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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십일월 Oct 18. 2019

#3. 나는 계약직 조교였다

직업에 귀천이 어딨어, 능력에 귀천이 있는거지

   어느 대학교에서 계약직 조교로 근무한 적이 있다. 내 인생 첫 직장이었다. 대학원도 좀 다니고, 영어나 논술도 좀 더 공부할겸 만만히 생각하고 들어간 자리였다. 언제든 다른 대학의 정규직으로 입사할 수 있으니(그땐 정말 그런 야무진 꿈이 있었다) 잠깐 있기에는 이만한 일이 있을까 싶었다. 


  잠깐은 무슨, 2년 꽉꽉 채웠다.


   수학이 싫어 국어교육 전공한 사람인데, 무려 예산을 담당했었다. 말이 듣기 좋아 예산이지, 주류까지 포함해서 법인카드로 결제해버린 영수증 들고 가 다시 계산하기, 없어진 영수증 다시 받기 뭐 그런 것들이 나의 주된 업무이곤 했었다. 지출결의, 예산 모자라지 않게 쓰시라고 전화드리기, 사무실 다과 채워넣기 등등.


  내가 경험한 계약직 조교는 정말 대학 구성원 중 가장 밑바닥, 가장 아랫사람이었다. 나는 능력이 결코 작은 사람이 아닌데, 그곳에 있는 사람들은 나를 꼭 작은 사람으로 느끼게 했었다. 


  오래 있어봤자 2년 있을 사람이고, 계약직이라는 것이 그들에게는 마치 하찮은 존재였나보다. 


  패션에 관심이 많은 나는 늘 멋지게 입고 출근을 하려 노력했다. 점심시간에는 꼭 도서관에 들려 영어책 한권, 좋아하는 추리소설 한권씩 빌려와 퇴근 후 꼬박꼬박 나만의 시간을 가지곤 했었다. 내가 속한 사무실, 혹은 업무상 가게 되는 공간에서 직원들의 대화를 한번도 허투루 들은 적이 없다. 대학에서 진행되는 수많은 업무들에 대해 귀동냥으로 얻게 되는 지식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늘 전화를 친절하고 유쾌하게 받았다. 다른 사람의 업무라고 해서 그에게 전화를 돌려주는건 왜 그렇게 자존심이 상하던지, 언제든 대답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오가는 공문들과 산재되어 있는 자료들을 틈날 때마다 살펴보곤 했었다.     


  업무에 욕심이 있었다기 보다는, 그냥 그 일이 그렇게 재밌었다.


  그래서, 꼭 대학에서 일을 하고 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래야 행복할 것 같았다.




세상에 허투루 쌓이는 경력은 없다

  덕분에 내가 맡게 된 지금의 이 업무들이 생소하지 않았고, 어느 자리에서든 의견을 낼 수 있었다. 더 깊이있게 접근하고 새로운 걸 만들어 낼 수 있게 되었다. 남들이 보기에 하찮고 작은 위치에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나의 발전 가능성이 작다고 생각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조교로 근무했을 당시, 한숨쉬는 나에게 팀장님이 그러셨다. 


  "A4용지 쌓는다고 생각해. 그렇게 한숨쉬면서 처리하는 일 하나하나가 티도 안나는 짜증나는 일인 거 같지? 나중에 봐라~ 어마어마하게 쌓여있을거야."


  조교로 근무하며 대학의 정직원을 생각하고 있는 선생님들이, 혹은 다른 조직에 있으나 막연히 대학에서 근무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현재의 자리에서 내쉬는 한숨에 절망하지 않기를. 지금의 자리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그 한장한장의 A4용지들을 기대하며 소소한 즐거움을 찾고 있길 바란다. 


  그리고 그 소소한 즐거움이 나의 글을 읽는 것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을 듯! 

  



* 개인 사정으로 인해, 너무 오랫동안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부지런히 쓰겠습니다. 모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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