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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유 Oct 24. 2021

죄책감 없이 쉴 수 있을까?

심리상담으로 얻은 변화들


 그런 말을 했었다. “차라리 환자였으면 좋겠어. 그럼 죄책감 없이 쉴 수도 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나를 비난하는 사람도 없지 않을까?” 실제로 작은 수술을 하느라 3박 4일을 입원했던 때, 엄마는 날 보고 병원 체질이냐며 아픈데도 참 편안해 보인다고 말했다. 버스를 타고 이동할 때는 그런 생각을 했었다. ‘버스가 나 대신 앞으로 나아가 주니까, 나는 잠깐 쉬어도 되겠지.’


 너무 쉬고 싶은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다. 삶이란 모두가 지쳐서 쉬고 싶고, 떠나고 싶은 것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상담 선생님이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고 하더라. 상담을 받다 보면 가끔 그런 대사가 있다. 별거 아닌데 내 머릿속에 콱 박힌 명제를 깨닫게 되는. 나에겐 그 말이 그랬다. “모두가 쉬고 싶은 마음으로 살지는 않아요. 많이 지쳐있나 봐요.”




 나의 20대는 그야말로 오르막길 오르기에 바쁜 나날들이었다. 더 나은 직장으로 가기 위해, 더 멋진 사람이 되기 위해, 더 배워야 하고, 놀기도 잘 놀고, 뭐든지 노력해야만 했다. 실제로 그 노력들에 주어지는 성과도 있었으니 틀린 길이라고 생각도 못했다. 허탈하고 부족한 느낌이 드는 건, 아직 덜 올라가서 그런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반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는 쉬는 시간, 누워있는 내 모습, 열두 시까지 늦잠을 자는 나는 너무 한심하고, 쉬고 나면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다. 머릿속에 콕 박힌 엄마의 말을 매일 재생 버튼을 누른다. ‘그럴 시간에 공부 한 자 더 하지.’


 사실 상담을 받고 난 뒤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을 견디기란 참 어려웠다. 특히 직장인에서 학생이 되니, ‘돈을 벌지 못하는 나’라는 존재가 그렇게 한심하고, 쓸모없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처음엔 불면증도 심했고, 악몽도 자주 꾸었다. 공부를 집중해서 하려고 많은 시간을 확보했는데, 막상 그 시간 동안 불안해하고, 조급해하다가, 낭비한 시간에 자책하고, 걱정과 생각이 너무 많은 밤에는 ‘사람이 독방에서 미치는 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


 그래서 더욱 닥치는 대로 뭘 배우다가 명상이 얻어걸렸다. 심리상담가들은 명상을 많이 배운다. 내담자를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 관리에 가장 좋은 도구이기 때문이다. 명상을 하면서 자기 비난의 목소리들을 하나씩 마주했다. 마주하고 내려놓고, 마주하고 내려놓고. Doing 이 아니라 Being 그냥 존재하는 상태. 늘 또 다른 Doing으로 쉬었던 것 같다. 여행이나 스포츠, 취미생활들로. 명상을 통해서 생각을 끄고 온전히 쉬는 방법, Being의 상태를 배울 수 있었다.


 이제야 쉼이 쉼 같다. 잠을 푹 자고 나니 저절로 8시에 눈을 뜬다. ‘쉬고 싶다’가 아니라,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날이 더 많아졌다. 또, 쉬고 싶을 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며칠을 푹 쉰다. 심지어 여행을 다녀오면 하루는 집에서 쉰다. 진짜 쉰다는 것을 알고 나니 여행도 쉼 같지 않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 나에겐 스스로 휴일을 주는 일이 참 필요했다.




 세상은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경쟁자들은 무섭게 성장하고, 늘 앞서가는 누군가의 뒤꽁무니를 달려간다. 온전히 편안하게 쉬고, 아무것도 안 하며 존재 자체를 만끽하기란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나에게 위로를 건넨 상담 선생님도 누구보다 빠르게 성장하고 성취하고 계시니 말이다.


 알렝 드 보통의 <불안>에서 그런 내용이 나온다. 산업화와 기계의 등장으로 인간은 기계처럼 일해야 하는 존재가 되었다고 말이다. 기계는 감정이 없고 지치지 않는다. 그런데 기계와 경쟁하며 일자리를 쟁취해야 하는 인간은 열심히 일하면 지치며, 쉼이 필요하다. 게다가 이제는 AI라는 끝없이 학습하는 존재가 등장했다. 우리는 이제 그들과 경쟁하려면, 쉬지 않고 일하는 것도 모자라서, 쉴 틈 없이 성장까지 해야 하는 것이다.


 내가 보통의 인간임을 받아들이는 것. 생각보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스스로에게도 쉽지 않았고, 내담자들에게도 쉽지 않다. 현실이 정말로 쉬지 않고 성장하면 그만큼의 보상이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점 그냥 쉬거나, 놀거나, 아무런 이름도 붙일 수 없는 방황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한다. 나는 사실 소설책을 참 좋아했었는데, 학습할 거리가 있는 전공책들을 보느라 읽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공상의 세계에서 쓸모없는 상상을 하며 놀던 그때가 가끔 그립다.




 우리는 어쩌면 가장 큰 축복과 저주를 동시에 받았는지도 모른다. 출생 배경에 상관없이, 노력에 따라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축복의 시대에 태어났다. 반지하에 살던 사람이 초호화 아파트에 살 수도 있고,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사람도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사회적 출세를 할 수 있다. 능력주의는 그렇게 ‘넌 뭐든지 될 수 있어!’라는 희망을 줌으로써 보통의 인간으로 남고 싶은 사람들을 루저로 만든다. 소박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고픈 사람들을 말이다.


내가 취직하지 못한 것, 공부를 잘하지 못한 것,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모든 영역에 대해 ‘내 탓’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물론 세상을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비난하는 순간, 그 자리에서 정체된 사람이 될 것 같은 두려움에 나도 내 탓을 멈추지 못했다.


 그나마 참 다행이지 않은가? 이제는 근로소득으로 자본소득을 따라잡을 수 없는 시절이니 말이다. 내 탓할 수 있는 시절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자본주의의 끝물에서 마지막 남은 한 가닥 희망을 향해 달릴지 말 지. 나 역시도 여전히 고민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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