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상담으로 얻은 변화들
대학원 공부에 막 재미를 붙이던 때에, 동기가 찾아와 척도 하나를 내밀었다. “쌤, 이것 좀 해봐.” 화가 나서 제대로 읽지 않은 탓에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아마도 내현적 자기애를 측정하는 척도였던 것 같다. ‘나보고 자기애적이라고 하는건가? 나에 대해 뭘 안다고 이런 걸 불쑥 내미는거지?’ 속으로 생각한 척 따옴표를 썼지만, 사실 발끈해서 입 밖으로 말해버렸다. “지금 나보고 자기애라는 거예요?”
왜 그렇게 화가 났을까? 화라는 감정은 참 재밌다. 몹시 거부하고 싶다는 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비롯되었을테니 말이다. 공부할수록 나는 내현적 자기애와 아주 가까운 사람이었고, 지난 심리상담을 받던 과정에서 상담선생님의 몇몇 질문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자기애라는 개념은 세분화 되어 있어서, 내현적 자기애와 외현적 자기애 등 여러 갈래로 뻗어 나간다.
김상욱 교수님이 양자역학에서 양자는, 그 특성을 담기 어려운, 잘못 붙여졌지만 이미 널리 퍼져서 어쩔 수 없이 사용하는 용어라고 했다. 자기애도 그런 용어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사람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보다, 나를 너무 보호하려다가 남을 보지 못하는 사람, 남을 보지 못해서 타인을 나를 지키는 일종의 도구로 사용하는, 내면에 타인이 사람으로 존재하지 않는 외로운 존재이다. (학자마다 정의가 다르므로 그냥 내가 공부하고 소화한 대로 정의해보았다.)
내 화는 사실 두려움이었다. 나쁜 사람이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기애적이라고 하면 정말 이기적이고 나쁜 사람일 것 같지 않은가? 인간은 동물을 벗어나 극도로 사회적인 존재가 되어서 죽음보다도 사회적 도태됨을 더욱 두려워하는 것 같다. 나역시 그랬다. 죽음보다 무서운 게 사회적으로 나쁜 사람으로 낙인되는 것, 이기적이고 착취적이며 쓸모 없는 면모를 들키는 것. 죽음만큼이나 두려운 일이다.
내가 가진 자기애적인 모습은 이렇다. 어릴때부터 누군가에게 의존해본 적 없는 나는 내면에 거대하고 듬직한 상상속의 나를 만든다. 그 듬직한 나는 씩씩하고, 주어진 일은 평균 이상으로 해낸다. 그런데 사실은 듬직한 척할 뿐 속에는 여리고 연약한 솜털이 있다. 그 솜털이 바깥으로 드러나면, 마치 아물지 않은 상처에 알콜을 바르듯 따갑고 아프다. 솜털은 너무 힘들다고, 쉬고 싶다고, 누군가 내 삶을 책임져 줬으면 좋겠다고 말하지만, 나는 솜털을 밖으로 꺼낼 자신이 없다. 그래서 계속 겉에 더 씩씩하고, 더 대단하고, 더 괜찮은 나를 만든다. 솜털에 난 상처들을 덮어버린다. 마치 화려하고 열매가 가득한 두터운 나무가 뿌리가 없는 것과도 같다. 겉보기엔 강하고 화려하지만 비바람에 취약해서 곧 쓰러질지도 모르는.
취약한 마음을 보호하는 것이 왜 자기애냐면, 그것을 보호하는데 온 에너지를 쓰느라 주변을 끌어다 쓰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칭찬, 인정, 그런 것들을 먹이삼아 나를 보호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변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가 어렵다. 그에게도 내면의 상처가 있음을 알기가 어렵다. 공격에 예민해진 마음은, 주변 사람들을 실제보다 더욱 공격적이고 강한 존재로 인식하게끔 한다.
취약함을 드러낼 수 없던 시절의 연애는 늘 외로웠고 화가 났다. 나는 사실 의지하고 싶은데, 그렇지 않은 척 했다. 독립적인 여성인 척 하면서도 보살핌을 받길 바랐고, 그 바람은 당연히 좌절되니 화가 났다. 정말 웃긴건, 나를 약한 존재로 보고 보살펴 주려는 사람은 화가 나서 아예 만나지도 못했다. 꺼내고 싶지 않은 취약한 면을 건드리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자상한 사람과 연애하려면 나의 연약한 면을 드러내는 능력이 필요한 거였다. 누군가 “도와줄게”라고 말하면 “내가 할 수 있는데?”라고 받아치며 멋있는 척을 해댔다.
누구나 취약함을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든 내용물은 다르다. 나에겐 좌절된 의존욕구가 들어 있었고, 작고 약해서 무시받던 어린 시절의 상처들이 들어 있었다. 똑똑하고 싶은데 그렇지 못한 부분도 있었고, 늘 부모님에게 인정 받을 수 없는, 어딘가 부족한 존재라는 좌절감도 들어 있었다.
이러한 이슈는 사실 남자들에게 더욱 치명적으로 존재한다. 상담을 하며 남자 내담자들의 인생 속에서 취약함에 대한 강력한 거부가 생겨난 이야기들을 듣고 있자면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태어난 것에 감사하게 된다. ‘연약하고, 의존적이고, 무능한’ 남자가 되는 것을 상상해보라. 나는 운전을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긴 적이 별로 없다. 누군가 소개팅을 시켜주면서 ‘얘 사실 운전도 못하고 차도 없어’ 라고 속닥거린 일도 없다. 하지만 남자 내담자들은 늘 큰 고백을 하듯이 말한다. ‘제가 사실 운전을 못하거든요.’
성에 대한 이슈에서 여자의 분노와 남자의 분노는 같지 않을 것 같다. 모두가 그렇지는 않겠지만, 나는 종종 그런 울부짖음이 들린다. ‘우리도 사실 연약한 부분이 있어요.’ ‘우리도 상처 받으면 아프다고요.’ 안타깝게도 서로를 비난하는 방식으로 화를 내고는 있지만, 모두가 자신의 개성있는 아픔이고 슬픔이다. 남의 상처 말고, 내 상처도 돌봐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좌절되어 분노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우리들에게 유일무이한 최고의 치료제는 공감이다. 자기애를 연구한 정신분석가 코헛은, 자기애의 유일한 치료도구는 ‘공감’이라 했다.
강아지를 키우면서 밥은 주지만 산책시키지 않는 것도 학대라고 한다. 인간의 마음에게 공감을 해주지 않는 것은 정서적 학대와도 같다. 공감받지 못한 마음은 어떤 식으로든 병이 난다.
공감이란게, 마치 매일 30분씩 걸으면 건강해진다는 것처럼 뻔한 말이지만 꾸준히 실천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부모로부터 공감 받아본 적 없는 사람에겐 정말 어려운 일이다. 실패한 나에게 공감하는 것보다는 채찍질과 비난을 하는 것이 쉽다. 실패 속에 느끼는 감정을 충분히 느끼는 것보다, 술 한잔 마시고, 게임과 넷플릭스로 잊어버리는 것이 편하다. 그러니 조금 강하게 말해야겠다. 그 마음을 스스로 방치한다면, 부모가 나에게 준 학대의 방식을 스스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