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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령 May 11. 2023

싫어하던 것들이 좋아진 이유

물들듯 닮아가는 그런 것들



2019년 04월 25일


[비]

토독토독
1년을 지나, 봄을 적시는 소리가 들렸다

콧구멍을 크으게 열어
한 숨 봄의 공기를 담았다
기웃거리는 봄의 분위기를 들이마셨다

물기를 머금어 짙어진 풀잎 내음,
시원하면서도 비릿한 오묘한 빗물 냄새가
얼굴을 감싸고 가볍게 우산을 두드리는
물방울들의 연주가 더해진다

그렇게 아주 가끔씩
너는 나를 비라는 낭만에 젖게 만든다





사랑하면 닮는다는 말, 진짜인 걸까?

그렇게 바뀌어가는 우리 둘


요 며칠 새 봄을 알리는 비가 내렸다. 황사 비이긴 해도 어쨌든 길고 긴 1년을 지나 어김없이 봄비가 마른땅을 적셨다. 이 글을 적게 한 건 단연 돌아온 봄비 때문이었다. 나는 비를 싫어한다. 음, 정확히 말하자면 싫어했다. 드넓은 하늘 위를 우글우글 덮고 있는 먹구름. 비가 올지 안 올지 몰라 조마조마해하던 마음, 축축 처지는 앞머리와 비가 오기 무섭게 곱슬거리며 올라오는 머리까지. 나에게 비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날씨였다. 비 오는 날씨를 낭만이라 부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할 만큼 비를 싫어했던 사람이 바로 나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리 비를 싫어하던 나였는데 무엇이 나의 확고한 취향마저 꺾어버린 것인가!






'예령님 남자친구분이랑 닮으신 것 같아요!'

그와 사귄 지 1년 반 즈음이 되던 해의 어느 날,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함께 찍은 사진 게시물에 이런 댓글이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 듣는 말이었다.

'엥? 우리가 닮았다고?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은데'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들여다본 사진 속 우리. 듣고 보니 닮은 것 같기도 한 우리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서로 사랑하면 점차 닮아간다는 말이 이런 건가?' 어렴풋이 실감할 수 있었던 날이었다.

 

함께 쌓아온 나날들이 어느덧 2100일. 우리는 함께 여섯 번의 해를 맞았고, 스물네 번의 계절을 함께했다. 함께 해온 시간만큼이나 그의 취향과 표정, 말투 하나하나까지 나의 피부처럼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실감하게 해 준 것이 바로 '비'였다. 비가 내리는 창문을 멍하니 바라보니 비 오는 날엔 파전이 당기듯 자연스레 잔잔한 노래가 생각났다. 유튜브에 '잔잔한 플레이리스트 광고 없는'을 검색하고 눈이 가는 썸네일을 클릭했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감상하며 창문을 보니 불현듯 생각나는 한 단어가 있었다.

바로 내가 그토록 이해할 수 없었던 '낭만'이었다.






"아~ 좋다! 비냄새."

그는 항상 비가 오는 날을 즐기곤 했다. 비가 와서 빗물이 바지에 튀어도, 애써 다듬은 머리가 망가져도 어김없이 비가 오면 좋다고 말했다. 보슬보슬 내리던 비도, 하늘이 뚫린 듯 내리는 비도 그는 달갑게 맞이하며 우산 밖으로 손을 쭈욱 뻗었다.

"머리도 다 망가지고 습한데 도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투덜대듯 말하는 나에게 그는 웃으며 말했다.

"왜, 우산에 비 떨어지는 소리도 좋고, 시원하고, 냄새도 좋구먼 뭘!"


2020년 여름, 기념일을 맞아 함께 경주로 떠났던 날. 그날 경주에는 폭우가 쏟아졌다. 어찌 그렇게 가는 곳마다 비구름을 몰고 다니는지, 커다란 우산 속에 숨어 다녔는데도 비로 흠뻑 젖을만한 폭우였다. 첨성대와 대릉원 등 경주의 유적지를 모두 도는 것이 우리의 계획이었지만, 하늘에서 구멍이 난 듯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당최 제대로 구경할 수가 없었다. 우리 위를 가득 채운 먹구름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너희의 기념일 내가 제대로 망쳐주겠다! 하하하하!'


푹 눌러쓴 우산 속 우리의 발에 시선을 맡긴 채 하염없이 거리를 걸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쳐다보니 거리에 넘치던 사람들도 어느새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땅 속으로 흡수되지 않아 물을 가득 머금은 웅덩이들을 피해 가며 저벅저벅 소리를 내고 있는 우리의 발소리만이 시끄러운 비의 소음과 어우러지고 있었다.


풀이 죽은 채로 말없이 걷는 나에게 그는 파격적인(?) 제안을 날렸다.

"그래도 이왕 왔는데 첨성대 한번 들어갔다 올래?"

'해도 졌고, 비가 이렇게 오는데 첨성대를...?'

분명 물 웅덩이가 많아서 제대로 구경도 못할 텐데라고 생각했지만 해맑은 얼굴로 제안하는 그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이미 어둑해진 시야를 뚫고 물 웅덩이를 폴짝폴짝 뛰어다니며 우여곡절 끝에 첨성대 앞에 멈춰 선 우리. 사진도 못 찍고 예쁘지도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첨성대는 쏟아지는 물줄기를 만나 더욱 웅장했다. 오히려 낭만적이었다. 미친 듯이 내리는 빗소리는 음악처럼 들려왔고, 우산을 두드리는 물소리는 그에 화음을 얻는 듯했다. 혼자였다면 절대 낭만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함께였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이었다.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비도 낭만을 입을 수 있구나 생각했었던 것 같다.


조명 사이로 비치는 빗줄기


여행 내내 비가 내렸지만 좋았다. 함께였던 것도 있지만 결정적으로 그와 여행하며 비가 낭만으로 바뀌었기 때문이 었다. 한 뼘의 생각만 바꿔보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수 있었다. 전혀 다른 취향의 둘이지만 그가 좋아하는 것들을 나도 모르게 좋아하게 되는 것들이 신기했다.


탄산음료는 입에 대지도 않았던 나는 그를 따라 콜라를 먹기 시작했다. 얼음 가득 담긴 컵에 콜라를 콸콸 부어먹는 그의 습관이 나에게도 배어 이젠 얼음 없이 먹는 음료는 허전하게 느껴진다. 좋아하지 않던 삼겹살도 그와 함께 먹으면 이상하게 맛있게 느껴졌다. 안먹던 초콜릿도 찾게되며 점점 식성도 바뀌고, 사소한 습관들도 닮아갔다. 심심할 때마다 아무 생각 없이 멍을 때리며 그의 귀를 만지작거리던 내 습관을 따라 어느덧 그도 나의 귀를 만지고 있었다.


함께 있다 보면 많은 것들이 서로에게 물들듯 스며든다. 당장은 느끼지 못하더라도 시간이 흐른 뒤 한 발짝 물러나 바라보면 많은 것들이 바뀌어있었다. 사랑하면 얼굴만 닮아가는 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면 구석진 곳까지 서로의 일부를 품게 된다. 배우고자 한 것도 아니고 따라 하려고 한 것도 아닌데 그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서로를 닮아간다. 싫어하던 것을 좋아하게 만들고, 좋아하는 것은 더 좋아하게 만드는 건 사랑으로부터 받는 특별한 선물인 것 같다. 믿을 수 있고, 기댈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도 귀한 일이다. 그게 친구가 되었든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든 탈도 많고 일도 많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작은 가슴들이 그 속에서 행복을 찾고 바뀌어갈 수 있다는 건 행운이 아닐까?


아직도 나는 사랑이라는 모양에 대해서 깨닫지 못했다. 모진곳들은 둥글게, 둥근 곳들은 더 둥글게 다듬어 나가는 사랑하는 과정들을 잘 보듬어야지, 다짐해 본다.


싫어하는 비가 좋아진 이유는 바로 내가 그를 많이 좋아하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동시에 서로에게 그만큼 믿을 수 있는 공간을 내어준 우리를 토닥인다. 이 글을 읽게 될 사람들에게는 각자 어떤 모양의 사랑이 스며들어있을까? 물음표를 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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