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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민 Mar 29. 2024

망해줘서 고마워요



인생에 이유가 없다는 건 사람을 여러모로 피폐하게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도 호시절엔 잘 나갔지만 망해버려 서로에게 상처로 남은 두 사람이 등장한다. 


한때 촉망받는 영화감독이었으나 주연배우의 발연기로 영화를 말아먹고 차기작도 내지 못한 채 좌천된 박기훈, 그리고 그 밑에서 주연배우로 활약하려 했으나 박기훈에게 처절한 구박을 받고 연기에 자신감을 잃은 채 결국 작품을 말아먹은 최유라.


집에서 눈칫밥 먹는 게 서러워 친형과 함께 차린 청소방에서 일하던 박기훈은 자신이 아파트 계단에서 매번 치우던 토사물의 주인이 전에 그토록 구박했던 여배우 최유라라는 걸 알게 된다. 산발한 머리에 씻지도 않은 몰골로 이웃주민에게 신랄하게 욕을 먹던 그녀가 짠했던지 명함을 주고 나온 그는 어느 날부터 한껏 꾸미고 자신에게 들러붙은 최유라에게 조롱을 받게 된다. 잘 나가는 줄 알았더니 망해서 정말 다행이라고, 기쁘다고 말이다.


신난 유라가 기훈의 청소방에 찾아와 선물을 주고 간다


까닭 없이 고맙다며 선물을 하지 않나, 동료 배우를 만나 '이 감독님 망했대'라고 소문을 내질 않나, 가뜩이나 망해서 심란한 사람이 보기에는 정말 미친 사람인가 싶다. 그래도 옛정을 생각해 호의를 베풀었는데 이렇게 되갚는다니.


과거에 한 짓이 있으니 차마 어쩌지는 못하고 속만 부글부글하던 기훈이었지만 한편으론 인생이 망가져버린 유라가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녀가 들러붙는 것까지는 억지로 막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 유라의 반복된 조롱에 기훈은 폭발하고, 마침내 그녀의 진짜 속마음을 알게 된다.



"(중략) 망가지는데 왜 좋아해? 너보다 못한 인간들 보면서 아 내가 쟤보단, 저 인간들보단 낫지 뭐, 그런 거 아냐 지금. 근데 그걸 사람들 앞에 앉혀놓고 대놓고 말하냐?"



"(중략) 들어봐요 좀. 인간은요, 평생을 망가질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요. 전 그랬던 것 같아요. 처음엔 감독님이 망해서 정말 좋았는데, 망한 감독님이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더 좋았어요. 망해도 괜찮은 거구나.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망가져도 행복할 수 있구나. 안심이 됐어요. 이 동네도 망가진 것 같구, 사람들도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전혀 불행해 보이지 않아요. 그래서 좋아요. 날 안심시켜 줘서."



성공을 목전에 둔 예민한 감독에게 상처를 받아 영화를 망치고서 인생이 끝난 줄 알았던 유라는 쓰레기 산 같은 방구석에 자기 자신까지 버렸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만난 감독은 쫄딱 망해서 잘하지도 못하는 일을 되는대로 하고 있질 않은가. 그래서 처음에는 자신을 비판하던 사람이 망한 것이 결국 '그 사람의 잘못이지 나의 잘못은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이어져 그 해방감에 기훈을 찾았지만 유라는 점차 다른 이유로 기훈의 실패를 찾아다니게 된다.


가만히 보면 기훈의 주변에는 다 뭔가를 성공적으로 이끌다가 어느 순간에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있다. 하지만 모두 소박하나마 자기 일을 다시 되찾고, 이따금 동네 주점에 모여 가족처럼 왁자지껄하게 하루의 힘든 일을 풀어내는 광경을 유라 앞에서 보여주었다. 그렇게 한 번 망했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삶을 꾸려나가는 그들의 모습을 유라는 좋아했다.


망가진 인생을 조금씩 일으키는 기훈에게 유라가 고맙다고 하는 건 결국 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진실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믿음에 대한 감사다. 기훈이 망해서 유라처럼 모든 걸 포기한 채 체념하고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건 기훈이 성공해서 잘 나가는 것보다도 더 유라에게 끔찍한 일이었을 것이다. 


망가져 버릴 사람에게 혹독한 질책을 받고 쓰러진 그 자신은 대체 얼마나 하찮게 느껴지겠는가. 그런 점에서 기훈은 유라에게 거울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새롭게 만난 기훈의 모습은 유라가 가장 원했던 모습이면서 답이 되기도 한다. 망했지만 그따위 무슨 대수냐는 듯 잠자코 살아가는 것.


다시 배우 일을 시작해보겠다는 유라


인생은 언제나 계획대로 되는 일이 없다. 작건 크건 풍파를 맞아 가기로 했던 길을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있고 더러는 길이 끊어지는 경우도 많다. 그 순간 주저앉고 모든 걸 체념한 채 의지를 잃는 것쯤이야 너무도 쉽지만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털고 일어나 걷기라도 시작해 본다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기훈의 '아무렇지 않음'은 꼭 유라에게뿐만 아니라 체념의 늪에 다다른 사람들 누구에게나 위로로 다가올 것이다. 그건 실패라는 한 사건을 곧이곧대로 인정할 뿐 아니라 그것이 인생 전체를 돌아보면 단순한 하나의 사건이었음을, 실패라는 게 내 삶을 집어먹지 않도록 그 덩치를 한없이 작게 만들어버리는 일종의 마법이기도 하다. 


결국 구겨진 인생 다시 펼쳐놓으라는 유라의 협박(?)에 입에 잘 들러붙지 않는 응원도 하고 칭찬도 하던 기훈은 다시 배우 생활을 시작하겠다는 그녀의 활기찬 모습을 보게 된다. 망해서 다행인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망해서 배우는 것도 있기 마련. 유라는 실패를 털어내는 법을, 기훈은 오만을 털어내는 법을 서로를 통해 배운다.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드라마의 메인 플롯과는 다르게 이 두 사람의 에피소드는 해피엔딩으로 끝맺지는 않지만, 두 사람의 이야기가 주는 여운은 분명 메인 플롯의 굵직한 이야기 못지않다. 유라가 기훈에게 말했던 말은 망해줘서 고맙다기보다, 오늘도 열심히 버텨줘서 고맙다고, 그래서 그걸 지켜보는 사람들도 일어설 힘을 갖게 된다고 말하려 했던 게 아닐까. 


절망의 끝에는 절망만이 있다고 보여주는 사람보다 작은 일이라도 의지를 갖고 살아내는 힘을 가진 사람이 비로소 용기를 주는 법이다. 어쩌면 오늘 별 것 아닌 일을 해낸 것 같아도, 그저 하루를 열심히 살아 이겨냈다는 것뿐일지라도, 그것만으로도 이미 주변에 좋은 기운을 담뿍 퍼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어떤 실패와 고난 속에서도 오늘을 살아낸 모두가 기훈이고, 설령 유라처럼 당신의 성실에 감사하는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 삶은 그 자체로 특별한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두어야 할 것이다.





*본문 사진

-tvN 드라마 <나의 아저씨>(2018)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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