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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Nov 16. 2024

마음의 상처는 욕구의 좌절이다.

나의 상처는 누가 줬을까?


노년기에 접어든 부모님의 부부생활은, 겉으론 평범해 보이지만 나에겐 영감의 원천이다. 심리상담을 받다 보면 부모님에 대한 재해석이 이뤄지는 시점이 있다. 엄마를 나의 보호자로 바라보던 시점에서, 누군가의 딸, 아내, 그리고 문학을 사랑하고 세상에 궁금한 것이 많던 소녀로. 그 소녀가 지켜야 할 아이들이 생기면서 엄마로 성장하며 생긴 거친 면모까지. 


엄마에 대한 시점을 달리해보면 엄마와 얽힌 나의 삶 또한 새로운 해석이 생긴다. 엄마의 어떤 면들이 내게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관점에서, 엄마의 성격과 나의 성격이 교류하고, 갈등하고, 화해하고, 수용하고, 거부해 온 과정들로. 그렇게 두 사람이 각자의 정체성을 다듬어 가고 있었음이 보인다. 드라마의 주인공을 '나'로 두고 보다가 사실은 그 모든 배역이 주인공이었음을 깨닫는 것이다.


심리상담을 처음 받을 때, 사람들은 인생 처음으로 '엄마' 혹은 '주 양육자'가 얼마나 내 가치관에 큰 영향을 미쳐왔는지 새삼 깨닫고 놀란다. 가정환경이란 공기처럼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믿음 체계와 감정들을 만든다. 그것을 하나씩 뜯어보며 지금 겪는 힘듦의 원인을 발견할 수 있다. 당연히 원망감도 들고, 더 좋은 환경에서 자랐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하지만 나의 힘듦에서 시선을 돌려 모든 이가 주인공임을 깨닫고 나면, 인과관계가 생각보다 훨씬 복잡한 플롯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 나를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에서 벗어났을 때, 내 상처의 원인 제공자를 또 다른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바라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원망은 감사로, 상처는 선물로 꽃 피운다.


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상처 입었다고 생각했고, 엄마는 아빠에게서 상처 입었다고 생각했으며, 아빠는 또 엄마에게서 상처 입었지만 아닌 척 부정한다. 우리는 그렇게 복잡한 플롯 속에서 서로를 탓하며 살아가는 부분이 있다. 동시에 긍정의 기운을 발휘한다. 애써 서운함을 덮어버리고 미움을 작아지게 만드려 노력한다. 헤어지지 않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다독이며 말이다. 상처는 각자의 드라마 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이 복잡한 관계 속에서 어떻게 상처의 고리를 끊을 수 있을까? 심리상담사로 일하는 나는, 평범한 듯 보이지만 수면 아래 상처가 반복되는 부모님의 관계를 바라보며 마음속으론 늘 연구를 진행 중인 기분이 든다. 가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하면 매우 흥미롭기도 하다. 부모님의 관계는 아마도 평생 나의 최애 연구과제가 될 것이다. 이 글은 지금까지 고민하고 공부하며 중요하게 발견한 점들을 정리한 글이다.


치유의 시작은 상처의 존재를 온전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상처를 누군가로부터 받았다고만 표현하면, 온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한다. 상대방에게 돌려주고 싶고, 반박하고 싶고, 나의 깨끗한 이야기에 해로운 무언가가 들어왔다고 여긴다. '마음의 상처를 온전히 수용하기'란 상처가 누군가 내게 투척한 것이 아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란 무엇일까?


마음의 상처를 수용하는 어려움에 앞서서 마음의 상처가 가진 특징을 짚고 넘어가야겠다. 몸의 상처와는 다른 점이 있다. 세게 때리는 만큼 아픈 게 아니란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내가 가진 욕구가 큰 만큼 좌절이 일어날 수 있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로 예시를 들어보겠다.


나는 어렸을 때 사교성과 거리가 멀어서 학창 시절 내내 친구 사귀기가 참 어려웠는데, 그중 마음이 맞는 단짝 친구 한 명이 생겼었다. 그 친구 덕분에 대여섯 명 정도가 어울리는 무리에 속해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단짝 친구가 며칠 학교에 못 나온 사이 그 무리로부터 따돌림을 당했다. 말을 걸면 투명인간 취급하고, 귓속말을 하는 척 큰 목소리로 "넌 쟤 어디가 제일 싫어? 나는 목소리." 하며 깔깔 웃었다. 그러다 단짝 친구가 돌아왔는데, 나는 이 상황이 너무 창피하기도, 왠지 모르게 미안하기도 했다. 나도 쭈뼛거리며 그간의 일을 말하지 못했지만, 그 친구도 영문을 모른 채 그렇게 멀어졌다. 이 일에서 나에게 가장 상처가 된 것은, 별로 친하지 않던 대여섯 명의 친구들의 따돌림보다도 어느 날 단짝친구마저 내 시선을 피한다는 것이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별다른 욕을 한 것은 아니었다. 나를 세게 때리지 않았지만 가장 마음 아팠다. 


그래도 그 일을 집에 와서 엄마에게 전하니 '속상했겠다. 애들이 나빴네.' 하며 그저 위로해 주셨다. 그것이 아마 상처 회복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상담을 하다 보니 이 순간에 더 큰 상처를 입고야 마는 사람들이 참 많았다. 가장 믿었던 부모님으로부터 '네가 뭐 잘못한 거 아니야?' '네가 애들한테 어떻게 했어?'라는 말을 들은 것이다. 여기서부터는 상처가 정체성을 흔든다. 나 자신에게는 뭔가 문제가 있다는 뿌리 깊은 믿음이 자라난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라는 표현에서 중요한 것이 간과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바로 나의 마음. 그 속에 담긴 욕구와 기대이다. 마음의 상처는 낯선 사람이 하는 헛소리가 아무리 공격적이어도 크게 나지 않을 수 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바라고 기대하는 바가 적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는다는 건, 내가 바라고 기대한 어떤 욕구의 좌절이다. 나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주길 바라고, 마음을 헤아려주길 바라고, 안전하게 지켜주기를 바라는 기대감들. 머리로는 타인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리라 다짐한다고 해도, 사람에겐 본능적으로 피어나는 욕구들이 있다.




상처를 수용하지 못하는 마음


마음의 상처는 그래서 누군가의 괴롭힘이라기보다 내가 가진 욕구의 좌절에 가깝다. 그리고 욕구가 자꾸만 좌절되는 이유는 내 탓도, 남 탓도 아니다. 타인은, 내 인생의 조연이 아니라 그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를 쓰고 있기 때문이다. 두 드라마가 잘 맞는 날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날이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마음의 상처를 입었을 때는 그래서 타인이 아닌 나를 주어로 말해야 한다. 내가 타인에게 기대한 것이 좌절되었다고 표현해야 한다.


여기서 마음의 상처를 수용하지 못하는 두 가지의 방향성이 있다. 한 가지는 바로, 내 기대감은 빼고 타인이 얼마나 잘못을 했는지만 생각하는 것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현실을 왜곡하게 되는 경향도 보인다. 왜냐하면 내 상처가 정당화되려면 상대방이 잘못을 해야 하는데, 그러다 보면 상대방이 한 말의 의도나, 평상시에 나를 어떻게 생각했을 것인지, 등등 미지의 영역인 '그의 속마음'에서 근거를 덧대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사실 나름대로 스스로의 마음에 공감하려는 노력이기도 하다. 내 마음이 이렇게나 아픈데, 상대방의 잘못이 작다면, 어딘가 맞지 않아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다시 한번 마음의 상처에 대해 되새겨보자.


'마음의 상처'와 타인의 '잘못의 크기'는 비례하지 않는다.


마음의 상처와 잘못의 크기가 비례한다는 생각은 소중한 사람에게서 상처 입었음을 부인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우리는 소중한 사람에게서 사실은 상처 입었지만 그렇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 상대방을 그만큼 '나쁜 사람'으로 낙인찍는 것이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냥 꾹 참고, 내가 더 잘하자고 다짐한다. 나는 그 사람의 행동으로부터 상처를 입었지만, 그 사람을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인식할 수 있는 것. 두 가지를 동시에 해내는 것은 심리적으로 평범을 넘어선 성숙이 요구되는 일이다.


사실 상처 입을 때마다 타인의 잘못을 재는 것은, 한 사람의 미숙함이나 어리석음으로 치부할 순 없다. 악인을 단죄하고, 잘못을 욕하며 상처를 위로하는 것은 어쩌면 우리 사회 전반의 분위기이며, 역사가 담겨있는 어떤 '정신'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놈들에게서 피해를 입었다.'거나 '우리는 올바르고 선하다.'는 가치관들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낸 마음의 습관일 것이다.


그리고 마음의 상처를 수용하지 못하는 두 번째 방향성은 바로, '부인'이다. 상처를 입지 않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건 주로 '나약해선 안된다.' '패배자가 되면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나타난다. 상처를 입었는데 아닌 척한다기보다, 자신이 상처 입었다는 점을 아예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애초에 '마음'이란 주제 자체가 나약함의 상징, 혹은 어린아이 같은 자기중심적 태도라고 믿는 사람도 꽤 많다.


나도 후자의 방식으로 상처를 부인하며 살아왔었다. 나의 마음에서 좌절된 것은 의존 욕구였다. 심리적으로 의존하고 싶지만 어디에도 기댈 수 없었다. 좌절된 의존욕구를 부인하기 위해 아무에게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적인 여성을 롤모델로 삼았다. 상처를 부인하는 사람은 그 영역이 건드려지면 화를 낸다. 분노는 약한 부분을 보호하는 역할을 해주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때 나는 누군가 문을 열어주면, "나도 손 있거든?" 하며 옆 문을 열고 나가는 유별난 인간이었다. 의존하고, 도움을 받고, 내 어려움을 오픈하는 것은 아주 수치스러운 감정을 건드리는 일이었다. 


상처를 부인하는 태도의 큰 슬픔은, 영영 그 욕구는 채움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무도 그 욕구를 채우러 오지 못하게 수치심의 결계를 쳐 둔 것이다. 채워지지 못한 욕구는 강렬한 허기가 되고, 외로움이 된다. 평생 굶은 욕구는 상한 음식도 먹어 치운다. 결국엔 머리로 아니라고 생각하는 해로운 관계에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게 만든다.


나에겐 어떤 상처가 있는가? 나는 무엇을 바라고, 그것이 이뤄지지 않아 속상했었을까? 나는 그 좌절감을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을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슬플 때,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심해 결국 그만두게 되었을 때, 가족과 만날 때마다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친구들과 대화할수록 불편해서 손절을 고민할 때. 모든 좌절의 순간에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져보면, 내가 언제나 무언가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나만의 고유한 어떤 욕구를 발견할 수 있다. 욕구는 잘못도 아니고, 이기적인 것도 아니며, 늘 채워질 순 없지만, 채워지는 감사한 날도 존재하는, 모든 이에게 존재하는 마음 요소다. 우린 모두가 각자의 고유한 욕구를 지니고 있으며, 그렇기에 고유한 상처도 품고 있다.


마음의 상처는 그저 아프기만 한 것이 아니다. 고통 속으로 들어가 보면 진짜 내 삶이 시작되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주제를 발견할 수 있다. 그 과정을 해내야만 삶의 근본적인 만족감을 채울 수 있다. 우리 모두의 마음에는 이미 그런 힘이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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