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 없이 부탁하는 사이에 선물이 필요한 이유
살다 보면 부탁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부탁하려니 미안해서 작음 마음을 담아 선물을 하는 경우도 생깁니다.
물론 가장 좋은 것은 선물이나 대가 없이도 부탁을 들어줄 수 있는 사이가 가장 좋겠지요.
하지만 제가 가장 좋아하는 관계는 굳이 선물 같은 거 줄 필요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욱 선물 같은 걸 챙기는 사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함께 파트너십으로 일하고 있는 디자이너가 책 한 권을 추천해 달라고 부탁해 왔습니다. 책 한 권 추천해서 보내달라는 요청이죠. 제가 책방을 하니 자주 받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그럼 기쁜 마음으로 그분에게 도움이 될 책을 찾아서 보냅니다. 얼마 전에도 꼭 소장하고 싶은 절판된 책을 찾아달라고 해서 그 책을 보내면서 슬쩍 요즘 부쩍 힘들어하는 그 분에게 도움이 될만한 책 한 권을 같이 보내기도 했고요.
오늘은 조금 더 전문적인 책을 찾아달라는 요청이었습니다. 흔쾌히 알겠다고 얘기했는데, 카카오톡으로 커피쿠폰을 전송했더군요. 저도 그 친구에게 굳이 부탁한 책 이외의 책을 선물할 필요가 없었고, 그 분 역시 저에게 책값을 지불하는데 따로 커피쿠폰을 보낼 필요는 없었을 겁니다. 그럼에도 그런 관계는 조금 더 풍요로워진다고 생각합니다.
선물을 줄 때 생각해야 하는 한 가지는 이 선물이 상대방에게 '가치 있을까?'라는 질문입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내가 선물을 주니까 상대방의 보답을 기대해선 안됩니다.
반대로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다면 반드시 보답할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언뜻 손해 보는 것 같은 이 방법은 제가 생각하는 가장 좋은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상대에게 받은 것은 선물이지만, 중요한 건 그 선물에 담긴 마음이니까요. 나 역시 내 마음을 담아 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 기준에서는 그게 이상적이고 느낍니다. 여기서 오해가 없으셔야 하는데, 마음이 중요하다는 것이지, 마음만 담으면 다른 건 상관없다는 뜻인 결코 아닙니다. (잘 아시다시피 마음을 가장 잘 표현하는 방법 중에 하나는 금전적 가치가 높은 것을 선물하는 것이니까요.) 하지만 가격에 마음을 담든, 정성으로 마음을 담든, 최소한 마음은 담아야 한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그래야 상품이 아닌 선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담는 것은 선물이 되는 기본 요건일 뿐 그것이 어떤 요구를 위한 수단이 되는 건 좋지 않습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마음을 담았다, 진심을 담았다고 말하곤 하지만, 사실 진심이라는 단어는 자칫 폭력적일 수 있습니다. 나는 진심을 담았으니 상대도 알아줘야 한다는 무언의 기대가 깔려있달까.
그러므로 마음을 담는다는 건 적어도 선물을 준비하는 시간만큼은 오롯이 상대를 생각하고, 그 생각의 결과를 토대로 판단한 가치를 담을 뿐, 상대방이 알아주느냐 마느냐는 상관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내가 정한 원칙에 따라 최소한의 마음을 담으면 되고, 상대가 그걸 알아준다면 감사한 일이지만, 알지 못해도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내 마음과 행동을 내 뜻대로 하는 것은 자유이자 권리이지만, 타인의 마음과 행동을 내식대로 기대하는 건 관계에 가장 나쁜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나아가 그것을 강요하게 되면 그거야 말로 폭력으로 변질되는 것이겠죠.
연말이 되면 이런저런 이유로 선물을 받는 일이 많아서 문득 무언가 주고받는 사이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봤습니다. 관계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걸 알지만, 그것만큼 어려운 것도 없지 싶네요. 늘 하는 생각이지만, 관계는 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모를 때고, 모른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잘 아는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