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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unseth Apr 14. 2022

복 있는 사람이 되는 방법

그냥 걷다가, 짜이를 짠!

늦은 아침을 먹고 동네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새와 매미 소리가 서로 이기겠다고 우는 아침이었다. 따끔한 햇살과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지난밤에 걸었던 바다 근처까지 갔다. 밤의 안온함은 잠들었고 청량한 활기가 깨어나 있었다. 그 바다의 앞에는 지난밤에는 보지 못했던 게스트하우스가 떡하니 있었다. 지금껏 걸으며 본 세심하게 가꿔진 집들과는 다른 느낌의 집이었다. 잘 닦인 길 위가 아닌 조금 높은 언덕 위에 지어진 그 집은 정말이지 유랑자들의 집 같았다. 언제든 미련 없이 떠날 수 있고, 누구든 친근하게 와서 쉴 수 있는 그런 집. 이런 게 있었네! 하며 그 집을 올려다보던 우리는 테라스에 나와있던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은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우리를 동네 이웃으로 착각했나? 싶었지만 일단 굿모닝! 하면서 인사했다. 모닝이라기엔 약간 늦은 감이 있었지만.



굿모닝!
어디 가요?
저희요? 어, 저희 산책, 그냥 산책이요!
그래, 다녀와요!
네에! 다녀오겠습니다!

낯선 얼굴들과 안부를 나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걸었다. 이상하게 기분이 참 좋은 아침인사였다. 문득 웃음이 났다. 우리는 잠시 멈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껄껄 웃었다. 먼저 웃음이 멎은 내가 말했다. 아 좋다! 뒤이어 웃음이 멎은 라모도 했다. 아! 좋--다! 


우리는 제주에서의 시간을 시작하며 이 동네의 어귀에서 지어 불렀던 아무 노래를 또 만들어내면서 마을을 걸었다. 키가 크은 야자수 나무를 지나고, 빨래가 잔뜩 널린 누구의 마당도 지나고, 잠이 덜 깬 치즈색 고양이도 지나고, 마을 중간에 뜬금없이 있는 옛 빨래터도 지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우리는 언덕 위의 게스트하우스를 지났다. 금은 어색한 아침 인사를 나눈 사람들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왠지 잘 다녀왔습니다! 하고 인사라도 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에 쭈뼛대며 집을 올려다봤다. 아까의 사람들이 아까와 같은 모습으로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산책 다 했어요?
네에! 이제 집에 가려고요!
올라와! 차 한 잔 먹고 가!
어, 엇 진짜요?
진짜지 그럼!
오..! 네..!

홀리듯이 올라간 그 집은 가까이서 보니 확실히 더 멋있었다. 그 집의 이름은 아프리카 게스트하우스. 정겨운 야생의 느낌이 곳곳에 묻은 집이었다. 알지 못하는 친구들이 다녀간 흔적이 많았다. 나무로 지은 바 테이블이 있는 테라스의 앞으로는 청량한 아침의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매미는 울고, 바람은 살랑였다. 테라스에 앉은 낯선 친구들의 머리카락과 드림캐쳐가 나부꼈다. 달랑- 하는 풍경 소리가 아침을 더 아침답게 했다. 이 집에서 좋은 꿈을 꾸고 간 사람들이 많았으리라.


그들의 평화로운 티타임에 갑작스레 초대된 우리는 일단 올라가긴 했으나, 누군가에게는 불청객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멀뚱히 집의 입구에 서 있었다. 그러자 테이블 위에 앉아, 긴 머리를 질끈 묶고 수염을 길게 기른 멋진 어른이 말씀했다. 잠깐 앉아 있어. 조금만 더 끓이면 돼. 우리는 네에, 감사합니다. 하면서 낯선 친구들의 사이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자리에 앉은 우리는 우와, 너무 좋다. 여기 짱이다. 하면서 감탄을 연발했다. 사실이었다. 아래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멀리지의 바다를 볼 수 있었다.

경상도에서 왔죠?
어! 어떻게 아셨어요?
하하, 어떻게 알긴.
어디까지 다녀왔어요?
저어기 키 큰 야자나무 있는 데요.
어어 꽤 멀리까지 다녀왔네.

낯선 친구가 우리의 출신지를 알아맞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우리는 분명 사투리를 쓴 적 없는데. 여기에서 내뱉은 말이라곤 안녕하세요, 우와, 너무 좋다, 짱이다. 정도뿐인데. 낯선 친구들과 시답잖은 얘기를 잠시 나눴다. 참으로 이상하고 정겨운 아침이었다. 곧 긴 머리, 긴 수염의 멋진 어른, 그러니까 유랑자의 집을 지키고 있는 주인아저씨가 주전자 가득 끓인 차를 들고 나오셨다. 그 차의 이름은 짜이. 인도에서 즐겨먹는 차라고 했다. 한 여름의 뜨거운 차라니. 아이스는 없나요?라고 할 뻔했다. 이열치열의 힘을 믿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우리는 짜이를 짠! 하고 인생 첫 짜이를 마셨다. 목을 타고 속으로 내려간 짜이가 몸과 마음을 따끈하게 데웠다. 우리의 첫 짜이는 뜬금없고, 정겹고, 감사 맛이었다.


니들도 먹고 더 마셔.

네에- 맛있어요! 감사합니다!

감사할 것 없다. 니들이 복이 있으니까 먹는 거다. 올라오란 말에 이렇게 주저 없이 딱 올라왔으니 누려야지!


아저씨는 우리에게 짜이를 더 마시라고 하셨지만, 한 잔으로 충분했다. 그 차 함께 내어주신 한 마디의 말 덕분에 온 마음이 든든해졌으니까. 잔을 다 비우고 우리는 낯선 친구들과 아쉬움 없는 작별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유랑자들의 집에는 작별의 아쉬움이 없어야 하는 법. 그 집을 내려와 우리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우리는 아까처럼 껄껄 웃었다. 아무 말 없이 그저 껄껄 웃다가 우리는 번갈아가면서 말했다.


아- 좋다!

그러게, 진짜 좋--은 아침이다!


그래, 정말이지 멋진 아침이었다. 기분 좋은 산책길, 낯선 친구들과 함께 한 첫 짜이. 약간은 어색하이상하게 익숙한 평화, 든든히 채워진 속. 이 모든 것이 갑작스러운 초대에 주저 없이 응한 우리가 갖게 된 복이었다. 아니, 우리가 복이 있는 탓에 누린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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