연히 달라진다. 행복이나 만족은 소명감을 갖고 일할 때 높아지는 것이다.


철학자 루카치는 "하늘의 빛나는 별들을 보고 갈 수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환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별을 지키기 힘든 시대에 살고 있다.


칼 융이 말한 '페르소나(persona)'를 외적 인격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인간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사회적 관계에 적응한 개인이 만들어내는 인격이 바로 페르소나이다. 페르소나는 원래 배우가 쓰던 '가면'이라는 뜻이다. 모든 개인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가면을 쓰면서 살아간다. 자기를 잃어버리기 쉬운 우리의 삶에서 어떻게 나를 찾을 수 있을까?



하루는 희섭 씨에게 그림책 한 권을 읽게 했다. 요르크 슈타이너와 요르크 뮐러가 함께 만든 그림책 <난 곰인 채로 있고 싶은데...>이다. 주인공은 곰이다. 어느 날 동면에서 깨니 굴 주위에 공장이 들어섰다. 곰은 저도 모르게 공장 노동자가 된다. 얼굴의 털을 면도하고 공장에 들어가 정해진 일을 하는 장면은 가장 인상적이다.


책을 덮고 희섭 씨는 한참 말이 없었다. 어떤 느낌이나 생각이 드는지 대답해 보라는 내 말에 묵묵부답이었다.


“나네요. 그래서 제가 불안하고 우울한 거죠.”

-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았고, 또 살고 있죠.

“지금 동면이 필요한 것 같아요.”


희섭 씨는 상담실 책상 위에 놓인 <데미안>에도 관심을 보였다.


- 헤세는 칼 융에게 직접 상담을 받았다고 해요. 그도 우울증으로 고생했거든요. <데미안>은 '페르소나'에서 갇힌 삶을 벗어나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을 그리고 있죠.

“전,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학창 시절, 뭐가 그리 바빴는지 읽지 못했어요.”


희섭씨는 처음으로 헤세의 소설을 읽었다. <데미안>이 가져다준 울림과 전율은 경험한 적 없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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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중년의 삶은 "외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자신의 무의식과의 싸움"이 필요하며, "자아를 성숙시키고 자기실현을 이루어가는" 목적 있는 삶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는 희섭 씨에게 잘 아는 화가를 한 명 소개해주었다.
그는 그분의 화실에서 다시 미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하며
언젠가 소박한 개인전을 열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
그의 얼굴에서 살짝 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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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민근, <살아갈 희망이 살아갈 희망이다> https://c11.kr/az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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