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사빠 Jan 02. 2018

#5. 유럽 축구보다 지독했던 경기 下

"나는 아무 소식 없길래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행복하게 잘 사귀고 있는 줄 알았어... "

왜 헤어졌는지 묻지 않았지만, 수화기 너머로 C의 말들이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그 남자가 아무리 나에게 애정을 쏟는다고 해도 나는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허기짐을 느낄거 같았어. 앞으로도 계속 사귀는 동안 그런 느낌을 받을거 같더라고. 이유가 따로 있는 건 아니야. 내가 먼저 좋아했기 때문인지, 자꾸 나만 애걸복걸하고 있다는 느낌이 지워지지가 않더라고."


C의 목소리는 담담하다못해 건조했다. 마치 갈라지기 일보 직전의 논바닥같았다. 사실 100% 이해할 수 없었다. 먼저 좋아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거 같다니...


팩트는 이거다. 먼저 좋아해서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 게 아니라 C의 성격 탓이었다. 그녀는 그에게 온전히 사랑을 쏟아부어줄, 차고 넘치게 부어줄 그런 사람을 원했지만, 정작 사귄 남자친구가 자신을 떠받들어주며 얼르고 달래줄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는 거다.


그런 점들이 쌓이고 쌓였을 테고 '노력해서 성취한 여자'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가 자신에게 애걸복걸하지 않는다. 고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사랑 앞에서 그녀는 솔직했다. 술에 취해 있는 진상 없는 진상도 부렸고, 그 진상의 한가운데에는 '나를 좀 더 봐달라'는 외침이 있었다. 진상만 부린 것은 절대 아니었다.

월급이 여자친구보다 훨씬 적었던 남자친구를 위해 밥값도 척척 계산했고, 친구들과 함께 만나는 자리에서 남자친구와 친구들 몰래 미리 계산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리고 권태기가 올 것 같으면 여행을 계획하기도 했다. 모든 것은 다 그녀가 추진했고, 옆에서 보는 나는 노력이 가상해서라도 그녀에게 올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어쨌든 결론이 지어진 사랑과 이별 앞에서 어떠한 말도 위로가 되거나 조언이 될 수 없다는 걸 알았던 나는 침묵했다.


"잘 된 거야. 어차피 나는 늘 끝을 생각하고 있었거든. '언젠가는 이 사랑에 종지부를 찍을 날이 오겠지. 그때가 되면 꼭 이 남자가 후회했으면 좋겠다'하면서 그날만을 기다려왔는지도 모르겠다. 경기는 끝났어. "


C에게 연애는 길고 긴 경기였다. 남자의 사랑이 식어가는 그녀의 사랑보다 커질 때까지 기다린 것이다. 그리고 결전의 그날 '헤어지자'고 말을 꺼냈던 거겠지.


이후 한달정도는 종종 C에게서 그날 이후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엑스남친에게서 연락이 왔다. 돌아와달라더라. 눈물을 흘리는데 나도 감당이 안되더라 등등)


확실한 건 C는 사귈 때 동안은 남자친구에게 받은 것 하나 없이 모든 것을 퍼줬다는 것. 그리고 아낌없이 사랑했다는 것. 그래서 헤어지자고 나서도 후회없이 돌아설 수 있었다는 거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처럼 그 남자의 사랑이 그녀를 충족시키진 못했지만, C는 그와 연애했다는 사실을 후회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에 감사하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줘서 고맙다고 했다.


C의 연애는 지독했다. 긴 경기를 끝낸 그녀는 승자였다.




작가의 이전글 #4. 유럽 축구보다 지독했던 경기 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