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치료사 박민근이 들려주는 상처와 치유의 이야기
나는 ‘나’를 만났다. 시간에 떠돌던 나를 ‘삶’에 안착시켰다. 비로소 나와 삶이 만난 것이다. 아픈 과거 덕분에 이제야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을 수 있었다. 그때가 서른 중반이었다. 나는 인생을 정말 잘 살아보고 싶었다. 인생을 잘 사는 것, 그것이 나의 최고의 일이었다.
성공한 치유에는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있다. 치유는 만남으로 이어진다. 시골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를 죽음까지 끌고 갔던 도시의 그들과는 너무나 달랐다. 이들은 선함을 잃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비로소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겼다.
내가 만난 선한 한 사람이 있다. 딸아이가 아장아장 걷기 시작할 무렵, 나는 한 사람과 친밀해졌다.
도시를 떠나 부모님의 시골집에 살 때였다. 영철 씨, 그는 나의 첫 내담자인 동시에 최고의 멘토였다.
그는 교통사고로 지적 능력을 상당 부분 잃었고, 정신과 약을 계속 복용하고 있었다. 답답한 공간에서는 종종 공황발작을 일으켰다. 당시 그는 서른 중반의 미혼이었다. 정부에서 나오는 연금과 동네 농사일을 도와서 받은 품삯으로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는 가정을 이루고 자식까지 낳은 나를 무척 부러워했다. 교통사고로 불안장애에 시달렸던 그도 나처럼 시골생활에서 조금씩 안정을 되찾고 있었다. 불안 증상으로 힘들었지만, 그는 행복을 잃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의 미소는 보는 이를 편안하게 했다.
당시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나는 어린 딸을 유모차에 태우고 동네를 자주 돌아다녔다. 그와도 자주 마주쳤는데, 그때마다 그는 미소로 나와 딸을 반겼다. 내가 어떤 말을 건네든 돌아오는 답은 한결같았다.
네 좋아요, 정말 좋아요
그는 베푸는 것이 낙이었다. 그는 겨울을 제외하고 마을 앞산과 뒷산을 헤집고 다니며 먹을거리를 캤다. 봄이나 여름에는 두릅나물, 고사리, 송이버섯 같은 산나물을, 가을에는 도토리, 도라지, 밤이나 더덕 같은 것을 캐서 내려왔다. 그는 자기 먹을 것을 조금 남기고 죄다 마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줬다.
우리 가족 역시 그의 먹을거리에 은혜를 입었다. 그는 밥상의 예수 같았다.
처음에는 낯선 사람을 조심스러워하는 아내 때문에 나도 그를 경계했다. 하지만 그의 연이은 선행에 얼마 지나지 않아 무장해제 되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나의 편견을 무너뜨리는 최초의 사람이었다.
내게는 영원히 떠나지 않는 질문이다. 나는 이 질문을 늘 가슴에 품고 산다. 어쩌면 죽는 순간까지 품고 살아야 할 문제이다. 대개의 심리문제는 정신의 빈곤과 관계가 깊다. 많은 경우 마음의 병은 철학의 결핍에서 비롯된다. 사유 없이 무가치한 것을 쫓으며 세상이 강요하는 대로 사는 삶. 그런 삶은 마음을 다치기 쉽다. 부정적인 생각이 부정적인 감정을 만들기 때문이다. 슬픔이나 불안은 그릇된 생각에서 기원하는 법이다. 그때 심리상담은 일시적인 도움밖에 줄 수 없을 때가 많다.
나를 나답게 살게 할 본질적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치유에 다가설 수 있다. 여전히 우리는 생존에 급급한 일상에 매여 있다. 나 아닌 인형의 삶을 살기 쉬운 것이다. 다들 그렇듯 길을 잃고 헛된 삶을 살기 쉽다. 갈수록 좋은 삶, 건강한 삶을 찾는 길은 더욱 멀어져가고 있다. 이제 자기상실은 너무도 흔한 문제가 되었다.
영철 씨는 산에서 먹을거리를 캐는 것이 즐겁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그것을 나누어주며 큰 성취감을 느꼈다. 영철 씨의 선함에 감화된 마을 사람들은 다시 서로에게 온정을 베풀었다. 내 어머니는 가끔 총각김치나 열무김치를 담아 영철 씨에게 건넸다. 영철 씨는 그것조차 혼자 다 먹지 않고 병으로 고생하는 이웃 노인에게 나누어주었다. 그에게는 함께 나누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었다.
그것이 그의 좋은 삶이었다.
서른 후반, 나는 인생을 걸고서 고민했다. 내가 평생을 바쳐 도전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은 무엇일까를 고민한 것이다. 그리고 답을 얻었다. 크게는 독서치료사가 되는 것, 글을 쓰고 책을 읽는 것, 좋은 남편과 아버지가 되는 것이었다.
서른 중반 이후 독서치료의 탁월성을 확인했고, 이후 독서치료가 내 삶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나날이 커졌다. 내가 경험한 것들을 글로 쓰고, 관심 분야를 연구하는 일에도 열정을 느꼈다. 그리고 가족의 삶에서 깨닫는 총체성은 나를 점점 더 전인적인 존재로 만들었다. 예전의 삶이 혼자만의 성을 짓고 내 것만을 쌓았다면, 이제는 만나고, 베풀고, 소통하고, 좋은 감정을 공유하는 삶을 꿈꾸었다. 다시 하늘에 북두칠성을 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북두칠성은 선명하고 오염이 없는 것이었다.
2010년, 나와 가족은 음성을 떠나 서울 근교로 이사했다. 형님 병원에서 본격적으로 독서치료사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시골을 떠나기 얼마 전, 영철 씨는 또 함빡 웃음을 지으며 산에서 캤다며 더덕을 열 뿌리 넘게 건넸다. 그 더덕들은 밭에 씨를 뿌려 키운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맛과 향이 풍부했다. 나는 아쉬워하며 그에게 서울 근교로 떠난다는 말을 전했다. 그는 무척 서운해 하며 아내와 딸과도 마지막 인사를 살뜰히 나눴다.
어느새 나는 그처럼 친절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에게 배운 대로 만나는 사람들에게 밝게 웃으며
“안녕하세요” “밤새 잘 지내셨어요”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그가 나를 변하게 했다. 그는 나의 친절한 치유자였다.
- 박민근, <살아갈 희망이 살아갈 희망이다> https://c11.kr/azo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