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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Apr 07. 2024

댓글이 달리지 않는 작가

*타 플랫폼 기준으로 작성한 글로 브런치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왜 네 채널에는 댓글 다는 사람이 없냐'는 말. 


재작년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에 유료 채널을 열겠다고 나섰을 때, 믿을만한 지인들 몇 명에게만 채널을 소개했고 그 친구는 그중 한 명이었다. 채널이 꽤 커졌다고 하는데도 반응이 없는 게 그 친구 눈에 의아하게 비쳤나 보다. 그런데 사실 친구가 모르는 비밀이 몇 가지가 있었다.


일단 내 유료 채널에 댓글을 달 수 있는 건 유료로 구독한 독자들만 가능하다. 글을 읽을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 말고도 작가가 직접 버선발로 마중 나가 응대하는 것 역시 유료 회원의 혜택이라고 생각했기에 차등을 둔 것이었다. 조회수가 만 단위가 넘어가도 실제로 구독하지 않는다면 댓글이 달리지 않으니 상대적으로 댓글이 적어 보일 수밖에(다만 '좋아요'는 누구나 클릭할 수 있다).


그리고 오랫동안 콘텐츠를 연구하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인데, 이른바 '1000:1'의 법칙이 있다. 사람들은 소위 '눈팅'이라고 하는 조용한 감상을 주로 하는 편이고 표현까지 하는 경우는 드물다. 유튜브나 기타 다른 콘텐츠를 보더라도 조회수 1000에 좋아요나 댓글 같은 관심 지표가 붙는 게 일반적이다. 그래서 1000:1의 비율을 상향이든 하향이든 어느 쪽으로 깨부수고 있느냐에 따라 사람들의 호감도를 어느 정도 가늠할 수 있다. 클릭 한 번으로 의사 표현이 가능한 하트 표시가 가장 많고, 그다음이 댓글, 그리고 공유 순인데 보조 지표는 '공감 > 댓글 > 공유' 순으로 세상 어느 플랫폼을 가도 이 비율은 비슷하다. 어쨌거나 내 유료 구독자가 천 명쯤 되고 조회수가 10만 쯤 되면 달지 말라고 해도 댓글이 달리긴 할 것이다. 현재 나의 구독자 수나 조회수 지표를 살펴보면 이 정도의 고요함은 예견된 일이긴 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딱히 독자들과 친하게 지내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다. 사실 문체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는데, 나처럼 딱딱한 서술체를 쓰는 사람은 독자들과 친밀함을 쌓기는 어렵다. 신뢰감을 줄 수는 있어도 말이다. 그게 무슨 차이냐고? 간단한 지문을 예시로 들어보자.


만약 제가 이렇게 말을 부드럽게 한다면 어떨까요. 많은 심리학 서적에서는 상담심리학에 기초해 문체도 독자가 읽기 편하게 구어체, 대화체를 많이 씁니다. 이렇게 말이죠. 대화를 하는 듯한 문체로 글을 써 내려가면 부드럽게 느껴지고 옆에 앉아 말을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친근함을 유도할 수 있습니다. 


문체만 바꿨을 뿐인데 묵독하고 있는 내 머릿속의 내레이터가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지 않은가. 어쨌거나 나는 이런 스타일은 아니기에 독자와 심리적 거리감을 좁히기는 힘들 것이다('것이다'로 끝나는 구절을 자주 써도 그렇다).


물론 친구 앞에서 이런 현실적인 문제들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았다. 다만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댓글이 안 달리는 건 글에 딱히 불만도 토를 달 것도 없이 완전하거나 아니면 아예 관심이 없어서가 아닐까. 후자인 것 같지만 전자라고 믿고 싶다."


비록 말은 그렇게 했지만 후자에 가깝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진짜 글에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단 댓글을 다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는 말이다. 나 역시도 유튜브에서 좋은 영상을 보거나 인터넷 뉴스에서 좋은 기사를 읽어도 댓글을 다는 일이 없으니까. '좋아요' 표시로도 충분하지 않나? 내가 독자일 때를 생각해 역지사지해보면 답은 뻔하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 달리는 댓글을 보면 나로서는 굉장히 고무된다. 그리고 한 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인생의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다가 글을 읽고 용기를 얻었노라는 댓글을 읽으면 그만큼 큰 감격도 없다가도, 누군가에게 그렇게 받아들여질 글을 썼다는 데 대해 책임감도 느낀다. 또한, 댓글이 마냥 좋기만 한 것도 아니라서 어떤 글은 심한 논란에 휩싸이고 독자들과 피곤한 논쟁에 휩싸이기도 한다. 


그래도 내가 누군가에게 감명을 줄 수 있는 글을 썼다는 전제 하에 좋은 댓글이 큰 힘이 되는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결과나 성패를 알 수 없는 일에서 지표를 가늠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도 더더욱 그렇다. 


극중 샤론 테이트가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관람하면서 관객들의 반응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를 보면 샤론 테이트 역을 연기한 마고 로비가 극장에서 자신이 출연한 영화를 보며 관객들의 반응을 힐끔힐끔 쳐다보는 장면이 나온다. 객석의 관객들이 환호하거나 웃으면 들뜬 표정을 짓기도 하고, 그 한 컷을 찍기 위해 부지런히 연습했던 쿵후를 조심스레 따라 해보기도 한다. 


영화 전체로 보면 서사에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낭비되는 신처럼 보이는 그 장면을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이 굳이 넣은 것은 그만큼 배우라는 존재가, 혹은 감독이라는 존재가 대중들의 시선에 고취되는 존재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아니, 그보다는 무정형의 가치를 가치 있다고 믿기 위해서는 그걸 함께 보는 사람의 시선이 필요하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일지도.


긴 목표를 흔들림 없이 견지하려면 그 과정에서 소소하나마 이정표를 세워둘 필요가 있다. '왜 아무도 댓글을 달지 않냐'는 질문은 가볍지만 가벼울 수 없는 문제다. 언젠가 친구가 내게 글을 쓸 때 어떻게 버텼냐고 했을 때도 나는 '작은 성공'을 계속해서 해 볼 필요가 있다고 했는데, 그게 글을 써서 받은 하트 모양 좋아요 표식이든, 정성 들여 쓴 댓글이든 간에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유의미한 형태로 나아가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 그런 자기 믿음이 하나씩 쌓여서 결국은 목표에 도달할 자신감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진정한 예술인의 혼으로 홀로 위대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위인들도 있기 마련이지만, 평범의 범주에 있는 우리가 무엇인가를 끝까지 끌고 가려면 자기 효능감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글이나 영화뿐만 아니라 세상 어떤 일이든 다 그렇다. 


한 예로 나는 이따금 전에 살던 동네에서 자주 시켜 먹던 치킨집을 지금도 종종 방문하는데, 그때마다 사장님은 그 먼 거리를 닭 한 마리 먹으러 왔냐며 매우 기뻐한다. 영화 속의 샤론 테이트가 아무리 대단한 배우였다고 해도 객석에서 환호성을 터트리는 관객들에게 기쁨을 얻듯이 치킨집 사장님에게도 그저 맛집을 찾으러 온 나의 발걸음이 하나의 표식처럼, 자랑스러운 역사가 되는 것이다.


<콘택트>에서 묘사된 외계 문명의 장비


어쨌거나 나의 경우는 댓글은 잘 달리지 않지만 꾸준히 읽는 사람이 있다는 걸 인지하는 것으로 족하다. 철학이나 수학이 현상의 진리를 발견할 때는 반복되는 현상 속에서 일관된 원칙을 찾거나, 실재하는 두 현상 사이의 인과관계를 분석한다. 영화 <콘택트>(1997)의 결말에서 외계인이 전수해 준 순간이동 장치를 통과한 주인공이 '장치는 몇 초 간 자유낙하했을 뿐, 실제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듣지만, 결과적으로 주인공이 탑승한 장치에 18시간 분량의 녹화 파일이 발견되면서 주인공의 경험이 허언이 아니게 된다. 장치가 떨어진 건 몇 초에 불과한데 열여덟 시간짜리 파일이 존재하는 게 말이 안 되니 말이다.


그러니까 댓글이 왜 달리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굳이 '댓글'이 달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이 글을 읽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형태로든 계속해서 기록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다. 그런 기록들이 나에게는 영화 <콘택트>에 묘사된 '열여덟 시간짜리 파일'이고, 사람들 눈에 잘 띄는 댓글과 같은 지표가 아니어도 분명히 경험하고 있으며 기록되고 있는 '작은 성공'의 집합인 것이다. 


정작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것은 댓글이 달리지 않는 것보다 글을 쓸 이유가 없어질 때가 아닐까 싶다. 결국 작은 성공이라는 것도 언젠가 도달할 목표를 위해 단단히 주춧돌을 하나씩 세워두는 것인데 끝내 집을 짓지 않기로 한다면 그게 다 소용없는 일이 돼버린다. 독자들은 나름의 신뢰 사인을 보내고 있는데 '뭐야 댓글이 없잖아'하고 글쓰기를 관둬버린다면 그만큼 황당하고 허망한 일도 어디 있겠는가. 


댓글 같은 지표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그 지표들이 모여서 만들어내는 무엇일 터. 그래서 나는 다시 친구가 그 질문을 해온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댓글이 달리면 좋고, 안 달려도 누군가에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자부심으로 계속해서 살아가고 싶다'라고 말이다.





P.S : 근데 브런치는 구독자가 계속 줄어드는 걸 보니 확실히 후자가 맞는 것 같다



*본문 사진

-인터넷 커뮤니티,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았다' 이미지

-영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2019) 중

-영화 <콘택트>(1997)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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