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을 증명하는 일

두 예술인의 죽음

by 정민희





2010년과 2011년. 두해 동안 두 예술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 일 같지 않았다. 어쩌면 미래의 내 모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프고 무섭고 서럽고 두려웠다. 생활고에 시달리다 사망한 두 예술가. 당시의 나는 지금보다 더 불안했고 매일 같이 슬퍼했다. 그들과 나를 동일시하게 생각했고 실제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비슷한 환경에 속해있었다. 나는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의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의 노래를 들으며 꾸준히 곡을 내는 그를 부러워했었다. 나도 이렇게 꾸준히 작업하는 사람이 되어야지. 이런 생각을 했었던 것 같다.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이란 이름으로 활동하던 가수 이진원 씨(2010년 사망)와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씨(2011년 사망) 등이 생활고와 지병에 시달린 끝에 사망한 뒤 예술인들의 열악한 창작 현실에 대한 세간의 관심이 높아졌다. 이는 곧 예술인 복지법 제정에 불을 지폈고, 정부는 지난해 11월 ‘예술인 복지법’을 시행함과 동시에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을 출범시키는 등 예술인의 처우 개선을 위한 노력에 나섰다. 그렇게 ‘예술인 복지법’이 시행된 지 9개월째에 접어든 지금, 과연 예술인들의 복지환경은 나아졌을까. 이에 대해 정작 예술인들 중 상당수는 그 효과에 대해 의문이라고 말한다.


 ‘달빛요정 역전만루홈런’ 이진원. 그는 2003년에 데뷔해 정규앨범 3장과 미니앨범 3장을 발매한 인디 뮤지션이다. 비록 언더 그라운드를 주무대로 활동했지만 ‘절룩거리네’, '스끼다시 내 인생’, ‘나의 노래’ 등과 같은 히트곡으로 인기를 끌었다. 그럼에도 그는 좀처럼 가난의 굴레를 벗지 못했다. 곡을 만들고, 음반을 내고, 클럽에서 노래를 했지만 그의 연수입은 1,000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을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던 그는 결국 2010년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그의 나이 단 서른일곱.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 한국예술 종합학교 영화과를 졸업한 그녀는 한때 실력과 재능을 겸비한 인재로 촉망받았다. 하지만, 그녀의 실력과 재능은 채 세상의 빛을 보지 못했다. 대학 졸업 이후 그가 완성한 시나리오들이 더 이상 영화화되지 못한 것. 그리고 2011년, 그녀는 설 연휴를 앞둔 어느 겨울날 반지하 월세방에서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됐다. 생전 췌장염과 갑상선 항진증을 앓아온 그녀는 생활고에 시달리며 여러 날 굶다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녀 나이 역시 서른둘이었다.


출처 : 전북도민일보(http://www.domin.co.kr)



[뉴스페이퍼 = 육준수 기자] 2011년 영화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이 세상을 떠났다. 최 작가는 생활고로 인해 죽음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예술인의 안타까운 죽음은 사회적인 슬픔을 불러일으켰으며, 이러한 가운데 예술인 복지법과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이 탄생했다. 故 최고은 작가의 죽음에 심각성을 느끼고, 직업 예술인의 직접적 지위와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그렇다면 ‘직업 예술인’이란 무엇일까?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에서는 ‘예술활동 증명’ 제도를 각종 예술인 복지사업의 근거로 삼고 있다. 최근의 예술활동과 그로 인한 수입을 검토하여 ‘직업 예술인’으로 확인받은 사람을 지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제도는 작품 발표 기간이나 수입이 불분명한 예술인의 특성상, 정작 필요한 사람이 혜택을 받지 못할 수 있다는 언론의 비판을 받았다. 과연 예술활동 증명 제도가 바라보는 예술인의 기준은 정확한 변별력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출처 : 뉴스페이퍼(http://www.news-paper.co.kr)









스물여섯, 일곱이던 나는 이진원 씨가 생을 마감한 서른일곱의 나이가 되었다. 10년 사이 무엇이 바뀌었을까?


한국예술인 복지재단은 두 예술인의 죽음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서 예술인들을 위해 최소한 굶어 죽는 일은 없도록 조금 더 나은 환경에서 예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이유들로 만들어졌다. 최소한 굶어 죽지 않기 위해 마련된 복지라 그런가 예술인이 받는 지원금은 가난을 증명해야 했다. 매번 내 가난을 증명해야만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소득 수준이 얼마나 되는지 의료보험은 얼마를 내고 있는지 따위의 서류를 뽑아 스스로 가난을 증명하면 몇 개월은 마음 편히 작업할 수 있는 지원금이 나온다. 지원금을 받은 어느 해 아는 지인이 “나는 그런 거 안 받고 싶어. 그렇게 어떻게 살아."라는 말을 했다. 그 말은 내게 상처로 남았다. 그 후 지원금 받는 사업은 신청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고 싶지 않았다. 내 가난을 스스로 증명해가며 살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가 시작되고 많은 예술인들이 생활고에 시달렸다. 가까운 지인 역시 예술인 강사를 하며 생활을 유지해 나갔는데 팬데믹이 시작됨과 동시에 모든 일이 한순간 사라졌다. 나라에서 주는 지원금을 받기 위해 이리저리 서류를 제출하러 다니는 일이 2020년 동안 그녀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내가 방황을 하며 회사에 다니기 시작할 때에도 예술로 먹고살기 위해 몇 년을 고군분투한 그녀였다. 문득 우린 자괴감에 빠졌다. 우리는 왜 예술이라는 것을 선택해서 이리 가난한 걸까 서로 한탄이 섞인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문득 화가 났다. 난 이러려고 예술을 하는 게 아닌데 왜 이런 상황에 내몰린 걸까? 내가 선택한 상황이니 받아들이기만 해야 할까? 화가 났고 속상했지만 우리에게 뾰족한 대안은 없었다. 그저 지치지 않게 서로 다독거리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지치지 말자. 그렇게 속으로만 되뇔 뿐이었다.


“우리는 왜 항상 가난을 증명해야만 할까?


매일 무언가를 하고 있고 바빴다. 하지만 나의 활동이 생산적인 활동이 아니라고 보이는 사람들에게 나는 가끔 한심한 철없는 사람이 되었다. 가장 듣기 싫은 말이 그거였다. "그래도 넌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 네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에 대한 책임을 가난으로 지고 있으라는 말같이 들리기도 했다. 좋아하는 일을 하며 돈도 벌 수 있는 길이 분명 있을 텐데 그 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스스로를 고립시킨 나는 "내가 하는 일은 결코 돈이 될 수 없어."라는 생각을 하고 지냈던 것 같다. 하지만 결국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도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었다.


나에게 지원금을 받으며 어떻게 사냐는 말을 꺼낸 지인은 결국 가난을 증명해가며 지원금을 받고 있다. 생산적인 활동을 해서 돈을 벌어 가난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내가 가려고 하는 방향과 그녀의 방향 역시 도무지 생산적이지 못하다. 생산적이고 쓸모 있는 무언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비생산적이어도 쓸모는 없어도 스스로에게 의미가 생기는 것들이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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