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치료사 박민근이 들려주는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그래, 독서치료사가 되겠어.
오호라! 유레카(eureka)를 외쳤다. 2004년경 우연히 책 한 권을 손에 쥐면서 터져 나온 탄성이었다. 그 책은 조셉 골드 교수가 쓴 <비블리오 세러피>였다. 우연이라 할 수 없었다. 생길 일이 생긴 것이었다. 2003년 봄부터 나는 국내에 나온 치유서를 빠짐없이 섭렵했다. 오래전부터 심리 서적을 즐겨 읽었지만, 2003년부터는 전심전력을 다해 열독 했다. 그리고 드디어 <비블리오 세러피>를 손에 쥐었을 때, 서광이 비치는 것 같았다. 내 남은 생을 바칠 만한 일을 찾았기 때문이다.
<비블리오 세러피>는 제목 그대로 ‘Bibliotheraphy’에 대한 책이다. ‘Biblio’는 그리스어로 책이나 문서를, ‘theraphy’는 치료를 뜻한다. 책으로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이 비블리오 세러피, 바로 독서치료다. 나는 독서치료보다는 시나 소설을 읽고, 정서적인 글쓰기로 상처를 치유하는 ‘문학치료’라는 말을 좀 더 애용한다.
<비블리오 세러피>를 만나고 내 삶은 확연히 달라졌다. 독서치료사가 되겠다는 나의 열망은 나날이 커졌다. 이제야 내가 살아가야 할 분명한 이유를 찾은 것 같았다. 나는 독서치료에 대한 지식을 차근차근 쌓아갔다. 공부하면 할수록 독서치료는 매력적인 일이었다.
특히 영국의 독서치료에 매료되었다. 영국에서는 2000년대 초반부터 독서치료가 국가적으로도 중요한 치유 방법으로 부상했다. 2014년부터 영국 보건당국은 드디어 독서치료를 우울증 치료의 중심에 놓았다. 현재 영국에서는 ‘책 처방’이 전국적 의료서비스로 제공된다. 책 처방이란 가벼운 우울증이나 불안장애 증상을 겪는 환자의 경우, 약물 처방 대신 자기 조력(self-help) 도서를 먼저 권하는 방법이다. 상상해보라. 정신건강의학과를 찾았을 때, 의사가 증상이 심하지 않으니 약 대신 일단 책부터 몇 주간 읽어보자고 한다면 얼마나 멋지겠는가. 다행히 독서치료를 연구하면서 이를 직접 활용해볼 기회도 많았다.
몇 년간 독서치료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쌓은 후, 나는 본격적으로 독서치료사로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먼저 가정의학과 의사인 형과 함께 독서치료를 활용한 비만 치료 프로그램을 만들어 환자들을 만났다. 형은 독서치료가 비만 치료에 도움이 될 거라는 나의 의견에 동조했다. 비만을 가진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우울증이나 심리문제를 동반한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심리치료 또한 꼭 필요하다. 우리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심리치료가 병행되는 비만 치료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초창기 비만 치료로 만난 여자아이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초등학교 3학년 지희에게는 소아 우울증이 있었다. 맞벌이하는 부모 때문에 할머니 손에서 자란 지희는 식탐이 강했다. 밤늦도록 피자나 라면, 치킨, 햄버거를 제한 없이 먹었다. 누적된 욕구불만을 음식으로 풀었고, 그 때문에 소아비만 증상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지고 있었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친구를 잘 사귀지 못하는 것, 살찐 외모 탓에 친구들로부터 왕따를 경험한 일도 상처를 키우는 일이었다.
“나는 제 모습이 싫어요. 나는 세상에 잘못 태어났나 봐요.”
- 지희야, 그렇지 않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어. 사람은 자신을 바꿀 수 있는 존재거든.
지희와는 정서적인 글쓰기나 문학작품 읽기를 통한 일반적인 독서치료도 함께 했다. 더불어 비만과 관련된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중요한 활동이었다. 지희는 책 읽기를 통해 좋은 삶의 모델을 발견하여 동일시했고, 내면에서 소산(消散, abreaction) 작용이 일어났다. 프로이트가 처음 제안한 소산 작용은 치유적 독서가 내면의 불안과 우울감을 씻어주는 효과를 잘 설명한다. 과거를 반복 체험하고 지속적으로 표현할 때, 소산 작용이 일으킬 수 있는 부작용을 최소화하는 방법이 문학작품 읽기다. 문학작품 읽기는 안전한 소산 작용을 유도한다.
여러 달 후 체중을 쟀더니 소설을 읽었던 소녀들의 체중 감량이 읽지 않은 소녀들보다 더 많았다. 지희 역시 무려 10킬로그램 가까이 체중을 줄이며 정상체중으로 돌아왔다. 우려했던 성조숙증도 멈추었고, 잘 크지 않아 걱정이던 키까지 무럭무럭 자랐다. 나도, 지희도 무척 기뻐하며 좋은 결과를 자축했다.
지희를 만난 뒤로 나는 수많은 비만 환자와 독서치료를 함께했고 큰 성취감과 기쁨을 느꼈다. 내 안에 독서치료에 대한 신앙과도 소명의식이 자리 잡고 있었다. 얼마 후 대형 심리센터로 옮겨 더 다양한 내담자들을 만났고, 그들에게도 역시 각자에게 어울리는 치유서를 권했다. 치유서와 상담을 병행한 심리치료 효과는 대단히 고무적인 것이었다.
독서치료사는 내 운명이 되었다. 심리치료가 빈곤한 한국에, 자살과 스트레스가 범람하는 이 사회에, 치유와 회복을 갈망하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독서치료만 한 대안이 없을 거라는 확신을 갖기에 이르렀다. 치유되지 못한 내면이 얼마나 파괴적인지 잘 아는 나에게 누군가의 치유를 돕는 일은 내 인생을 온전히 바칠만한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길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할 만큼 선한 일이었다. 독서치료사로서 삶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렇게 다짐했다.
나의 상처는 다른 이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중한 경험으로 쓰일 것이다.
나의 치유는 다른 이를 일으켜줄
소중한 양분으로 쓰일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내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것이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 곁에 있을 것이다.
....
그것이 독서치료사로서의 나의 소명이 될 것이다.
- 박민근, <살아갈 희망이 살아갈 희망이다> https://c11.kr/az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